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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지형의 여행유전자] 여행고수의 보물창고

  • Editor. 트래비
  • 입력 2017.03.28 14:2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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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이야 다들 여행을 좋아한다고 말하지만, 40여 년 전엔 여행이 취미라고 말하는 이가 많지 않았다. 새마을운동을 외치며 열심히 일해야 했고, 미래에 펼쳐질 것이라는 ‘마이카 시대’는 ‘우주여행’처럼 먼 이야기 같았으니까. 

그런 시대에도 아빠는 ‘난 여행이 좋아’라고 노래하던 분이셨다. 좋아하면 잘하게 된다던가. 전국 방방곡곡 모르는 곳이 없었다. 척 하면 착. 어느 지역에 무엇이 명물이고 꼭 맛봐야 할 것은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다. 아빠가 이 시대를 살고 계셨다면 여행 분야 파워블로거로 이곳저곳에서 러브콜을 받지 않았을까. 

여행 백과사전 같은 아빠의 지식과 정보는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 학기 중에는 학생들을 가르치느라 바쁘고, 방학 때는 엄마가 운영하는 약국 일손을 거드시느라 여유가 많지 않았을 텐데 말이다. 게다가 그때는 인터넷이 없어 여행정보를 얻기도 쉽지 않았을 것 같은데. 

나의 물음표는 차곡차곡 쌓여 있는 아빠의 스크랩북을 보고 봄볕에 눈 녹듯 스르르 사라졌다. 전국 각 지역별로 분류되어 예쁘게 모아져 있는 여행정보들. <세상에 이런 일이> 프로그램에 출연하는 스크랩 마니아만큼은 아니지만, 감탄사가 자동으로 흘러나올 정도로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스크랩된 여행정보는 대부분 D일보와 M신문, G일보 등 세 일간지가 소스였다.

아빠는 레저 면에서 소개하는 여행 기사를 꼼꼼하게 읽고, 그 위에 메모를 덧붙였다. 언제 가면 좋을지도 적어 두셨다. 아빠의 스크랩북에서는 해외 여행지보다는 국내 여행지가 더 높은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직접 가 볼 곳에 대한 정보가 더 소중했기 때문이었다. 신문과 잡지에서 당신이 가고 싶은 곳에 대한 여행정보를 오려 모으는 것. 아빠에게는 중요한 취미생활이었다. ‘창의성이란 점들을 연결하는 것(Creativity is just connecting the dots)’이라고 스티브 잡스가 말했던가. 아빠는 점들을 하나씩 모았고 휴가 때가 되면 그 점들을 연결해 여행 계획을 짜곤 했다. 결국 여행고수 아빠의 보물창고는 스크랩북이었던 것이다. 

그 아빠에 그 딸. 나 역시 스크랩에 관한 한 둘째가라 하면 서럽다. 여행뿐만이 아니다. 닥치는 대로 스크랩한다. 언제 따라할지 모를 요리 레시피부터 북유럽 인테리어, 에스닉한 패션 정보까지. 수십년 동안 모아 온 스크랩북 안에는 박물관에나 있어야 할 것 같은 자료도 적지 않다. 엄청난 에너지를 내뿜으며 프린터 광고를 찍던 시절 전지현의 모습이 출토되기도 한다. 신문과 잡지를 쌓아 놓고 찢고 잘랐다. 그리고 모았다.

언젠가부터 스크랩도 디지털로 하기 시작했다. 클릭 한 번으로 쉽게 원하는 정보를 쏙쏙 담아 놓을 수 있었다. 에버노트의 웹 클리퍼나 포켓 같은 웹 애플리케이션은 스크랩을 좋아하는 정보 수집자에게 안성맞춤이었다. 보이는 대로, 관심 있는 여행정보를 수집했다. 속도는 빨라졌고, 창고에 쌓이는 정보는 끝없이 늘어났다. 

그런데 문득 깨달았다. 그저 스크랩할 뿐 그 정보를 다시 찾아보지 않는 스스로를. ‘언젠가 보겠지’ 생각했지만, 그런 일은 별로 없었다.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 봤다. 효율성은 분명 높아졌지만, 애정이 줄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손으로 신문을 스크랩하면서 그 위에 형광펜으로 색을 칠하고, 동그라미를 칠하며 해야겠다고 다짐했던 마음이 담기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고 보니 스크랩할 정보를 모을 때도 다 읽고 모은 적이 별로 없는 것 같았다. 

스크랩하는 재미를 위해, 여행정보를 내 것으로 스크랩하기 위해, 종이 스크랩을 다시 시작했다. 웹 클리퍼로 하는 스크랩 횟수를 줄이고 중요한 정보는 종이로 따로 출력해 분류하기로 했다. 아빠에게 물려받은 소중한 스크랩 유전자. 아날로그와 디지털을 섞어 반짝반짝 빛날 수 있도록 갈고 닦아야지.  
 
*글을 쓴 여행작가 채지형은 인도를 좋아하는 남자를 만나, 최근 남인도로 신혼여행을 떠났다. 인도를 유유자적 돌아보며, 여행창고에 재미를 차곡차곡 스크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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