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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서령의 우주여행] 겨울 뉴욕 여행법

  • Editor. 트래비
  • 입력 2016.11.01 1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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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고나길 손발이 찬데다 유달리 추위를 많이 타면서도 어쩌다 보니 긴 여행은 모조리 겨울에 떠났다. 날 따신 봄이면 굳이 어딜 떠날 것도 없이 서울이 좋았고 여름에는 끝도 없이 게을러져 에어컨 돌아가는 작업실이 제일 편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가을이 오면 어딘가로 갈 계획을 세우다가 겨울이 되어서야 겨우 비행기를 탔다.
 
몇년 전 뉴욕에 갈 때에도 그랬다. J는 여행계획서를 H와 나에게 내밀었다. A4 2장으로 깔끔하게 출력한 것이었다. ‘연말 뉴욕여행 확정 안내’라는 제목이 있었고 부제로 ‘인생 뭐 있나?내일이 없는 여자들처럼 놀아 봅시다’라 쓰여 있었다. 목적지를 뉴욕으로 결정한 것도 J 혼자였고 여행기간과 항공, 호텔도 J가 마음대로 정했다. H와 나는 군말 없이 J가 미리 결제한 예약금을 그녀의 계좌로 이체했다. 30대를 끝내며 우리는 여행에 인생을 원 없이 탕진하기로 이미 마음을 먹은 여자들이었다.
 
나는 열네 벌의 옷을 트렁크에 챙겼다. 열나흘 동안의 여행이기 때문이었다. 아침마다 무얼 입을까 고민할 것 없이 코디를 끝낸 열나흘치의 옷을 트렁크에 욱여넣고 코트는 두 벌만 챙겼다. 도톰하고 가벼운 코트와 다소 얇긴 해도 보라색이 끝내주게 예쁜 코트였다. 그것만으로도 트렁크가 꽉 찼다. 발로 밟고 엉덩이로 꾹꾹 눌러서야 겨우 뚜껑을 닫을 수 있었다. 우리는 맨해튼 거리를 쏘다니며 30대의 마지막 사진들을 마음껏 남길 생각이었다.
 
지금도 내 서재방에는 그때의 사진들이 액자에 담긴 채 곳곳에 놓여 있다. 아마 열댓 장쯤 될 것이다. 트렁크가 터지도록 챙겨 갔던 옷들은 흔적도 없다. 사진 속 나는 오로지 카키색 코트만 단단히 여민 채 빨개진 코만 드러냈을 뿐이다. 뉴욕의 겨울은 정말이지 지독하게 추워서 코트 안에 내가 무얼 입었는지는 하나도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보라색 얇은 코트는 딱 하루 입고 나갔지만 추위에 손이 곱아 나는 가방 속 카메라를 꺼내지도 못했다. 
 
해가 지면 날은 더 차가워져서 우리는 멀리도 가지 못하고 호텔 앞 조그만 바에 매일매일 갔다. 소호 거리에 있던 그곳의 이름은 ‘Toad Hall’이어서 우리는 ‘두꺼비호프’라 부르기 시작했다. 곱슬머리 주인장이 위스키를 따라 주는 두꺼비호프 구석자리에 앉으면 우리만큼이나 그곳에 죽치고 있던 세네갈 출신 녀석들이 참 끈질기게도 치근덕거렸다. 사실 그래서 맥주도 몇 잔 얻어 마시긴 했다. 아무래도 내 코트는 바람을 잘 막아 주지 못하는 것 같아 당시 뉴욕에서 한창 인기를 끌던 두꺼운 오리털 점퍼를 몇 번이나 살까 고민했지만 너무 비쌌다. 
 
나는 그 다음 해 겨울에 다시 뉴욕엘 갔다. 미국 중부지역에서 여름을 보내다 간 길이어서 또 겨울 코트가 마땅치 않았다. 그래서 그 오리털 점퍼를 결국 사고야 말았다. 1년이 지난 재고라 30%나 할인을 해주었고 나는 그걸 껴입고 소호 거리를 돌아다니다 두꺼비호프를 발견했다. 반가운 마음에 꺅꺅 소리를 질렀다. 맥주를 사 주는 세네갈 출신 녀석들은 없었지만 대신 금발머리 남자가 아주 잠깐 말을 걸어 주었으므로 마흔 살이 되어도 괜찮군, 혼자 우쭐거리기도 했다.
 
숱한 시절 여행을 다녀도 이 모양이었다. 이제는 정말 잊지 말고 겨울 여행을 떠날 때엔 아주아주 두꺼운 코트만 넣어 가야지. 그리고 현지에서의 쇼핑을 위해 트렁크는 빈 채로. 또 이어폰은 반드시 주머니에 넣고 갈 것. 잘 챙긴답시고 트렁크에 넣어서 비행 내내 까실한 기내용 이어폰으로 귀를 괴롭히게 되더란 말이지. J와 H와 함께 모여 앉으면 아직 우리는 소호 거리의 두꺼비호프 이야기를 한다. 우리, 언제쯤 다시 갈까.  
 
 
*글을 쓴 소설가 김서령은 불과 몇년 전까지만 해도 떠돌이 여행가처럼 살았지만 어느 날 문득 딸이 생겼다. 그 딸의 이름이 ‘우주’다. 우주가 만 세 살이 되면 뉴욕 맨해튼의 토이저러스에 함께 갈 생각이다. 꼭 2년이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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