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지형의 여행유전자] 계획 중독자의 여행
[채지형의 여행유전자] 계획 중독자의 여행
  • 트래비
  • 승인 2017.05.31 10:2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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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획 없이 떠나온 첫 여행이었다. 비행기 표도 달랑 편도 항공권만 들고 나왔다. 믿는 구석은 있었다. 함께 출발한 여행 동지가 이번 여행을 담당하기로 했으니까. 목적지를 정하는 것도 그의 몫이었다. 

비행기 자리에 앉기 전까지 내 정신이 아니었다. 은행과 구청과 학교와 세무서를 오가며 처리해야 할 일들이 손발과 시간을 장악하고 있었다. 이코노미 좌석은 여전히 좁았지만 내겐 사우나 안마의자보다도 편안하게 느껴졌다. 마음에도 평화가 찾아왔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남편에게 물었다. “우리 코친(첫 도착지) 다음에는 어디로 가?”라고. “음, 생각해 보자”라는 답이 돌아왔다. 아니, 신혼여행 담당이라는 중차대한 임무를 맡아 놓고, 떠나는 비행기 안에서 이제야 생각해 보자니. 결국 비행기 안에서 나의 여행 계획 세우기는 다시 시작됐다. 아무리 바빠도 여행 계획은 내가 맡았어야 했나. 계획 중독자인 주제에, 계획 세우기를 멀리하다니.

나는 계획 세우는 것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아침에 눈을 떠 가장 먼저 하는 일이 하루 계획 세우기다. 하얀색 A4 용지 위에 두툼한 펜으로 하루를 상상하다 보면 신이 난다. 늦게 일어나서 계획 세우는 시간을 확보하지 못했을 경우에는 초조 불안 증세가 나타날 정도다. 

그렇다고 가성비 높은 패키지 상품 일정표처럼 꽉 채워진 계획을 만드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면 ‘아침 8시부터 10시까지 짜이 한잔 마시며 멍하니 앉아 있기, 10시부터 11시까지 책 읽기, 11시부터 1시까지 다음날 숙소 예약하기, 1시부터 5시까지 아나르깔리 시장 돌아보기, 5시부터 8시까지 시장 근처에서 저녁식사’ 같은 식이다. 

보통 사람의 여행 계획과 다른 점은 쉬는 시간도 계획에 포함된다는 점. 2시간이든 하루 종일이든, 일주일이든 구획을 나누어 놓아야 마음이 놓인다. 물론 계획이 다 지켜지는 것은 아니다. 애초에 지켜야겠다는 굳건한 목표를 가지고 세우진 않는다. 오히려 여행 계획은 수정하면서 재미를 느낀다. 길에서 만난 친구가 재미있는 제안을 하면, 계획은 바로 수정된다. 

새 여행 동지는 이런 나를 어이없어 한다. 지키지도 못할 계획을 세우는 것을 이해할 수 없단다. 그리고 여행하면서 계획 따위는 필요 없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마음이 흐르는 곳에 머물고, 상황이 바뀌면 떠나는 게 여행 아니냐고. 아, 새 짝꿍에 대한 소개가 늦었다. ‘여행’에 관한 한 둘째가라면 서러워하는 나지만, 그 앞에서는 살짝 주춤하게 된다. 가끔 집에 와서 전열을 정비하는 시간을 빼면, 8년 동안 인도와 파키스탄, 이란과 터키의 바람을 받으며 살아온 사람이기 때문이다. 둘 다 여행을 좋아해 더 없이 완벽한 조합이라 생각했지만, 정작 길을 함께 나서 보니 스타일은 정반대였다.

나는 반론을 펼쳤다. 계획은 꼭 지켜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방향을 잊지 않기 위해 세우는 것이다. 그러니 계획을 지키지 않는다고 비난하지 말아 달라고 부탁했다. 그때까지도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짓던 남편은 내가 건넨 사진 한 장에 두 손 두 발을 들고 말았다.
 
아빠의 여행 계획표를 담은 사진이었다. 그 안에는 길지 않은 일정 동안 돌아다닐 곳이 촘촘하게 적혀 있었다. 그랬다. 아빠는 새해가 되면 여행 계획을 세우곤 했다. 그리고 출발 날짜가 다가오면 커다란 지도를 꺼내 놓고 동선을 그렸다. 연필로 노트에 대충 여행 계획을 세운 후 어느 정도 만족할 만하면 컴퓨터에 앉아 독수리 타법으로 타이핑을 하셨다. 그리고 A4 용지에 깨끗하게 인쇄해 가방 가장 좋은 자리에 일정표를 넣으셨다. 

10년 전 내가 세계일주를 떠난다고 했을 때도 아빠는 여행 계획표를 내놓으라 하셨다. 그때는 아빠의 계획 중독이 나에게 큰 스트레스였는데, 시간이 지나 돌아보니 내가 아빠와 꼭 닮아 있다. 다행히 아빠의 여행 계획표 덕분에 우리 사이에는 평화가 찾아왔다. 어쩔 수 있나. 유전자의 힘을 받아들이는 수밖에.  
 
*글을 쓴 여행작가 채지형은 인도를 좋아하는 남자를 만나, 남인도로 신혼여행을 떠났다. 지금은 파키스탄의 황량한 산 속을 헤매고 있으며, 스리랑카와 이란 중 어느 나라로 다음 발걸음을 놓을지 고민하고 있다.    www.traveldesigner.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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