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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원정대] 백성의 힘으로 다시 일어나다, 금산 칠백의총

  • Editor. 트래비
  • 입력 2016.11.30 15: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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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산 칠백의총
 
오후 느지막이 도착한 금산에는 유난히도 볕이 반짝이고 있었다. 넓은 잔디가 펼쳐진 단정한 길을 따라 걸어 다다른 곳은 칠백의총(七百義塚). 임진왜란 당시 나라를 위해 싸운 700여 의병의 유해를 모셔 놓은 곳이다. 순절하신 영혼을 모신 위패가 안치되어 있는 종용사 앞에서 묵념을 하는 것으로 첫인사를 건넸다. 누구보다 강했던, 고마운 분들께. 
 
700여 명의 영혼들이 고이 잠든 의총
 

1592년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장 조헌선생은 금산 일대의 백성들로 구성된 의병을 조직했다. 8월1일 승병장 영규대사와 함께 청주성을 탈환했고, 다가올 18일에 당시 관군을 이끌었던 호남순찰사 권율장군과 금산의 적을 함께 공격하기로 약속했다.
 
그런데 결전의 날은 곧 비극의 날이 되고 말았다. 먼저 왜적의 기세를 확인한 권율장군은 아군이 절대적인 열세라 판단해 작전을 연기하자는 편지를 조헌선생에게 띄웠으나, 조헌선생은 미처 이 소식을 전해 받지 못한 것이다. 결국 8월18일, 조헌선생의 의병부대는 1만5,000명 왜군에 맞서 싸우다 단 한 명의 생존자도 없이 모두 전사했다.
 
그로부터 4일 후, 조헌선생의 제자들은 칠백 의사의 유해를 한곳에 모아 칠백의총을 만들었고 선조 35년에 ‘중봉조선생일군순의비(重峰趙先生一軍殉義碑)’가 세워졌다. 인조 때 사당을 건립했고, 현종 때에 이르러 사당에 종용사라는 이름을 붙이는 등 순절한 의사들의 충절을 대대로 받들었다. 

그러나 칠백의사의 고난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일제강점기에 들어서 일본인들이 의총과 종용사를 훼손하고 순의비를 폭파했기 때문이다. 의사들의 영혼이 다시 돌아올 수 있었던 건 광복 이후에나 가능한 일이었다.
 
1952년, 주민들이 성금을 모아 다시 의총과 종용사를 지은 것. 백성의 힘으로 나라를 지키고자 했던 의로웠던 정신은 결국 우리 역사를 지키고자 하는 백성의 마음으로 다시금 살아날 수 있었다. 파란만장했던 삶의 끝, 죽어서조차 한동안 편히 쉴 수 없었던 영혼들. 그들을 기리는 경건한 마음으로 문을 나섰다. 그리고 작별인사를 건넸다. 이제는 평안히 잠드시길.  
 
칠백의총 정문에서 종용사로 이어지는 의총문
방문객들이 종용사 앞에서 묵념을 하고 있다
선조 때 세워진 중봉조선생일군순의비
 
 
칠백의총 | 임진왜란 당시 금산 연곤평 싸움에서 격전을 벌이다가 전사한 약 700여 의병들의 유해를 거두어 만든 무덤이다. 임진왜란 당시 유물들을 전시해 놓은 전시관도 함께 있다.
 
 
주소: 충산 금산군 금성면 의총길 50  
전화: 041 753 8701~3 
홈페이지: 700.cha.go.kr
 
글 이현숙  사진 엄권열
글·사진 트래비아카데미 충남 원정대  에디터 트래비 
저작권자 © 트래비 매거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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