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네시아, 무한대의 이야기가 있는
인도네시아, 무한대의 이야기가 있는
  • 트래비
  • 승인 2016.12.08 0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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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수분 인도네시아
Unlimited Stories about Indonesia
 
화수분(貨水盆)은 ‘재물이 자꾸 생겨 아무리 써도 줄지 않는다’는 뜻이다. 
인도네시아를 표현하면 딱 이 단어다. 온 생을 다 바쳐도 다 알 수 없을 것만 같은, 거의 무한대의 이야기가 있는 인도네시아를 몇 가지 키워드로 들여다보았다. 물론 이건 겨우 목차에 불과하다.
 
발리 우붓 거리에서 마주친 그림
발리 짐바란 해변에서 낚시하는 사람들 
족자카르타 술탄왕궁
족자카르타 보로부두르 사원(Borobudur Temple)

이 나라와 어떤 인연인지 모르지만 두 달 사이 인도네시아에 무려 세 번이나 다녀올 기회가 생겼다. 첫 출장 전날. 딸이 퀴즈를 낸단다. “엄마, 인도는 지금 몇 시인 줄 알아?” “글쎄, 핸드폰으로 세계시간 보면 알지?” “에이, 그것도 몰라? 네 시잖아!” 인도‘네시’아! 왠지 아재개그 같지만 순발력이 기특해서 빵 터지게 웃었다. 동물을 좋아하는 아들은 책장에서 책을 뒤적거리더니, 갑자기 눈을 동그랗게 뜨고 “엄마! 출장가면 안 돼!” 한다. 왜냐고 물었더니 “코모도라는 괴물이 있는데 독침을 발라서 잡아먹는데! 절대 가면 안 돼!” 7살밖에 안 된 아들이 하는 말이 어찌나 든든하고 귀여운지 또 한 번 웃었던 기억이 난다. 

인도네시아라는 나라의 존재는 알고 있었지만, 내 상식도 애들의 수준과 별 다르지 않았다. 반둥회의, 자바원인, 보르네오 가구, 동티모르 정도로 세계사 교과서나 광고에 등장했던 단어의 파편이 다였다.

인도네시아의 인구는 2억4,500만명으로 세계 4위다. 섬의 개수는 약 1만7,000개로 세계에서 가장 섬이 많은 나라다. 이 중에서 6,000개의 섬에서만 사람이 산다. 그중 자바섬에 60%의 인구가 모여 있어 단일 섬으로는 인구밀도가 전 세계에서 가장 높다. 인구의 40%가 넘는 약 1억명이 인터넷을 쓰고 있다. 우리나라 인구보다 훨씬 많은 수다. 이런 거대하고 영향력 있는 나라에 대해 어떻게 그렇게까지 아는 게 없었을까.

행정구역은 34개지만, 편의상 큰 섬을 위주로 7개 지역으로 구분한다. 2004년 겨울 쓰나미의 진원지가 있었던 ‘수마트라(Sumatra)섬’, 자카르타와 족자카르타가 있는 ‘자바(Java)섬’, 발리섬·롬복섬을 포함하고 있는 ‘누사텡가라(Nusa Tengara) 지역’, 말레이시아와 접해 있는 ‘칼리만탄(Kalimantan)섬’, 다이빙으로 유명한 마나도가 있는 ‘술라웨시(Sulawesi)섬’, 수많은 작은 섬들로 이루어진 ‘말루쿠(Maluku) 지역’ 그리고 파푸아 뉴기니의 서쪽 지역인 ‘파푸아(Papua)섬’이 있다. 워낙 개성이 뚜렷한, 많은 섬들로 이루어진 나라라, 고작 세 번가지고 인도네시아를 다녀왔다는 말을 하는 게 맞는 건지조차 모르겠다. 

그동안 발리를 인도네시아의 상징처럼 여기거나, 인도와 인도네시아를 헛갈린 사람도 많을 것이다. 참고로, 인도네시아는 유라시안, 혼혈인을 가리키는 ‘인도Indo’와 ‘섬들’ 이라는 뜻의 ‘네시아(Nesia)’의 합성어다. 구별을 위해 인도는 인디아. 인도네시아는 인도네시아의 한자어 줄임말 인니(印尼)로 표기하기도 한다. 현지인들은 중세 때부터 ‘많은 섬들의 나라’라는 뜻에서 누산타라(Nusantara)라고 불렀다고 한다. 

이번 여행에선 인도네시아의 수도이자 세계에서 인구밀도가 가장 높은 섬, 성장률 7%대를 넘보는 놀라운 경제발전의 진원지이자 인도네시아의 현재와 미래를 볼 수 있었던 ‘자카르타’, 우리나라로 치면 경주에 비유되는 조금은 느리고 한적한 역사·교육·문화의 도시 ‘족자카르타’ 그리고 드라마 <발리에서 생긴 일>과 두 차례의 폭탄테러로 강하게 뇌리에 각인된 ‘발리’를 다녀왔다. 여유 있는 일정이 아니었던 탓에 모든 지역의 ‘속살’까지 볼 수는 없었던지라, 겉핥기 소개보다는 인도네시아의 개성을 분명히 드러내는 몇 가지 키워드로 이야기를 풀어 볼까 한다. 
 
 
다민족의 화합을 상징하는 그림. 인도네시아관광청 입구에 걸려 있다
독립광장 중앙에 우뚝 솟은 모나스 탑
 

●Key word 1 
모나스 Monas
독립과 화합의 상징
 
인도네시아에는 총 700개의 언어를 사용하는 약 300개의 부족이 살고 있다고 한다. 종교는 무려 6개. 전체 인구의 약 88%, 절대 다수가 무슬림이면서도 ‘이슬람 국가’를 표방하지 않는 독특한 나라다. 종교의 자유가 철저히 보장되지만, 그렇다고 종교가 없는 것은 안 된다. 단일민족끼리도 늘 치고 박는 모습을 보고 자란 나로서는 이 나라가 어떤 원리로 굴러가는지 도무지 상상이 되질 않았다.

감미르, 혹은 모나스 공원(Taman Monas)이라 불리는 독립광장을 지나게 되었다. 광장 중앙에는 모나스라는 이름의 흰색 탑이 우뚝 서 있다. 1945년 8월 독립을 기념해 수카르노 정권 때 건설된 탑이다. 전체 높이가 137m. 시가로 한화 16억원에 달하는 무게 35kg의 금으로 도금된 불꽃이 꼭대기에 붙어 있어 흐린 날에 눈에 더 잘 띈다. 기념탑 꼭대기에 마련된 전망대에서는 자카르타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다. 

이 탑 뒤에는 이슬람교 동남아시아에서 가장 큰 이슬람 사원인 이스띠끌랄 사원과 고딕양식의 가톨릭성당이 마주 보고 있다. 이스띠끌랄 사원(Masjid Istiqlal)은 테라스까지 활용하면 10만명의 신자를 수용할 수 있는 거대한 사원이다. 대척점에 있는 두 종교의 상징물이 사이좋게 마주보고 있다니 묘하다. 게다가 이 사원을 설계한 건축가는 기독교인이란다. 사원과 성당이 주차장도 공동으로 사용한다고. 인도네시아를 단순한 여행지로 볼 게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카메라를 보자 해맑게 웃는 질밥을 쓴 인도네시아 학생들
와양 박물관에 전시된 인형들
 
●Key word 2 
와양 Wayang
웃지 않는 인형
 
자카르타에 도착한 첫날 일정은 네덜란드 통치시대의 구도심 꼬따(Kota)에서 5분 거리의 파타힐라 광장에 위치한 와양박물관(Museum Wayang)에서 시작했다. 박물관 건물은 네덜란드 통치를 받던 시기에는 교회였다. 이 박물관에는 인도네시아 각 지역의 와양 인형과 가믈란(gamelan) 악기, 아시아 각국의 전통 인형 4,000여 점이 전시되어 있다. 희한하게도 전시된 인형들의 표정이 하나같이 무섭고 기이하고 엽기적이기까지 하다. 아이들이 가지고 노는 인형들마저 아리송한 표정을 짓고 있다. 

반면, 인도네시아 사람들은 정말 잘 웃는다. 늘 조곤조곤하게 말하며 작지만 환한, 부처를 닮은 미소를 띤다. 얼굴만 동그랗게 내놓고 머리에서 가슴까지 덮는 질밥(Jilbab)을 쓴 여자들은 앙증맞은 러시아 인형 마트료시카(Matryoshka)를 보는 듯하다. 하지만 그건 사람들의 표정일 뿐. 이 박물관에서 웃는 표정의 인형을 단 한 개라도 찾으면 음료수를 사기로 같이 간 친구와 내기를 했을 정도였다. 현지 사람들에게 이유를 물어봤지만, 다들 왜 물어보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매월 둘, 셋, 넷째 일요일 10시부터 2시 사이 와양박물관을 방문하면 가믈란 오케스트라 반주에 맞춰 와양 쿨릿(Wayang Kulit)이라 불리는 그림자 인형극을 볼 수 있다. 와양은 ‘그림자’, 쿨릿은 ‘가죽’이란 뜻으로, 인형을 이용한 전통적인 그림자 극, 혹은 그것에 사용되는 꼭두각시 인형을 말한다. 와양 쿨릿은 본래 관객 대상 공연이 아니라 선조의 영혼을 인형의 그림자에 머물게 하여 공양을 드리고 현세의 귀신을 몰아내는 의식이다. 지금은 보통 30분에서 2시간 정도로 짧게 공연되고 있지만, 정통 와양 쿨릿은 대체로 밤을 새면서 8시간에서 2일 정도 계속 이어진다. 하루를 넘기는 공연이라니. 공연을 하는 사람도, 보는 사람도 보통 인내심이 필요한 게 아니다. ‘인도네시아 시간은 고양이 걸음처럼 슬며시 흐른다’는 말이 있다. 한국의 코리안 타임처럼 인도네시아에는 잠 까렛(고무줄 시간)이 있다. 이곳 사람들은 참고 기다리는 것에 익숙한가 보다.

‘다양성 속의 통일(Bhinneka Tunggal Ika)’이라는 문구가 적힌 독수리 조각상은 인도네시아의 공식 상징물이다. 관용과 결코 서두르지 않는 여유, 매사에 긍정적인 자세와 느긋함 속에 내포된, 세상이 급변하는 와중에도 인도네시아만의 전통성을 고수하며 ‘느림의 미학’을 실천하자는 국가철학이다.

인도네시아의 정서를 아우르는 단어는 ‘루꾼(Rukun)’이다. ‘화합’을 뜻하는 말로, 정확히는 내면의 감정과 관계없이 갈등을 외부로 표현하지 않는 상태를 말한다. 루꾼을 실천하려면 온화하고 품위 있게 행동해야 하니 감정을 내세우지 않고 늘 절제하는 것을 미덕으로 여긴다.
 
실제로 인도네시아 사람들은 큰 소리로 이야기하거나 단도직입적인 표현을 자제한다. “뭉낀(아마)” “끼라끼라(대략)” “무다무다한(모쪼록)”이라는 표현을 잘 쓰는데, 우리말로 하면 “아마도, ~인 것 같아요”와 비슷한 뉘앙스다. “아니다”라는 단정적 표현보다 “부족하다(꾸랑)”라는 말을 잘 사용한다. “맛이 없다(띠닥 에낙)”고 하지 않고 “덜 맛있다(꾸락 에낙)”고 말한다. 전체 부정이 아닌 부분 부정을 하고, 부정 속에도 긍정을 담아 둔다. 이처럼 내면과 외면의 불일치를 자연스러운 것으로 인정하기 때문에 스스로를 ‘또뼁(Topeng)’, 즉 ‘가면을 썼다’고 묘사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너무나 다른 기질을 가진 여러 민족이 화합과 통일을 이루며 살 수 있는 비결은 이 ‘가면’ 때문인 걸까? 기왕이면 좀 웃는 낯이 좋았을 텐데, 무표정과 영혼 없는 표정의 중간쯤 되는 괴이한 표정들의 인형들을 떠올릴 때마다 꿈에 나올까 무섭다. 어쩌면 웃지도 화내지도 못하는 복잡한 내면의 심리를 가리기 위해 차라리 이런 애매한 표정을 선택했는지도 모르겠다. 
 
 
하이네켄과 맛도 병 모양도 비슷한 ‘별 맥주’ 비르빈땅

●Key word 3 
비르 빈땅 Bir Bintang
별처럼 빛나는 맥주
 
자카르타에서 족자카르타까지는 비행기로 약 50분, 급행열차로 7~8시간 정도 걸린다. 한국의 명동 같은 번화가, 말리오보로(Malioboro) 거리에 숙소를 잡았다. 투구(Tugu) 기념탑에서 술탄왕궁까지 연결된 2km 남짓한 거리로 은행·호텔·쇼핑몰 등이 몰려 있다. 밤 9시에 호텔을 나섰다. 상점들이 10시 정도면 문을 닫기 때문에 서둘러야 했다. 흥정을 하고 덤을 얹어 주고, 복작복작한 분위기가 마치 남대문시장 같아 익숙하고 정겹다. 

인도네시아에는 유난히 길거리 음식이 많다. 손수레, 포장마차에서 만드는 즉석식품이 대부분이다. 오바마 대통령이 좋아한다는 박소(Bakso)와 사테(Satay), 인도네시아의 대표음식인 나시고랭(Nasi Goreng) 파는 곳을 가장 많이 볼 수 있다. 박소는 고기완자를 넣은 국수인데, 국물이 정말 끝내준다.
 
잘 우린 쇠고기 양지 국물에 국수를 말아 먹는 듯 입에 딱 맞았다. 사테는 일종의 꼬치구이인데, 소스를 여러 번 바르고 즉석에서 센 불에 구워 내기 때문에 불맛과 소스맛이 잘 어우러져 입에 착 붙는다. 좀 짜긴 하지만 맥주와 곁들이면 최고의 안주가 될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맥주를 좀 살까 하고 돌아다녀 봤는데 편의점에는 무알코올 맥주뿐, 술을 파는 곳을 찾아보기가 힘들었다. 무슬림에게 술은 금기 식품이라 우리나라처럼 아무데서나 살 수 있는 게 아니고 특정 상점이나 대형마트에 가야 한다.
 
2015년 4월16일 인도네시아 정부는 알코올 함량이 5% 미만인 술도 편의점처럼 작은 소매점에서는 판매할 수 없도록 하는 법률을 제정했다. 그때부터 인도네시아 내 약 7만 개의 소매점에서는 더 이상 맥주를 비롯한 알코올  음료를 판매할 수 없게 됐다. 다만 레스토랑, 호텔, 발리 같은 유명 휴양지, 대형 마트는 알코올 금지 대상 지역에서 제외된다.

하지만, 반전이 있다. 무슬림이 인구의 90%에 육박하는 인도네시아에서 너무나 훌륭한 맥주, ‘비르 빈땅(Bir Bintang)’이 생산된다. 빈땅은 인도네시아어로 ‘별’이라는 뜻이니, 별 맥주다. 알코올 도수는 4.8%로 부드럽고 구수하다.
 
빈땅 맥주의 전신은 하이네켄. 1929년 네덜란드 회사가 수라바야에 양조장을 세우고 ‘자바맥주’를 선보였는데 하이네켄이 1936년에 이 회사의 대주주가 되었다. 독립 후 수카르노 정부가 하이네켄이라는 이름을 사용하지 못하게 함에 따라 회사와 브랜드 이름이 비르 빈땅으로 바뀌었다. 짭짤한 사테에 구수한 비르 빈땅 한 캔이면 세상 부러울 것이 없다.
 
바틱을 생산하는 모습을 보고 직접 만들어도 볼 수 있는 족자카르타의 꼬따 게드(Kota Gede). 유리상자에 전시되어 있는 다양한 바틱 패턴 틀  
뜨거운 왁스를 쥐고 사람이 직접 손으로 나염하는 전통방식  
 

●Key word 4 
바틱 Batik
족자카르타의 자존심
 
수천 개의 문양과 다양한 색을 지닌 인도네시아 전통섬유, 바틱Batik. 이 섬유를 이용해 만든 셔츠, 원피스 등의 의상을 모두 바틱이라고 부른다. ‘암바틱(Ambatik)’이라는 단어에서 그 이름이 유래했다는 설이 있는데, 암바틱은 ‘작은 점을 가진 천’이라는 뜻. 접미사 ‘틱tik’이 ‘점’, ‘그리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바틱은 천연 밀랍을 방염제로 사용하는 왁스(Wax)의 저항력을 이용한 납염 방식이다. 쉬워 보이지만, 작은 파이프에 뜨거운 왁스를 담아 무늬를 일정하고 빠르고 정확하게 그려내야 한다. 선을 두껍고 일정하게 그리는 것이 관건이자 가장 어려운 부분이다. 

이러한 납염 방식은 인도네시아에만 있는 게 아니다. 특히 지리적으로 가까워 문화·종교 등이 유사한 말레이시아와 ‘바틱 원조국’ 자리를 두고 수십년간 논쟁해 왔다. 오랜 논쟁 끝에 유네스코는 인도네시아의 손을 들어 주었고, 바틱은 2009년 유네스코 인류 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인도네시아에서는 매주 금요일을 ‘바틱 데이’로 지정하여 말단 사원부터 사장까지 바틱을 입고 출근한다. 납염 방식 자체에 전통의 의미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옷의 디자인은 크게 관계가 없다. 바틱 셔츠나 원피스 하나만 입으면 정장 같은 역할을 하기 때문에 부담 없이 예의를 차릴 수 있어 일석이조다. 

타나아방(Tanah Abang) 재래시장 근처, 타민시티(Thamrin City) 쇼핑센터의 바틱 전문 매장을 찾아갔다. 동대문 원단시장 같은 분위기로 각 지역의 다양한 전통의상을 한곳에 몰아 둔 곳이다. 예쁜 바틱 문양들이 너무나 많아 심각한 선택장애를 앓다가 결국 세 벌을 샀다. 가격은 1~3만원대로 저렴했지만, 패턴이 고급스럽고 재질도 나쁘지 않았다. 이번에는 한국에서 입어도 무난한 바틱을 샀지만, 앞으로 인도네시아 모든 지역의 전통의상을 다 사 볼 생각이다. 패턴을 좋아하는 사람에게 바틱은 치명적인 중독성이 있다. 
 
커피가 재배, 가공되는 과정을 직접 체험할 수 있는 발리 풀리나(Bali Pulina) 농장 
거대한 정원 속에 자리 잡은 발리 풀리나에서 여유를 즐기는 사람들
묵직하고 긴 나무 쟁반에 담긴 커피 샘플러
균형 잡기 힘들 텐데 해맑은 표정을 지으며 한 손으로도 능숙하게 배달하는 모습이 ‘생활의 달인’ 수준이다 
 
 
●Key word 5 
꼬피 Kopi
실패가 없는 인도네시아 커피
 
인도네시아의 커피는 근사하다. 취향을 일반화할 수는 없지만, 인도네시아에서 커피 맛으로 실망한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특히 농도가 보장되어 있다. 한국에서는 호텔에서마저도 커피가 살짝 반신욕하고 나간 듯한 싱거운 커피를 내놓는 경우가 많고, 같은 아메리카노여도 가게마다 변주가 심한 편인데, 인도네시아의 커피는 전반적으로 묵직하고 진해 마음에 들었다.

마시고 나면 잔 밑에 가라앉은 커피 앙금이 2~3mm 정도 남는다. 이런 인도네시아 스타일 커피를 ‘꼬피 뚜브룩(Kopi Tubruk)’이라 부른다. 

분위기 좋은 커피숍이 백화점이나 상가마다 한두 개는 꼭 있었다. 가장 마음에 들었던 것은 메뉴. 생소한 이름이지만 인도네시아 각 지방의 개성 강한 대표 커피가 메뉴를 빼곡히 채우고 있었다. 이름이 익숙하지만 마셔 본 적은 없어 자바 커피를 한잔 시켰다. 컴퓨터 프로그래밍 언어이기도 한 ‘자바’ 커피는 묵직하면서도 톡 쏘는 산미가 느껴진다. 개발자가 즐겨 마시던 커피 이름이기도 하고, 자바 커피처럼 쉽게 만들 수 있는 직관적인 프로그래밍 언어라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란다.

발리 우붓의 발리 풀리나(Bali Pulina) 플랜테이션에서는 커피 샘플링 테스트가 가능했다. 주문 전에 일반 컵의 3분의 1 크기 컵 8개에 각각 다른 커피를 담아 내온다. 이걸 마셔 본 후 주문하고 싶은 커피를 시키면 된다. 발리공항에서 1시간 20분 정도 차를 타고 들어가야 해 거리가 좀 있지만, 우붓(Ubud)에 갈 계획이 있다면 쇼핑 후 다리도 쉴 겸 꼭 커피 한잔 하러 들러 볼 것을 추천한다. 한화 5,000원 정도면 녹음이 우거진 숲 속에서 맛있는 커피를 즐길 수 있다. 따뜻한 커피를 꼭 쥐고 몇 마디 대화도 없이 먼 산을 바라보며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이 군데군데 흩어져 있다. 한결같이 표정은 온화하고 행복해 보인다.

족자카르타에서도 커피농장을 들렀는데, 루왁 커피 전문점이었다. 최근까지 동물학대 논쟁으로 불매운동이 일어났던 루왁 커피의 진원지가 바로 인도네시아의 수마트라다. 어스름이 질 때 도착했는데, 검은 사향 고양이 네 마리가 짙은 검은 색 눈을 끔뻑이며 철창에 갇혀 있었다. 두 놈은 표정이 우울해 보였고, 두 놈은 산만하게 왔다갔다 했다. 시설이 비위생적이지는 않았지만, 야생동물이 먹고 똥을 싸기 위해 갇혀 있다는 것만으로도 보기 좋지는 않았다.

인도네시아에서도 루왁은 ‘꼬피 루왁(Kopi Luwak)’이라는 이름으로 일반 커피의 2배, 많게는 10배까지 비싸게 팔린다. 루왁 커피의 원료는 사향 고양이의 배설물로, 이 고양이는 잘 익은 커피 열매를 먹은 뒤 소화하지 않고 배설하는데 속껍질이 남아 있는 상태로 배설한 콩을 모아 씻은 다음 맛을 해치지 않게 아주 살짝 볶아 준다. 맛은? 고소한 나무열매와 초콜릿 향이 살짝 나는 것 같다. 나는 대단한 미각을 가진 사람이 아닌지라 그렇다고 하니 정말 그런 것도 같다.

이런 루왁 커피가 전 세계적으로 알려지게 된 것은 영화<버킷 리스트(2007)>에서 주인공 잭 니콜슨이 죽기 전에 마시고 싶은 음료로 루왁 커피를 꼽은 것이 계기가 되었다. 족자카르타의 마타람(Tataram) 커피농장의 직원은 시음용 루왁 커피와 간단한 다과를 내놓은 후 이 영화 속에서 잭 니콜슨의 광기 어린 풍부한 표정과 오버액션으로 루왁 커피를 애정하는 장면을 틀어 주었다. 중국인들에게보다 더 싼 값에 판다는 말에 무려 8박스나 사게 되었다. 50g에 USD14로 한국에서 사는 가격보다는 훨씬 저렴하지만, 그렇게 많이 살 필요는 없었는데. 주변 사람들에게 선물로 줘야겠다고 위안을 삼았다. 국내에서 루왁 커피 가격은 100g에 10만~40만원을 호가한다. 4배에서 20배까지 차이가 나니 안 살 수는 없겠다.

선물할 커피를 좀 더 사야겠단 생각으로 마트에 들렀는데, 커피 외에도 일부 동남아시아 국가에만 있을 것 같은 낯선 차들이 눈에 띄었다. 그중 ‘고양이 수염차(The Kumis Kucing)’에 시선을 붙잡혔다. 당뇨·고혈압·신장결석·방광염에 효과가 있고 피지 제거에도 좋다고 한다. 하지만, 고양이 수염이라니. 수염을 달여 먹는 건가? 사향 고양이에 이어 또 고양이, 흠, 일단 패스.

떼 보똘(Teh botol)은 달짝지근한 갈색 차로, 슈퍼에서 물 보다 더 자주 볼 수 있는 음료다. 1970년 소스로(Sosro)사가 병에 담은 차를 최초로 상품화 했다. 나스기뗄(Nasgitel)은 자바 섬의 차 문화를 상징하는 표현으로 뜨겁고, 달고, 진한 차와 커피를 즐겨 마신다는 의미다. 워낙 한국에서는 보지 못한 물건들이 많고 값도 싸 둘러보는 것만으로도 즐거웠다. 물론 이걸 다 한국까지 짊어지고 한다는 사실을 깜빡하고 마구 쓸어 담은 것을 숙소로 돌아와서야 후회했지만 말이다. 
 
글 Travie writer 박재아  사진 트래비CB, 박재아  에디터 고서령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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