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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올레 복드항산 코스-산이라 쓰고, 초원이라 읽는다

  • Editor. 천소현
  • 입력 2017.08.03 10:2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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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urse 1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자연보호구역
복드항산* 코스 
 
시작점 헝허르 마을 Khonkhor Village
종점 톨주를랙 마을 Tuul Juction Station
거리 14km  
소요시간 5~7시간  
난이도 중 
 
*복드항산(Bogd Khan Uul National Park) | 청나라 때인 1783년에 이미 국가보호구역으로 지정되었기에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자연보호구역인 셈이다. 사냥이나 벌목이 금지되어 있고, 1996년에는 유네스코세계유산 잠정 리스트에 이름을 올렸다. 가장 높은 지점은 해발 2,757m. 
 
초원에 누우면 온통 하늘이다. 아무것도 없다
훼손을 막기 위해 어워처럼 돌을 쌓아 놓은 올레길 표식
어워는 나그네와 주민들의 안녕을 기원하는 성스러운 장소다
 
 
 
걸으면 길이 되는 마법

출발점은 울란바토르에서 동쪽으로 25km쯤 떨어진 헝허르(Khonkhor) 마을이었다. 개장식이 끝나고 출발신호가 떨어지자 난감했다. 전방에 ‘길’이라고 할 것이 보이지 않았다. 그저 고르게 척박한 대지뿐이었다. 드문드문 설치한 길표식은 존재감이 미미해서 매의 눈으로 보아야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망설이는 사이 뒤통수를 후려치는 바람에 고개를 들어 보니 저 앞에 이미 사람들의 행렬이 깔리고 있었다. 그들이 바로 길이었다. 

한 달 전에는 푸른 기운이 돌았다던 초원의 얼굴은 깊은 흙빛이었다. 가뭄이라고 했다. 아직 피우지 못한 풀과 야생화, 그들을 기다리며 배를 곯고 있는 가축들을 생각하니 ‘아쉽다’는 너무 가벼운 말인 것 같아서 입을 닫았다. 인상적인 것은 강풍이었다. 방향을 잘 만나면 등을 밀어주기도 하고, 이마를 밀쳐 내기도 할 정도의 강풍이 이날 하루 종일 올레꾼들을 떠나지 않았다. 덕분에 체감온도가 떨어져 손끝이 저릴 정도였지만 기대에 부푼 500여 명 올레꾼들의 기세만큼은 당당했다. 

4개의 고개 중 첫 번째 고개에 올랐을 뿐인데, 호흡이 꽤 거칠어졌다. 해발 1,450m에서 시작해 단숨에 1,530m로 올라섰기 때문이리라. 지금껏 한 번도 닿아 본 적 없는 가시거리 안에 가득한 것은 하늘과 땅뿐. 테이블만 했던 헝허르 마을은 밥상만 해졌다가 보자기만 해지더니, 한 뼘만 해지기 전에 언덕 아래로 숨어 버렸다. 

복드항산은 물결치는 대지였다. 하나를 넘으면 다음 언덕이 넘어오고 그걸 넘으면 또 다음 언덕이 넘어왔다. 나무 한 그루 없이 맨살을 드러낸 산은 연약한 존재 같았다. 14km의 올레길은 복드항산의 풍광을 관통하는 길이었다. 항상 점으로만 존재했을 사람들이 줄지어 가는 풍경은 그 자체가 묘한 장관이었다. 외줄 행렬이 언덕을 만나면 각자의 지름길 방향으로 흩어졌다가 다시 평지에서 합류하는 모든 과정을 맨눈으로 볼 수 있었다. 군부대와 몇 개의 관광 게르 캠프촌을 지나치지만 이 코스의 가장 큰 이정표는 멀지만 선명하게 보이는 열차의 선로였다. 베이징에서 출발해 모스크바까지 간다는 횡단 열차가 가끔씩 씩씩거리며 멀어져 갔다. 
 
걷는 일에서도 성향이 보였다. 정해진 길은 없었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대열을 벗어나 외곽으로만 걷는 이들도 있었다. 반복되는 풍경이 벌써 지겹다는 이들도 있었고, 부지런히 서텨를 누르며 잔재미를 챙기는 이들도 있었다. 한 발자국씩 내딛을 때마다 혼비백산 도망가는 메뚜기와 여치, 개구리들, 그리고 여기가 야생화의 땅임을 잊지 말라는 듯 몸을 흔드는 야생화들이 찰나 동안 프레임에 가두어졌다. 

초원에 야생화가 잘 자라는 이유는 소나 말이 키가 큰 풀들을 먹어서 제거해 주기 때문이다. 그중에서 흔한 야생화로 피뿌리풀이라는 것이 있다. 그냥 예뻐서 찍어 두었다가 이름이 궁금해 나중에 찾아보니 놀랍게도 바로 제주가 함께 검색되었다. 피뿌리풀은 북방계 식물임에도 불구하고 한국에서는 제주도 한라산에서 발견된다는 것이다. 고려 때 원나라에서 들여온 말과 함께 유입되었다는 설이 유력하다. 최근에는 상처를 치료하는 효능까지 입증된 좋은 약초지만 제주에서는 그 개체수가 점점 줄어들어 귀한 풀이 되어 버렸단다. 하긴 여치, 메뚜기, 개구리도 한국에서는 귀해진 지 오래다. 

거의 내리막길로만 이루어진 마지막 5km 구간을 내려가 이제 종점인 톨주를랙(Tuul Juction) 마을이 코앞인데 갑자기 모래폭풍이 일기 시작했다. 멀리서 시작된 흙바람이 순식간에 마을을 삼키고 돌진해 오고 있었다. 속수무책이란 이런 것이구나. 스카프로 입과 코를 막는 것 외에 별다른 방법이 없다. 그래도 나아간다. 그래야 벗어날 수 있다.
 
그러나 모래바람을 벗어나자마자 이번에는 소나기가 내리기 시작했다. 바람에 가속이 붙은 비가 철썩철썩 뺨을 내리치니, 오늘 뭘 잘못했을까, 저절로 속죄가 된다. 지루하다는 누군가의 불평이 하늘을 노하게 했던 것일까. 우산으로 저항해 보지만 무용지물이고 퇴로도 없다. 역시 살 길은 전진뿐.
 
이 모든 난리북새통은 단 5분 동안 벌어진 일이지만, 뒷수습과 정신 차리기에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이 재난스릴러를 가장 즐긴 것은 톨주를랙 마을의 꼬마들이었을 것이다. 옛 기차역 건물에서 놀던 아이들이 우루루 구경을 나오자, 올레꾼들은 엉망이 되어 버린 몰골도 잊은 채 주섬주섬 사탕을 꺼내 쥐어 주었다. 볼이 빨간 꼬마들이 꺄르르 웃었다. 그 옆으로 소떼들이 목동도 없이 알아서 귀가하고 있었다. 모두 돌아갈 시간이 된 것이다. 초원에 다시 평화가 내려앉았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흥겹게 걷고 있는 서명숙 이사장
1코스 종점 톨주를랙 마을의 아이들
종점마을을 앞에 두고 모래바람을 만났다
 
 
글 천소현 기자  사진 김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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