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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 Air 모든 영화는 여행이다] 나이테의 법칙

  • Editor. 차민경
  • 입력 2016.11.01 1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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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는 빨리 어른이 되는 것이 목표였다. 뭐든 성인이 되는 것이 급해서 시간이 어떻게 지나가는지 신경 쓰지 않았다. 영화로울 것 없는 날들, 어제보단 내일에 기대가 높았기 때문이겠다. 그런데 말이다, 서른 고개를 앞두고 나니 한 번도 미련 둔 적이 없었던 어제들이 아쉬워지는 것은 왜인가. 이것저것 해보지 못한 것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생기로울 수 있는 날이었다는 생각이 번뜩번뜩 스치는 것이다. 

마리아가 지금 번뇌에 빠진 것은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녀에겐 심지어 영화로웠던 시절까지 있었다. 젊은 시절 연극 <말로야 스네이크 Maloja Snake>에 등장하는 젊고 매력적인 시그리드 역을 맡아 스타덤에 올랐던 그녀다. 20년이 지나 마리아에게 시그리드의 상대역이자 중년의 헬레나 역이 들어왔다. 젊은 시그리드에게 사랑을 달라 애원하는 약자. 마리아의 생각에 매력적인 구석이라고는 없는 배역이다. 스포트라이트에서 살짝 비껴난 곳에 있는 헬레나가 하는 대사 하나하나 밉고, 시그리드 역을 맡은 배우가 질투 나는 것을 참을 수 없다. 

한낱 범인이면서도 매일 질투 나는 사람이 생겨나는 마당에 ‘내 배역’을 맡은 ‘젊은’ 배우를 보고 어찌 무념무상 할 수 있으리. 우물에 밀어 넣지 않은 것이 다행이다. 그러나 초점은 질투가 아니다. 연극 감독은 헬레나를 ‘20년 뒤의 시그리드’라 생각하라 주문했다. 압도적이었던 시그리드가 인기를 잃고 시야 바깥으로 밀려난 때가 헬레나이고, 그때의 그녀를 그려 보란 것이다. <클라우즈 오브 실스마리아>의 인물과 연극 <말로야 스네이크> 속 인물이 겹쳐지는 것은 아주 의도적이다. 마리아는 더 이상 화제의 중심에 있는 배우가 아니다. 헬레나의 대사를 읊으며 울 수밖에 없는 마리아를 이해하겠다. 

역할이 바뀌어 있는 것을 깨닫는 순간이 있다. 대학시절이 엊그제 같은데 시조새 취급을 받거나, 영원히 주니어일 줄 알았던 모임에서 시니어가 되어 있을 때가 그렇다. 더 이상 20대 사이에서 피부탄력으로 경쟁할 수 없음을 깨달을 때는 절박함에 더해 스스로가 가련하다. 마리아의 번뇌에 비교하면 너무 경박스러워 입 밖에 내고 싶지 않았지만. 돌아가 다시 재생버튼을 누를 수 없다는 불변의 진리 때문에 패배감을 동반한다. 

그럼 시간이 가는 만큼 지는 싸움밖에 남지 않는다는 것인가. 타협만이 답이란 말인가. 마리아의 마지막 제안이 씁쓸하게 거절당하고 그럼에도 고개를 끄덕이고 거절을 받아들이는 것은 어느 정도의 수긍일 수 있다. 

영화 속 연극 제목인 <말로야 스네이크>는 스위스 실스마리아 지역의 말로야 계곡에 구름이 산등을 넘어 뱀처럼 흘러내리는 순간을 표현하는 말을 그대로 따왔다. 뱀처럼 보려면 뱀이기도 하고 구름처럼 보려면 그냥 구름이다. 그러나 아름답다는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젊은 시그리드이기도 하고 나이든 헬레나이기도 한 마리아에게 이것이 위로가 될 수 있으려나.   
 
클라우즈 오브 실스마리아 Clouds of Sils Maria
감독 올리비에 아사야스Olivier Assayas
드라마 | 124분
출연 줄리엣 비노쉬Juliette Binoche
        크리스틴 스튜어트Kristen Stewar
        클로이 모레츠Chloe Moretz
 
*글을 쓴 차민경 기자는 <트래비>와 그 자매지인 <여행신문>의 기자다. 겨우 서른을 앞두고 겁이 나서 설설 기는 중인데, 12월에는 진짜 패닉이 올 것 같아 11월에 미리 나이에 대한 기사를 쓴다. 12월 기사가 없으면 그렇고 그런 줄 아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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