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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서령의 우주여행] 노란 몰타의 추억

  • Editor. 트래비
  • 입력 2017.02.28 1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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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제법 어깨에 힘을 주고 호탕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대표가 안경 너머 눈을 끔벅이며 나를 오래 쳐다보다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지금 휴가를 내겠다고 나한테 말을 한 것 같기는 한데… 7개월이라고… 내가 잘못 들은 거겠지?” “맞게 들으셨는데요.” 헛, 대표가 웃었다. 나는 더 뻔뻔해지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지난 3년간 내가 얼마나 회사를 위해 열심히 일했는지, 월차도 생리휴가도 쓰지 않고 얼마나 기를 쓰고 달려왔는지 고시랑고시랑 설명을 늘어놓았으며 7개월의 휴가를 다녀온 이후 다시는 이런 짓을 벌이지 않겠노라 맹세도 했다. 그 말을 할 때에는 살짝 비굴한 웃음도 지어 보였다. “그냥 월차 쓰고 생리휴가 꼬박꼬박 써.” 대표는 짧게 대답했다.
 
분명 내가 질 것 같은 게임이었으나 나는 끝내 이기고야 말았다. 한 달 동안 열댓 번쯤 사표를 움켜쥐고 대표의 방을 들락거린 결과였다. 나는 27인치 핫핑크색 트렁크에 옷과 책과 노트북을 꾸역꾸역 채워 넣고 영국으로 떠났다. 유럽 도시 중 런던으로 가는 비행기 표가 가장 쌌기 때문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나는 무모한 여자라 런던에서 한 달을 낭창낭창 지낸 후에야 다음 여행지를 결정했다. 작은 섬, 몰타공화국이었다.
 
세인트줄리앙스의 콘도미니엄 호텔에 짐을 풀었다. 한 달은 짧을 것 같고 두 달이 적당할 듯했으나 마침 호텔은 숙박비 할인 중이어서 두 달치나 석 달치나 얼마 차이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석 달치 방값을 결제했다. 방은 너무 크고 너무 추웠다. 2월이었다. 수도꼭지에서는 물보다 석회가루가 더 많이 떨어져 내렸다.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바다가 훤히 내다보이는 테라스가 또 기가 막히게 예뻐서 눌러앉고 말았다.
 
몰타가 여태 기억에 생생한 건 노란 빛깔 때문이다. 16세기 즈음 옛 건물들이 그대로 남은 도시에 혹 새 건물이 지어진다 해도 주변과 다른 생뚱맞은 빛깔을 칠할 수는 없다. 그들은 그렇게 산다. 그래서 온통 도시가 노랬다. 어느 것이 옛 건물이고 어느 것이 새 건물인지 알아보기도 어려울 지경이었으니까 말이다. 

그리고 사람들. 노란 건물 속 사람들은 뭘 그렇게까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쳐다보았을까. 동양인이 없기는 했다. 그들은 식당에 앉아 밥을 먹다가도, 좌판을 벌이고 사과를 팔다가도 지나가는 나를 쳐다보았다. 눈이 마주치면 부끄러운 듯 웃었다. 아주 부끄러운 듯. 꼬마들은 말똥말똥 나를 쳐다보다 우르르 따라왔고 내가 뒤돌아보면 골목으로 재빠르게 숨었다. 기가 막혔지만 나도 우스워서 몇 번이나 걸음을 멈추었다. 사탕가게 나이 든 여주인은 자신의 집에 방이 하나 비었다고 했다. 아주 싼 값에 빌려주고 싶단다. 근처 호텔에 묵고 있다 했더니 그럼 공짜로 묵게 해주겠단다. 사양하는 나를 끌고 기어이 집으로 데려갔다. 좁은 계단을 5층까지 타고 오르니 낡은 의자와 TV가 놓인 작은 방이 있었다. 석 달치 방값을 덜컥 결제하지 않았다면 정말 그 방에 트렁크를 끌고 갔을지도 몰랐다. 희한하게 다정한 사람들이었다. 
 
테라스 쪽으로 작은 책상을 옮겨 둔 뒤 소설을 쓸 생각이었지만 모든 건 뜻대로 되지 않아서 나는 매일 테라스에 나가 앉아 맥주를 마셨고 깡통에 든 올리브를 씹었다. 혼자여서 좋았고 혼자여서 쓸쓸했다. 가지고 갔던 책은 동이 났고 호텔 앞 손수레에서 파는 토마토도 질려 버렸다. 그해 2월, 몰타의 날씨는 놀랍게도 따스해서 추운 방을 나서자마자 나는 목도리를 풀렀고 얼마 걷지 않아 코트를 벗었다. 코트 속에는 반팔 티셔츠를 챙겨 입었다. 방파제에 앉아 커피를 마셔도 춥지 않았다. 대신 몰타의 커피는 어딜 가든 지독하게 맛이 없었다. 
 
소설이 안 풀리는 것 말고는 다 괜찮아, 생각했지만 소설이 하도 안 풀려 나는 결국 일찍 몰타를 떠났다. 역시나 무모한 여자여서 아무 데로나 다음 여행지를 결정했다. 로마였다. 몰타의 노란 벽과 돌길, 그리고 걸핏하면 눈을 반짝이며 웃어 주었던 사람들이 종종 떠올라 로마는 좀 시시했다. 애인이 생긴다면 꼭 몰타의 부두 방파제에 앉아 나른한 입맞춤 같은 걸 한 번 해보고 싶었는데, 이후 몇년간 애인이 생기지 않아 나는 몰타를 까먹어 버렸다. 이제 슬금슬금 몰타가 그리워지지만 글쎄, 다시 갈 수 있으려나.  

소설가 김서령
몰타 시내버스에는 천장 모서리를 따라 긴 줄이 달려 있다. 내릴 때 그 줄을 잡아당기면 버스 기사 가까이에 있는 동그란 종이 땡땡 울리는 거다. 나는 그 종이 하도 귀여워 가까운 거리도 버스를 탔다. 그런 장면을 좋아한다. 촌스럽고 불편하지만 매캐하게 번지는 다정한 냄새 같은 장면. 그래서 내 소설도 영 촌스럽다. 또 그 촌스러운 내 주인공들을 좋아하고. 그런 작가다.    www.facebook.com/titatita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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