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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어느 따뜻한 나라에서 그녀를 만날 확률

  • Editor. 김예지
  • 입력 2018.01.03 10:5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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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그녀가 어디에 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적어도 몇 가지 유력한 추측이 가능하다. 어느 따뜻한 나라, 골목에 자리한 작은 카페에 앉아 무언가를 끄적이고 있겠지. 또 어떤 냄새를 맡았길래.
 
 
한겨울이었다. 호호, 입김을 불며 약속장소로 나가자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그녀의 옷차림이었다. 딱 보기에도 너무 헐거운 것이다. 티셔츠에 얄따란 카디건 하나, 그 위에 도톰한 카디건을 하나 더 걸치고 머플러를 둘렀을 뿐이다. “춥지 않으세요?”라고 물으니 겨울옷이 딱히 없단다. 지금 서울에 집이 없어서, 아니 이 지구상 어디에도 정해진 거처가 없다며. 곧 따뜻한 나라로 갈 테니 굳이 두꺼운 패딩은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달팽이, 같다는 생각을 했다. 유혜주 작가가 배낭을 짊어지고 여기저기 떠돌아다닌 지도 어언 8년. 달팽이집에 든 건 옷가지와 식량뿐만이 아니다. 색연필과 스케치북, 수첩과 노트북도 있다. “가장 중요한 소지품들이죠. 여행을 계속하는 이유이기도 하고요.” 정처 없이 떠돌지만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쓴다는 목적이 있다. 그래서 책을 만든다는 목표가 있다. 

만난 지 20분 정도 됐을까. 분위기에 이제 조금 익숙해질 무렵, 유 작가의 큼지막한 두 눈이 자동 반사처럼 반짝였다. 막, 여행을 말하기 시작한 직후였다. 
 

갖고 계신 타이틀이 워낙 많아서. 뭐라고 불러야 좋을지 모르겠어요.
 
제가 좀 그렇죠(웃음). 정리하자면 저는 편집 디자이너, 일러스트레이터, 여행 작가입니다. 어쩌다 보니 편집 디자인을 전공했고, 책 만드는 일을 천직이라 생각하고 있어요. 또 어쩌다가 떠난 긴 여행의 매력에 빠져 급기야 여행이 곧 삶이 되었죠. 세상을 떠돌며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고 있습니다.  
 
1인 출판사를 운영하신다고요. 그럼 사장님 타이틀도 추가해야겠어요.
 
사장님이라는 말은 조금 거창하긴 하지만, ‘유혜주출판사’를 독립적으로 운영하고 있습니다. 주로 늘어진 일상 여행 드로잉과 소소한 글로 써 내려간 ‘제 책만’ 발행하는 지극히 개인적인 출판사죠(웃음). 기획, 디자인, 제작, 마케팅, 홍보, 세금 계산까지 모든 부분을 서툴게나마 해 나가고 있답니다. 그래도 나름 잘 하고 있는 것 같아요. 
 
책을 내셨더라고요. 제목이 독특해서 눈길이 갔어요.
 
여행 에피소드와 각 여행지에서 받은 느낌을 그림과 글로 표현했어요. 탈고를 하고서 출판사들에 연락을 했는데, 감사하게도 몇몇 출간 제의를 받았죠. 그런데 제가 원하는 방향이 아니었어요. 에세이 느낌을 최대한 살리고 싶은 제 생각과는 다르게 대부분의 출판사들은 가이드북 형식을 원하더라고요. 그러니까 글 중간 중간에 숙소, 음식점, 핫플레이스 정보를 넣자는 것이었습니다. 내 출판사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이때 하게 됐어요. 그렇게 2017년, 첫 번째 책 <니 냄새가 좋아>를 드디어 출간했죠. 앞으로 유혜주출판사는 1년에 한 권 책을 만드는 것을 목표로 더 열심히 돌아다니며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쓸 예정이에요.
 
<니 냄새가 좋아>는 어떤 의미인가요?
 
바람과 관련이 있어요. 어디선가 솔솔 불어 오는 바람에 이전 여행지에서 들렀던 동네 책방에서 맡았던 냄새가 난다거나, 작은 골목을 걷던 그날의 내 모습이 떠오른다거나. 추상적이지만, 그 냄새가 저를 움직이는 원동력인 것 같아요. 그 바람에 다시 짐을 싸곤 하니까요. <니 냄새가 좋아>는 여행의 아련한 추억을 회상하는 의미에서 붙인 제목이에요. 
 
1년에 1권 책을 쓰는 특별한 이유라도 있나요?
 
일상이 되어 버린 여행에 조금의 규칙이 필요하니까요. 최소한 ‘목표’를 가지고 여행하고 싶어요. ‘좋아하는 그림을 그리고, 일기처럼 써 내려간 글들을 정리해서 책을 펴내자.’ 이 목표 덕에 더욱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야 할 이유가 생겼고,  나란 사람의 색깔을 더 명확하게 찾게 됐어요. 사소한 일상마저 특별한 사건이 될 수 있다는 것도 배웠죠.
 
한국에는 얼마 만이에요?
 
작년 6월, 본격적인 책 출간 준비를 위해 한국에 왔어요. 2개월이면 끝날 줄 알았는데 글쎄 6개월이나 걸리더라고요.
 
어디서 지내세요?
 
고시원에서 생활하고 있어요. 책에 수록된 그림들을 모아서 연 출간 기념 원화전을 홍대에서 막 마쳤고, 이제 곧 제주로 내려가 전시회를 열 계획입니다. 
 
무려 8년간 여행을 하셨다고요.
 
딱딱하긴 하지만 숫자로 말할게요(웃음). 33개국 74개 도시를 여행했습니다.
 
이렇게나 긴 여행을 시작하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었나요?
 
2009년 처음 호주여행이 시작이었죠. 일상에 한창 지쳐 있던지라, 그땐 그냥 한국만 아니면 된다는 생각이었어요. 1년 후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니 일상이라는 녀석이 기다렸다는 듯, 그대로 있더라고요. 이후 중간 중간 짧게 여행을 다녀오긴 했지만 갈증이 해소되지 않았어요. 때마침 당시 남자친구가 영국으로 공부를 하러 떠나겠다고 했고, 그 말이 꼭 ‘여행을 시작하자’라는 말로 들렸어요. 그렇게 한동안 남자친구는 공부를 하고, 저는 여행을 했죠. 그 여행이 이렇게나 길어졌네요(웃음).  
 
짐 싸기 달인일 것 같아요. 노하우를 전수해 주세요!
 
‘짐 늘리지 않기, 모든 건 현지화’. 해외로 나갈 때 주로 작은 트렁크 하나만 들고 가요. 필요한 것은 주로 현지에서 사고, 그곳에서 대부분 소진하는 편입니다. 짐이 늘어나면 그만큼 버릴 것들이 많아지니까요. 너무나 당연한 소리지만 짐을 싸 본 사람이라면 다들 아실 거에요. ‘필요할 것 같다’라는 생각이 가방을 무겁게 만들잖아요. 이곳저곳 옮겨 다니는 사이 생각보다 살면서 많은 것이 필요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됐고, 그래서 짐을 늘리는 데 시간과 돈을 낭비하지 않으려고 노력해요. 
 

꼽기 힘들겠지만(아주 식상한 질문이기도 하지만), 개인적으로 어떤 여행지가 가장 좋아요?
 
음…. 이건 기간을 정해서 답해야 할 것 같은데요. 1주일의 시간이 주어진다면, 제주도요. 한국이지만 한국 같지 않은 그 독특함을 좋아하죠. 그렇지만 물가가 만만치 않아서 솔직히 장기간 지내기엔 경제적으로 부담이 돼요. 그래서 딱 1주일, 오래 있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는 곳이라 더 안달을 내는 것 같아요.
 
1달이 주어진다면요?
 
태국의 치앙마이, 몬테네그로의 코토르(Kotor), 보스니아의 모스타르(Mostar), 루마니아 브라쇼브(Brasov). 말하고 보니 욕심쟁이네요(웃음). 공통점은 모두 크지 않은 도시들이라는 것입니다. 좁은 골목골목마다 시간의 흔적이 묻어나는 올드타운이 좋아요.
 
내친 김에 1년까지 가 볼까요?
 
단연코 베를린으로 갈 것입니다. 제가 원하는 모든 것이 있기 때문이에요. 도심 속에 지친 사람들을 위로해 주는 공원 티어가르텐(Tiergarten), 거리를 바삐 움직이는 베를리너들의 활기찬 에너지, 젊은 예술가들의 감각이 있는 곳이죠. 느림과 빠름, 다양한 삶의 속도가 있어 오래 있어도 지루하지 않아요.
 
여행지에서는 주로 어디서 지내세요?
 
되도록이면 사람이 많지 않은 작은 도시의 아담한 숙소에 머물러요. 주로 한 달 이상 머물기 때문에 렌트를 하죠.
 
여행 스타일은요?
 
최대한 늦게 일어나고, 하루하루를 뭉개며 급할 것 없는 시간을 가지려고 해요. 느지막이 일어나기 때문에 게으른 아침 겸 점심을 먹을 수밖에 없고, 게으르게 움직이다 보니 오후에나 밖으로 나서게 되죠. 그러고는 카페 하나를 찾아서 어김없이 따뜻한 아메리카노 한 잔을 시켜요. 지나가는 사람들의 표정을 살피고, 그들이 하는 시답잖은 얘길 들으며 그림을 그리고, 글을 써요. 하루 중 가장 집중해서 에너지를 쓰는 시간이에요.
 
유독 카페 그림을 많이 그리시는 이유가 있었네요.
 
뒷골목의 유니크한 카페를 발견하고 그 공간을 글과 그림으로 담아 내는 걸 즐겨요. 가끔은 화려하고 거창한 볼거리에 입이 떡 벌어지기도 하지만, 정작 훗날 머릿속에 남아 있는 기억들은 늘 작고 소소한 풍경들이더라고요.
 
소박하고 아기자기한 감성의 소유자이시군요.
 
그래서 위험하답니다. 오다가다 구경하는 작은 찻잔 하나에 마음을 홀딱 빼앗기고 마니까요. ‘나는야 장기 여행자야, 생활 여행자야’ 몇 번을 되뇌면서 망설이다가 결국엔 한두 개 정도 집어서 가방에 넣어서 오곤 하죠. ‘짐 늘리기 말기’라고 했던 앞선 조언은 잠시 잊어 주세요(웃음).
 
 
그림이나 글의 영감은 주로 어디서 얻는 편인가요?
 
같은 일상이라도 조금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려 해요. 그런 노력이 하나둘 모이다 보면, 어느 특정한 장소나 거기서 만난 사람이 훌륭한 소재가 되어 주거든요. 물론 누가 봐도 멋진 곳에서도 영감을 얻습니다. 하지만 그 기회는 항상 제 옆에 있는 것이 아니잖아요. 그래서 지극히 흔한 풍경을 나만의 방식으로 해석하면서 ‘특별하게끔’ 만드는 거죠.  

아무리 숙련된 여행자라도 위기가 있었을 것 같아요.
 
크고 작은 위기가 늘 있었죠. 그중 가장 끔찍했던 순간은 2015년 네팔 지진이었어요. 제가 그 현장에 있었거든요. 아직도 그때 기억이 생생해요. 여느 때와 다름없는 너무나 고요한 아침이었죠. 샤워를 하러 들어간 찰나에 땅이 흔들렸어요. 타월 하나 걸치고 미친 듯이 건물 밖으로 뛰쳐 나왔는데, 시간차를 두고 들이닥친 지진이 마구잡이로 모든 것을 흔들어 놓았어요. 눈앞에서 땅이 쩍 하니 갈라지고, 힘없이 내려앉는 건물에서 사람들의 비명소리가 들렸습니다. 아마도 그간 상상하던 공포의 범위를 벗어났나 봐요. 공포가 공포로 인지되지 않고, 일어나고 있는 일들이 그저 뇌에 잔상으로 뒤죽박죽 박혔어요. 상황이 조금 잠잠해지고 나서야 스멀스멀 몸이 떨리고, 눈물이 왈칵 쏟아졌습니다. ‘제발 살아만 있어 달라’는 메시지들도 그제야 쏟아졌어요. 그렇게 2주간 그곳에서 여진의 불안함을 안고 견뎌야 했어요.
 
 
이제 여행을 그만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을 법도 한데요.
 
그게 참 이상하죠? 안정적인 생활로 돌아가고 싶다가도, 일상으로 돌아와 두 달 정도만 지나면 또 몸이 근질거리더라고요.
 
그래도 가끔은 정착하고 싶지 않으세요?
 
지금 당장은 아니지만, 언젠가는 정착해야지 하고 막연하게나마 상상을 하긴 한답니다. 일과 여행을 병행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금상첨화겠죠. 요즘 말로 ‘디지털 노마드(Digital Nomad)’를 꿈꾼다고 해야 할까요.
 
<트래비>에 기사가 실릴 때쯤이면, 어디에 계실까요?
 
아마도 태국 치앙마이요. 제주 전시를 마치고 갈 생각이에요. 3년 전 처음 그곳에 갔을 때 그렸던 드로잉들을 전시하려고요. 치앙마이는 언제 가도 좋아요. 날씨도 날씨지만, 예전에 머물렀던 익숙한 기억들이 참 따뜻해요.
 
그러고 보니 주로 더운 나라로 가시네요.
 
겨울은 이래저래 부담이 많이 되는 것 같아요. 순식간에 늘어나는 옷의 부피가 그렇고, 찬바람이 불면 서글퍼지는 제 마음의 무게가 그렇습니다. 그래서 저도 모르게 자꾸만 따뜻한 나라로 떠나요. 여름으로요.
 
 
따끈따끈한 연애는 안 하세요?
 
다음 여행지에서 만나게 될 누군가와의 로맨스를 기대해요. 기왕이면 저와 비슷한 성향의 사람, 그러나 삶을 조금 다른 방향으로 바라보는 시선을 가진 사람이요. 너무 어렵나요(웃음)? 딱히 결혼이라는 틀을 씌우지 않고서도 그냥 함께 늙어 갈 수 있는 사람이면 좋겠어요. 서로의 모습을 지긋이 바라봐 주는 동반자, 친구 같은 사람이요.
 
 
그렇다면 당장은 치앙마이 로맨스가 유력하겠군요(웃음).
 
그러길 바라요. 치앙마이에서 전시 일정이 끝나면 인도네시아 발리로 갈 생각인데, 치앙마이가 아니라면 발리 로맨스가 될 수도 있겠네요(웃음). 발리에서는 두 번째 책을 위한 작업을 시작할 것 같아요. 그리고 6월 말쯤에는 다시 한국에 돌아와 책 출간을 준비하겠죠. 이제 말 안 해도 아시죠? 저 유망한 출판사 사장인 거(웃음).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홍길동 같아요!
 
그게 제 매력이라면 매력이죠. 어디서 언제 만날지 모른다는 예상 불가함(웃음)? 우리 다시 만나요. 어디에서 언제든,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당연하고 반갑게. 힌트는 굳이 말 안 해도 아시겠죠? 저는 주로, 따뜻한 곳에 있답니다! 
 

<니 냄새가 좋아>
2017년│유혜주

태국과 라오스, 말레이시아와 네팔, 캄보디아에서 겪은 에피소드들을 담았다. 차분히 적어 내려간 일기형식의 글과 직접 그린 그림이 거창하기보다는 ‘일상적’이다. 주로 아담한 카페에서 글을 쓰고 그림을 그렸다는 유혜주 작가처럼, 한적한 동네 카페에서 유유자적 읽고 싶은 책이다.  
 
*유혜주 작가는 지난 8년간 세계를 떠돌며 여행을 했다. 최소한의 목표는 있어야 한다는 철칙으로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고 책을 만든다. 하지만 여전히 국경을 넘는 일은 버겁다. 정든 곳에서 발 떼기가 어려워서라 변명하고 싶지만, 실은 그냥 익숙함이 좋은 거다. 그럼에도 계속 낯섦을 좇는 이유는 딱 하나, 설렘 때문이다.  인스타그램 hyejooyu
 
 
글 김예지 기자 사진·일러스트 제공 유혜주 인터뷰 사진 신영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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