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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tch Point] 쑤저우의 여행신탁

  • Editor. 트래비
  • 입력 2016.08.30 1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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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을 떠날 때 내 마음은 점 보러 갈 때와 좀 비슷하다. 지금까지 내 인생의 큰 변화는 죄다 우연인 듯 운명적인 여행에서 촉발됐다. 마치 신탁을 기다리는 고대 그리스인처럼 나는 여행에서 미래의 실마리를 찾는다. 내게 ‘티베트에 가리라’는 신탁이 온 것은 지난 6월 중국 쑤저우(소주, 蘇州)에서다. 

그날은 쑤저우에서 항저우로 이동하는 날이었다. 나는 바쁜 일정 때문에 점심도 거르고 혼자 핑장루라는 전통 거리를 걷고 있었다. 근데 거리와 참 어울리지 않는 티베트 티숍 하나가 눈에 띄었다. 들어가 보니 티숍은 일부고 안쪽 복도를 따라 식당과 차관을 갖춘 대갓집이었다. 조용한 분위기에 음식도 맛있고, 어쩐지 편안했다. 빈집을 구경하듯 이 방 저 방 들어가서 불당이니 탱화니 하는 것들을 살펴봤다. 한참 후 짐을 챙겨 나오는데 들어갈 땐 못 본 마니차*가 복도 끝에 있었다. 하도 커서 내 몸집만 했다. 옆에 있던 직원에게 마니차를 몇 번이나 돌려야 하는지 물었다. 외국인인 나를 의욕적으로 안내해 주던 직원이 답을 찾느라 허둥댔다. 높고 칼칼한 여자의 목소리가 날아든 것은 바로 그때였다. 

“7의 배수만큼 돌려요. 마음속에 있는 걱정이나 생각이 사라질 때까지요.”
“아, 고맙습니다. 근데 전 소원을 빌 생각이었는데요?”
“마니차를 돌리는 건 무언가를 더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덜어 내기 위해서예요. 당신이 갖고 있는 고통을 덜어 내세요.”

혼자 차를 마시고 있던 그 여자의 이름은 애니였다. 나보다 서너 살 많아 보이는 그녀는 티베트를 여행한 후 티베트 불교에 푹 빠졌다고 했다. 내가 영화 <쿤둔>을 감명 깊게 봤다고 했더니 격하게 공감했다. 애니는 달라이 라마가 나온 영화 목록부터 카르마(업), 환생에 이르기까지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한참 늘어놓았다. “인생의 행복과 고통은 태어날 때부터 정해져 있어. 부모가 어떤 사람인가, 건강한 몸인가, 지능이 높은가 낮은가에 따라서. 우리 자신의 카르마에 따라서.” 그녀의 활활 타는 두 눈과 즐거운 얼굴, 열정적인 말투에서 순수한 신념이 흘러넘쳤다. 

나는 마니차를 일곱 번 돌렸다. 소원은 빌지 않고, 딱히 내려놓을 고통도 없어서 내가 쑤저우에서 마니차를 돌리고, 애니라는 여자에게서 카르마에 대한 설교를 듣는 것은 무슨 연유인가, 그런 걸 생각했다. 헤어질 때 우리는 위챗(We Chat) 아이디를 주고받았다. 애니는 내게 ‘화이트 타라’라는 걸 보내 주겠다고 했다.

뒤늦게 기차역에 갔더니 항저우로 가는 좌석이 딱 한 자리 남아 있었다. 기차에 몸을 싣고 한숨 돌리고 있을 때 애니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이것이 화이트 타라예요. 티베트 불교에선 관세음보살 격이죠.” 이럴 수가. 애니가 보내 준 불상의 사진은 완전히 그녀 자신의 모습이었다. ‘당신을 닮았다’는 내 말에 애니는 황당해했지만, 순간 이런 생각이 들었다. 혹시 나, 지금 관세음보살과 채팅하고 있는 건 아닐까. 애니라는 여자에게서 카르마에 대한 설교를 들은 것은 정말 무슨 연유가 있는 건 아닐까.

그래서 티베트에 가보기로 했다. 티베트의 매치 포인트는 이미 준비가 끝났다. 달라이라마 14세의 일생을 다룬 영화 <쿤둔>, 어린 시절의 달라이 라마 14세와 이방인의 우정 이야기인 <티베트에서의 7년>, 중국화 된 티베트 변방의 이야기를 다룬 소설 <색에 물들다> 모두 예전에 봐 뒀다. 티베트에서 내가 새롭게 받게 될 여행 신탁은 무엇일까. 어쩌면 설마 혹시, 종교가 되려나.  
 
 
*마니차 | 불교 경전을 새긴 원통으로 한 번 돌릴 때마다 불교 경전을 한 번 외는 것으로 간주한다.
 
*이번 호를 끝으로 도선미 작가의 매치포인트 연재를 마칩니다. 결정적 순간을 찾아 떠나는 그녀의 여행은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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