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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서령의 우주여행] 낭독의 즐거움

  • Editor. 김서령
  • 입력 2017.07.04 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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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해 미국 아이오와대학교에 초청받아 간 적이 있었다. 여름에서 늦가을까지 세계 각국, 그러니까 33개국 작가들이 한데 모여 각자의 작업도 하고 세미나도 열고 강의도 하는 자리였다. 아이오와대학교 안에는 작은 호텔이 있어서 작가들은 그곳에서 약 넉 달간 머물며 함께 지냈다. 일주일에 두 번씩 꼬박꼬박 낭독회가 있었다. 금요일 오후의 낭독회는 쉠버하우스라 이름 붙은 예쁘장한 이층집에서 열렸다. 빨강머리 앤이 금방이라도 뛰어나올 듯한 박공지붕집이었다. 아주 오랫동안 작가들의 낭독회가 열렸다는 쉠버하우스는 아이오와 시민들에게 무척이나 사랑받는 장소였다. 따로 낭독회 포스터를 붙이지 않아도 사람들은 금요일 오후만 되면 사브작사브작 그곳으로 왔고 따뜻한 커피와 베이글 한 개씩 입에 물고 자리에 앉았다. 일요일에는 시내의 서점에서 낭독회를 열었다. 쉠버하우스보다 훨씬 더 많은 시민들이 찾아왔다. 나는 좀 의아했다. 작가들의 낭독회가 무어 그리 재밌다고. 나는 자꾸자꾸 열리는 낭독회 때문에 서툰 영어발음을 교정하느라 애를 먹었다.

그러다 한국교민들을 위한 조촐한 낭독회가 있었다. 스무 명, 서른 명쯤이었나. 대부분 유학생과 그 가족들이었다. 도서관을 빌려 커피와 마들렌을 준비해 놓았다. 나는 무엇을 읽을까 곰곰 고민했다. 어차피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주지 못할 소설보다 짤막한 산문을 읽는 편이 나을 듯했다. 그래서 두 꼭지를 골랐다. 영어가 아닌 한국어로 내 글을 읽는 일이 그렇게 즐거운 일인 줄 몰랐다. 웃어야 할 포인트에서 정확하게 웃어 주는 다정한 한국인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미국인들은 내 낭독을 듣다가 별것 아닌 대목에서 웃음을 터뜨리는 바람에 나는 여러 번 당황하곤 했다. 예를 들자면 조미료가 잔뜩 들어간 김치 이야기 같은 것 말이다. 그들은 왜 거기서 웃었을까. 그건 아직도 의문이다. “아, 작가님… 웃긴데 슬퍼요. 잘 몰랐는데, 산문이란 게 원래 그런 거예요?” 그런 말을 하는 어린 유학생도 예뻐 보이고 살짜쿵 야한 이야기가 나올 때 옆에 앉은 아들의 귀를 가만히 막아 주는 아이엄마도 예뻐 보였다. 딱 한 명 외국인이 있었다. 일본인 친구 치아키였다. 치아키는 뒷자리에 가만히 서서 낭독회를 들었다. “난 한국말을 하나도 모르는데, 낭독회가 참 좋더라. 낯선 음악을 듣는 것 같았어.” 나는 치아키의 말이 좋아 혼자 헤벌쭉 웃었다. 음악 같은 한국말.

아이오와의 작은 시내를 걷다 보면 가끔 키 작은 백발 할머니들이 알은체를 했다. “너 한국 작가 맞지? 지난번에 네 낭독회엘 갔었어.” 70여 년 가까운 시간 동안 매년 수십 명의 작가들이 아이오와에 초대받고, 그래서 여름과 가을이면 낭독회가 끊이지 않는 도시에 살면 사람들은 절로 책을 사랑하게 되는 걸까. 아무리 천천히 걸어도 이십 분이면 곳곳을 다 돌아볼 수 있는 좁은 아이오와 시내에는 골목마다 두 개씩은 서점이 있었다. 가만히 듣고 가만히 웃고 가만히 손수건을 들어 눈물을 훔치는 독자들은 아무 데서나 작가들에게 말을 걸었다. 밤이면 호텔 커먼룸에 작가들이 모여 앉았다. 나처럼 영어가 서툰 이들은 낭독회를 앞두고 발음 연습을 했고 그럴 때면 특히 아일랜드 시인과 뉴질랜드의 소설가가 제일 많이 도와주었다. 누군가 음악을 틀면 또 누군가 춤을 추었고 누군가는 위스키나 와인을 가져왔다. 파나마 소설가는 신나는 K-POP을 골라 달라고 걸핏하면 나를 졸랐지만 나는 K-POP을 그들보다 더 몰랐다. 

한국에 돌아가면 자그마한 북카페 하나 내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다. 매주 한 명씩 작가들을 초대해서 낭독회를 열고 싶었다. 대단할 것도 없고 요란할 것도 없는 그냥 작은 낭독회. 작가들에게 낭독료를 쥐여 주고 나면 남는 것도 없는 장사가 되겠지만 대신 작가들에게 책 서명을 받아 놔야겠다고 생각했다. 작가 사인본을 파는 북카페가 되는 것이지. 물론 돌아오자마자 나는 그런 쓰잘 데 없는 생각을 접었다. 카페라니. 작업할 때 내가 마실 커피 한 잔 내리는 것도 귀찮아하면서. 그래도 그런 즐거운 낭독회가 한국에도 흔해졌으면 좋겠다. 영어 말고 한국어로 자분자분 잘 읽어 줄 수 있는데 말이다.  
 
소설가 김서령
남해의 작은 섬에 잠깐 다녀왔다. 물별이 부시게 반짝이는 잔잔한 바다의 가두리에 앉아 낚시를 했다. 전갱이 세 마리밖에 낚지 못했지만 대신 햇빛을 온몸으로 다 받아 내 발에는 얼룩이 생겼다. 샌들을 신었기 때문이었다. 까맣고 하얀 줄이 간 내 발을 아기가 희한하다는 듯 바라보았다. 얼룩진 발을 바라보니 또 글 쓸 생각이 난다. 그렇게 물별처럼 햇빛처럼 또 한 편이 글이 나를 찾아오길 바라는 시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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