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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인도-아그라를 여행하는 명백한 이유

  • Editor. 트래비
  • 입력 2016.09.12 1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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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 Hours in India
북인도에서의 골든타임 
 
●Agra 아그라  
 
델리에서 남동쪽 200km 지점에 있는 아그라. 갠지스 강의 지류인 야무나(Yamuna)강변에 위치한 아그라는 인도 네 번째 이슬람 왕조였던 로디 왕조Lodi, 1451~1526년가 왕도로 정한 이후, 무굴제국(Mughul, 1526-1857년)이 수도를 올드델리로 옮기기 전 1564년부터 1658년까지 북부 인도의 중심이었다. 두 왕조의 수도였던 만큼 아그라에는 인도를 대표할 만한 눈부신 문화유적들이 많이 남아 있다. 그중에서도 아그라 성과 타지마할은 무굴제국이 남긴 최고의 역작이라 할 만하다. 
 
샤자한이 유폐됐던 아그라성 테라스에서 바라본 타지마할. 타지마할의 탑은 현재 청소 중이라 구조물이 세워져 있다
타지마할의 대리석에는 석재 상감기법으로 정교한 문양들이 새겨져 있다
모스크에서 바라본 타지마할
 
 
▶SCENE #1 
타지마할 (Traj Mahal)
아그라를 여행하는 명백한 이유
 
인간이 만든 최고의 걸작품.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무덤. 지상 최고의 완벽미. 타지마할(Taj Mahal)을 향한 후대의 찬사는 극진하다. 아그라가 무굴제국 최고 전성기의 유서 깊은 도시라지만 타지마할이 없다면 아마 그 명성은 지금과 달랐을 것이다. 

타지마할은 궁전 형태를 한 무덤이다. 무굴제국 5대 왕인 샤 자한(Shah Jahan, 1627~1658년)은 16세였던 뭄타즈 마할(Mumtaz Mahal)의 미모에 반해 그녀를 왕비로 맞이했다. 전쟁터에도 데리고 다닐 만큼 사랑했던 왕비는 14번째 자식을 전쟁터에서 출산하다 죽고 말았다. 왕비를 잃은 샤 자한은 아그라 성과 가까운 야무나 강변에 자신의 예술적 열정을 쏟아 부어 그녀를 위한 무덤을 만들었다. 

1632년 건립을 시작한 무덤은 완성되기까지 22년이 소요됐다. 당시 건설비가 400만 루피, 지금의 가치로 환산하면 약 720억원. 동원된 인원만 매일 2만명에 자재를 운반한 코끼리가 1,000여 마리였다. 이탈리아, 터키, 중국, 프랑스의 장인들이 건축에 참여했고, 설계는 이란 출신의 천재 건축가 우스타드 이샤(Ustad Isa)가 맡았다. 타지마할을 짓는 데 사용된 흰 대리석은 지역의 마크라나 광산에서 캐내 운반했고, 파테푸르 시크리에서 사암과 벽돌을 사용했으며 홍옥수, 다이아몬드, 터키석, 마노, 산호 등 터키와 중국, 러시아에서 색색의 귀한 돌과 보석을 수입해 장식했다. 

타지마할의 실물은 사진이나 영상에 비할 바가 아니다. 동서남북 어디서 보아도 완벽한 대칭을 이루고 중앙 돔을 중심으로 모퉁이마다 세워진 50m의 미너렛은 지진에도 무너지지 않도록 바깥쪽으로 미세하게 휘어져 있다. 코란의 문구와 아라베스크 문양이 조각된 장식은 어느 하나도 똑같은 것이 없다. 대리석에 새겨진 문양은 모자이크의 일종인 피에트라 두라(Pietra Dura), 석재 상감기법을 사용했는데, 대리석에 문양을 판 뒤 그 홈에 돌이나 보석을 박아 넣었다. 타지마할 내부에는 왕비와 함께 샤 자한이 잠든 화려한 모형관이 나란히 놓여 있으나 시신은 지하에 있다.

타지마할의 동쪽과 서쪽으로 눈을 돌리면 같은 모습의 영빈관과 모스크가 서 있다. 붉은 사암과 대리석으로 지어진 이 건축물들은 타지마할 못지않게 아름답다. 

그러나 백성의 입장에서도 타지마할이 아름다웠을까. 타지마할을 만들기 위해 세금을 50%나 올렸고 결국 민심을 잃고 샤 자한은 셋째 아들 아우랑제브(Aurangzeb)에 의해 쿠데타를 당해 평생 아그라성에 유폐된 신세가 됐다. 타지마할은 역시 그 아름다움 때문에 약탈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수세기 동안 자트족(Jats)이나 영국군에 의해 보석들은 사라지고 현재 서구의 박물관에는 타지마할의 보석들이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무굴제국 | 무굴은 투르크어로 ‘몽골’을 뜻한다. 몽골 후손인 티무르의 5대손이었던 투르크인 바부르는 300년에 걸친 델리 술탄 왕조를 몰아내고 무굴이라는 새 왕조를 세웠다. 족보가 변변치 못했던 바부르는 스스로를 칭기즈칸의 후손이라 사칭하고 다녔다. 무굴제국 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로 평가받는 왕은 악바르다. 그는 북인도 전역을 차지해 지방 호족 공주들과 정략결혼으로 화합을 다졌고, 남편이 죽으면 아내도 따라 화장시키는 힌두교의 ‘사티’를 금지하고 과부의 재가를 허용하는 등 여성인권에도 앞장섰다. 17세기 무굴제국에는 인구 20만 명이 넘는 도시가 9개였는데, 유럽에는 콘스탄티노플, 나폴리, 파리, 런던이 전부였던 때다.
 
tip | 타지마할에 입장할 때는 입구에서 철저한 소지품 검사가 이루어진다. 작은 소지품 가방 외 큰 배낭은 소지할 수 없고, 카메라의 경우 가방 없이 카메라만 빼서 들고 가야 한다. 여성들은 립스틱 등 화장품도 갖고 들어갈 수 없다. 입장권은 타지마할 남문에서 한 번 더 확인하므로 잃어버리지 않도록 주의할 것. 
 
주소: Agra District, Uttar Pradesh 282001
시간: 8:00~17:00(금요일 휴관)
입장료: 1,000루피
 
 
무굴제국의 또 하나의 걸작, 아그라성의 입구
 
 
▶SCENE #2 
아그라성 Agra Fort
견고한 요새, 빛나는 궁전
 
타지마할의 북서쪽 야무나 강변에는 붉고 웅장한 요새, 아그라성이 서 있다. 성채의 내부는 20m 높이와 2.5km 길이의 견고한 이중 성벽과 해자로 둘러싸인 채 감춰져 있으며, 지금도 군사시설로 사용된다. 궁전과 모스크, 정원이 어우러진 아름다운 내부는 바깥에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다. 

아그라성은 1565년 무굴제국* 3대 왕인 악바르(Akbar)에 의해 만들어지기 시작해 후대 왕들이 증축했다. 샤 자한은 화려한 건축물들을 추가했고, 아들 아우랑제브가 외부 성채를 만들고 성벽 사이에 물길을 설치했다. 성 내부 동남쪽에 자리한 자항기르 마할(Jahangir Mahal) 궁전은 힌두 궁전 건축양식과 무굴양식이 융합돼 힌두교와 이슬람교 문화의 조화를 건축적으로 표현하고자 했던 악바르의 뜻이 잘 드러나 있다.  

‘포로의 탑’이라는 뜻의 무삼만 버즈(Musamman Burj)는 샤 자한이 유폐되어 살았던 곳이다. 샤 자한은 날씨가 맑은 날 이곳에서 타지마할을 바라보며 죽은 아내를 그리워했다고 전해진다. 넓은 강연장 디완이암(Diwan I Am)의 공작의 꼬리털 모양을 한 무굴양식 아치 또한 매우 아름답다.  

아버지를 유폐시키고 권좌를 차지한 아우랑제브는 90살까지 50년을 통치했다. 그러나 제국 역사상 최대의 영토를 가졌던 그는 제국 멸망의 원인이기도 했다. 선대왕들의 관용정책을 무시하고 비이슬람교 신자들에게 지즈야인두세를 부활시키는가 하면, 시크교 지도자를 잡아 잔인하게 처형하고 힌두교도 반란군을 진압하는 데 30년 넘는 세월을 소진했다. 내란과 저항을 거듭하던 제국은 결국 때마침 쳐들어온 페르시아와 아프간 세력에 의해 18세 중엽 몰락당하고 무굴제국은 델리 주변 소국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주소: Rakabganj, Taj Rd, Agra
전화: +91 562 296 0457
시간: 6:00~18:00  
입장료: 550루피
 

아그라성 내 강연장이자 공공 접견실인 디완이암. 겹겹의 아치들이 우아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아그라성을 장식하는 문양들은 놀랍도록 세밀하고 다양하다
 
글·사진 Travie writer 이세미 에디터 트래비 취재협조 아시아나항공 flyas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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