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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래비스트 유호상의 여행만상] 유혹

  • Editor. 트래비
  • 입력 2016.11.30 1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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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일이 있어도 오늘 중에 벨기에로 이동해야 했다. 유럽 남부에서의 휴가를 마치고 뮌헨에 가서 적당한 시간대의 기차를 찾기 시작했다. 마침 딱 맞는 시간대의 열차가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내가 소지하고 있던 인터레일패스를 쓸 경우 추가 요금을 지불해야 하는 독일의 고속철 ICE였다. 만만치 않은 추가 요금까지 물어가며 탈 생각도 없었지만, 환전해 놓은 마르크화(유로화 사용 전이었다)도 없었다. 그러나 시계 초침은 째깍째깍 흐르고, 이것마저 놓치면 어디에선가 1박을 해야 하는 난감한 상황이었다. 플랫폼에 서 있는 열차는 문을 활짝 열어 놓은 채 얼른 올라타라고 손짓하고 있었다. ‘에라, 모르겠다. 일단 타고 보자.’ 후다닥 열차에 올랐다. 궁지에 몰리니 잠시 제정신이 아니었다 보다. 

열차는 곧 출발했고 30여 분 지났을까. 중년의 승무원 아저씨가 등장했다! 애써 긴장감을 감추며 태연하게 패스를 내밀었다. 한참 패스를 들여다보던 아저씨는 당연히 이 패스로는 안 된다고 말했다. “그럴 리가요! 된다고 들었는데…”라며 마른 하늘에 웬 날벼락이냐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언어 장벽 때문이었을까, 내가 너무 당당해서였을까, 아저씨는 멈칫했다. 

그러는 사이 열차는 어느 정거장에 멈춰 서고 있었다. 내심 준비했던 히든카드, 즉 패스가 안 된다고 하면 다음 정거장에서 그냥 내리겠다고 하려던 나의 마지막 꼼수가 사라짐을 의미했다. 열차가 멈춰 있는 동안 창밖에 보이는 아저씨는 플랫폼으로 내려가 승객을 안내하고 정산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열차는 다시 출발했다. 이젠 추가 요금이 아니라 벌금까지 물게 생겼다. 어찌 해야 하나…. 체념하고 벌금은 달러로 내야 하나 고민하며 지갑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는데, 뜻밖에 아저씨는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그리고 잠시 후 열차는 나의 목적지에 멈춰 섰다. 뒤도 안 돌아보고 내리는 것으로 겨우 벨기에에 당도할 수 있었다. 

며칠 후 휴가를 마무리하고 영국으로 돌아온 나는 짐정리를 했다. 다 쓴 패스를 휴지통에 집어 넣기 전 무심코 훑어보다가 문구 하나를 발견했다. 거기엔 독일에서 검표원 아저씨가 들이댔으면 한 마디의 변명도 할 수 없었을 내용이 있었다. 깨알처럼 작은 글씨도 아니고 눈에 확 띄는 크기로 뒷장에 이렇게 씌어 있었다. 
 
‘고속열차인 TGV, ICE 등은 추가 요금 필요’  
1998년,  Munich, Germany  

▶tip
무임승차를 하라는 것이 아니다. 유럽의 열차 시스템은 무임승차의 유혹을 받게 만들지만 반드시 걸리게 되어 있다. 특히, 트램이나 전철의 경우 잘 몰라서 승차시 티켓 펀칭을 하지 않아 걸리는 경우도 많다. 하지만 그간의 여행 경험에서 느낀 것은 언제 어디서나 당당함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잘못한 일이 생기면 당당한 자세로 사과하면 된다. 비단 여행에서만의 일은 아닐 것이다.
 
 
*글을 쓴 유호상은 낯선 곳, 낯선 문화에 던져지는 것을 즐기는 타고난 여행가다. 2년간의 연재를 마치지만 그의 여행은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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