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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서령의 우주여행] 그야말로 옛날식 다방에 앉아

  • Editor. 트래비
  • 입력 2016.12.29 1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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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어릴 적, 엄마는 사랑채를 덧지었다. 방과 조그만 마루가 딸린 부엌도 내고 화장실도 만들었다. 그러고는 세를 놓았다. 키가 큰 아줌마가 꼬마 윤이를 데리고 사랑채를 보러 왔다. 윤이가 우리 집 막내보다 한 살이 어렸으니 아마 초등학교 3학년쯤 되었을 게다. 딸만 셋이던 우리 집에서 윤이는 막내가 되었다. 붙임성 좋은 꼬마는 우리 아빠, 엄마를 금세 큰아빠, 큰엄마라 부르며 우리와 함께 밥을 먹고 소꿉놀이를 하고 TV를 보다 잠이 들었다. 밤늦게 퇴근하는 아줌마가 잠든 윤이를 깨워 사랑채로 돌아가곤 했다. 소문은 금방 퍼졌다. 아줌마가 시내의 어느 다방 마담이라는 소문 말이다. 
 
아줌마는 우리 집 딸들 셋과 윤이까지 다방엘 데려갔다. 내 고향 P시에서 유일했던 백화점 맞은편 큰 건물의 1층이었다. 입구가 좁은 듯했는데 막상 들어가보니 꽤나 넓었다. 다방이라면 좁고 가파른 계단을 올라야 하고 으레 어둡고 좁은 공간 속, 빨간 루주와 푸른 아이섀도를 바른 ‘레지’ 언니들이 있을 줄 알았는데 태백다방은 그런 곳이 아니었다. 물론 트로트 음악이 흐르고 나이 지긋한 어르신들이 쌍화차를 마시고 예쁜 언니들이 그 옆에 앉아 있긴 했지만, 마담인 윤이네 아줌마는 언제나 종아리까지 내려오는 정장 수트에다 화장기 하나 없는 얼굴이었다. 파마도 하지 않은 단정하기 그지없는 단발머리는 목덜미에서 찰랑거렸다. 레지 언니들도 아줌마의 등쌀에 빨간 루주 따위는 꿈도 못 꾸었고 미니스커트도 금지였다. 나중에야 알았지만 태백다방은 P시에서 가장 점잖고 가장 장사가 잘 되는 다방이었다. 
 
다방에 있는 동안 집에 혼자 있을 윤이 때문에 우리 집 사랑채로 이사를 왔던 아줌마는 퇴근 때마다 시내 빵집에서 단팥빵이며 소보로, 생크림빵을 한 자루씩 사 왔고 철마다 우리 집 딸 셋의 옷을 백화점에서 사 주었다. 내가 대학에 입학하던 때에도 정장과 핸드백을 선물해 주었다. 비싼 선물 앞에서 내가 어쩔 줄 모르자 “우리 윤이, 니네 엄마가 다 키워 줬어. 내가 이렇게 해도 되는 거야.” 그렇게 말할 뿐이었다. 다시 기억을 더듬어 보아도 아줌마는 단호하고 엄했으며 계산이 깔끔한 여자였다. 윤이는 고등학교에 입학해서야 우리 집 사랑채를 떠나 새 아파트로 이사를 했다. 
 
나는 이후로 다방을 참 좋아하는 여자가 되었다. 푸른 아이섀도를 바른 마담 아줌마가 앉아 있어도 좋았고 새침하고 꼿꼿한 레지 언니가 이유도 없이 내게 콧방귀를 뀌어도 좋았다. 그래서 나는 어딜 가건 그 도시의 다방은 꼭 한 번 들렀다. 안동에 여행을 갔을 때에는 백조다방에 들렀고 춘천에 갔을 때에는 남춘천다방엘 들렀다. 남춘천다방의 풍경은 하도 정겨워 내 소설 <역전다방>의 배경이 되기도 했다. 경주의 숙다방에서는 마담 아줌마가 보글보글 김 오르는 커피주전자에 미원을 한 꼬집 넣는 걸 목격하기도 했다. 내가 화들짝 놀라자 “미원 쪼금 넣으면 커피 맛있어.” 그러면서 샐쭉 웃었다. 완도의 항구에서 들렀던 다방 이름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연한 물커피를 달랬는데 정신이 번쩍 나도록 진한 커피를 갖다 주어서 나는 조금 토라졌다. 그래도 활짝 열어 둔 창밖에서 비린내가 물컹물컹 올라와서 바닷가 출신인 나는 그저 좋았다.
 
박음질이 터진 인조가죽 딱딱한 소파에 앉아 물커피를 호로록 마시며 철 지난 노래를 듣는 일은 꽤 재미나다. 마담에게 호기롭게 아는 척을 하며 들어오던 중년의 남자는 낯선 내 얼굴을 흘깃 쳐다보고 어느 할머니는 벽시계와 버스티켓을 연신 들여다보며 시간을 확인한다. 벽에 달린 TV에서는 언제나 <전국노래자랑>이었다. 찬 계절이 좀 잠잠해지고 나면 강릉이나 여수쯤으로 나들이를 가고 싶다. 그곳에도 미리내다방이나 은하다방, 어쩌면 약속다방이 있을 것이다.  

*글을 쓴 소설가 김서령은 여행이 추억을 저장하기 위한 가장 좋은 수단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추억은 누군가에게 속살거려 주기 딱 좋은 고백의 방법이기도 하다. 정말 그렇게 생각한다. 그래서, 사랑에 빠지기 위해서라도 여행은 끊임없이 계속되어야 한다고 믿는, 꽤나 대책 없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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