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텐들러 다니엘 한옥을 설계합니다

  • Editor. 천소현
  • 입력 2018.02.06 1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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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인에게 한옥을 어떻게 설명한 것인가? 
너무 어려운 과제다. 
그래서 텐들러 다니엘 소장의 존재는 소중하다. 
독일에서 한국까지, 먼 여정을 걸어와 
한옥을 설계하고 있는 이 젊은 건축가에게 
벌써 살짝 빚진 기분이 든다. 
 

Tandler Daniel 
텐들러 다니엘 

1980년생. 건축사무소 어반디테일 서울(Urban Detail-Seoul) 공동대표. 파독 간호사로 일하셨던 어머니 김순복(Soon-Bock Tandler)씨와 독일인 아버지 피터 텐들러(Peter Tandler)씨의 2남 중 막내로 독일에서 성장했다. 한옥을 설계하기 위해 독일에서 건축을 전공했고 한국에서 와서 8년째 건축가로 일하고 있다.   www.urbandetail.co.kr
 

한옥? 일단 독일로 돌아가! 

그는 원래 경제 학도였다. 성적이 나쁘지는 않았지만 적성에 맞지 않았다. 2학년까지 마치고 2003년, 삼성경제연구소 인턴십을 위해 한국에 와 있었던 시간 동안 그 확신은 더욱 굳어졌다. 형광등 불빛, 회색 바닥, 파티션이 있는 사무실에서 하루 종일 책상 앞에 앉아 있어야 하는 삶은 생각만 해도 답답했다. 괴팅겐 대학교(University of Gottingen)로 돌아가서 진로에 대한 고민을 다시 시작했다. 내가 정말 좋아하는 것은 무엇인가? 

고민 끝에 자신이 한국의 전통문화, 그중에서도 한옥에 대한 관심이 크다는 것을 깨달았다. 문제는 독일에 한옥에 대한 자료가 거의 없다는 것. 도서관을 싹 뒤져 겨우 찾아낸 것이 당시 한옥문화원의 원장이었던 신영훈 선생의 책 한 권이었다. 그것도 한글이었다. 어린 시절 광주 외가를 종종 방문하고, 할머니와 소통하며 더듬더듬 배운 한국어 실력을 어른이 되어 연세대학교 한국어학당에서 보충해 두었던 것이 다행이었다. 

바로 이메일을 보냈고 당시 부원장이었던 장명희 現 한옥문화원 원장에게서 회신을 받을 수 있었다. 이 인연을 계기로 그는 방학 때마다 한국에 와서 한옥답사와 세미나 등에 참여할 기회를 얻었다. 본격적으로 한옥설계를 공부하고 싶다는 마음을 굳혔지만 사람들의 충고는 한결같았다. 일단 독일로 돌아가 건축을 공부하고 오라는 것. 한국에는 그에게 맞는 체계적인 교육 시스템이 없는 상태였다. 결국 2004년 아헨공과대학교(Aachen University of Technology) 건축학과에 진학하게 됐다. 
 
은평 한옥마을에 완성된 어반디테일 서울의 첫 번째 신축 한옥
부엌과 화장실은 현대식으로 만든 ㄷ 자 한옥이다 

‘구가’에서 ‘어반 디테일’로 

다행히 아헨공대에서도 한옥을 계속 공부할 수 있었다. 주제를 자유롭게 선택할 기회가 있을 때마다 모두 한옥을 선택했다. 졸업 논문의 테마도 도심 속의 한옥이었다. 교수님들도 한옥을 몰랐지만 함께 알아 가 보자는 분위기였다. 그리고 방학 때마다 다시 한국에 와서 인턴십, 현장 실습을 병행했고, 서울대학교 한국건축역사 연구실에도 한 학기 동안 있었다. 부모님의 전폭적인 지원에도 불구하고 ‘과연 한옥건축가가 될 수 있을까?’ 하는 불안감이 떠나지 않았던 시간이었지만, 결국 잘 버텨 냈다. 

졸업 후 2010년, 그는 바로 인턴십으로 연을 맺었던 구가도시건축 사무소의 조정구 대표에게 전화를 걸었다. 혹시 일자리가 있느냐고. 구가도시건축은 현대건축뿐 아니라 한옥설계 분야에서 두드러진 성과를 거두고 있었기에 안성맞춤이었다. 그곳에서 4년 동안 ‘필드’를 경험할 수 있었다. 보통 한옥건축과 현대건축을 따로 구분해서 생각하지만 본질적으로 한옥도 사람이 사는 집이다. 건축을 먼저 공부하고 석사 과정 등을 통해 한옥을 더 깊게 공부하는 시스템이 마련되면 좋겠다는 것이 그가 경험에서 꺼낸 제안이다. 

2014년, 구가에서 함께 일하던 최지희 소장과 함께 ‘어반 디테일 서울’을 차렸다. 처음 1여 년은 명륜동에 있는 참우리건축협동조합과 함께 있다가 두어 해 전에 을지로 골목 한복판에 독립된 사무실을 얻었다. 허름한 가죽 공장 자리를 하나씩 고쳐 나갔다. 한옥 게스트하우스 리모델링 등의 소소한 일감을 받아 수리 비용을 마련하고 전기 배선, 페인트칠 등도 직접 했다. 창호, 가구까지 직접 설계해서 맞춤으로 완성하는 데 다시 1여 년이 걸렸다. 지금 어반 디테일의 사무실은 심플하고 아늑하다. 창가는 텐들러 소장이 직접 돌보는 식물들로 화사하다. 
 
화려한 장식은 넣지 않았다. 막새를 쓰지 않고 석회로 처마 끝을 마무리했다
왼쪽 대문 위에 다락방을 두었는데, 부엌에서도 아이들이 다락에서 노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글 한 편으로 시작된 첫 한옥 작품 

외국인들이 볼 수 있는 한옥에 대한 자료가 귀한 현실은 바뀌지 않았다. 그가 우연처럼 첫 신축 설계의 기회를 얻을 수 있었던 것도 이 때문이었다. 

홍보도 하지 못했던 개업 초기에 텐들러 소장은 한 통의 메일을 받았다. 은평 한옥마을에 입주를 계획하고 있던 건축주가 스카이프로 영어를 배우던 자신의 미국인 강사에게 한옥에 대한 이야기를 했고, 궁금한 마음에 한옥을 검색한 강사가 우연히 텐들러 소장이 쓴 글을 읽고 텐들러 소장의 이메일 연락처를 건축주에게 알려 주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지난해 가을, 서울 은평구 진관동의 은평 한옥마을에 어반 디테일의 첫 작품이 완성됐다. 두 아이와 함께 입주한 건축주 가족들의 온기가 ㄷ자 현대식 한옥의 내부를 채우고 있다. 전통적인 느낌을 살리면서도 이중 유리 등으로 단열의 약점을 해결했고, 대문 위에 다락을 두었더니 온 동네 아이들의 사랑방이 되었다. 약 165m2(50평) 대지에 건물은 약 70m2(21평) 정도지만 꽤 넓어 보인다. 한옥이 원래 그렇단다. 처음부터 끝까지 건축주와 좋은 관계를 유지한 작업이었다. 작가주의보다는 소통주의. 건축주들의 의견을 최대한 반영했고, 건축주들도 신뢰하고 존중해 주었다. 

요즘 가장 자주 찾는 현장은 한 달 후 완성될 옥인동 한옥 리모델링 현장이다. 동선은 개선하면서도 본래 있던 창호의 패턴을 살리면서 새로 만든다든가, 세세하게 신경 쓰이는 부분들이 많다. 보수만 하는 ‘수선’인가, 구조를 건드리는 ‘대수선’인가에 따라 달라지는 건축법상의 문제들, 행정적인 문제들을 풀어 나가는 것도 쉽지만은 않다.  

서울에는 아직 일제시대 이후, 6·25 이후에 지어진 도시한옥들이 많다. 신축뿐 아니라 리모델링까지 생각하면 건축가인 그에게 앞으로 할 일이 무궁무진한 셈이다. 그러나 한옥에만 관심이 있는 것은 아니다. 다양한 건축을 해 보고 싶다. 주택을 넘어서는 작업도 하고 싶다. 물론 한옥을 가장 많이 하고 싶긴 하지만. 
 
골목이 있어 좋은 도시, 서울 

가끔 건축 가이드를 하는데, 잘 정돈된 강남보다는 을지로 뒷골목을 보여 줄 때 반응이 더 폭발적이다. 얼마 전에 독일 국가 방송에서 촬영을 왔을 때 가장 히트한 장소는 세운상가였다. 솔직히 예쁘지는 않다. 그러나 건축역사에서 세운상가의 의미는 남다르다. 수많은 주민들을 이주시키고 1.2km 길이의 콤플렉스(통칭 세운상가라고 부르지만 실제로는 세운상가 나동, 현대상가, 풍천상가, 진양상가, 신성상가 등으로 구분되어 있다)를 세우는 일은 60년대의 한국이 군사독재였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시대상이 보이는 것이다. 

“길 모양, 골목 모양을 도시의 뼈대, 도시의 DNA라고 해요. 건축물이 없어져도 이 길을 통해서 역사를 볼 수 있기 때문에 함부로 지워 버리면 안 됩니다. 피맛골도 사라졌지만, 그 흔적이 조금 남아 있죠. 외국인들에게 유래를 설명해 주면 아주 재미있어 해요.”

외국인의 눈으로 봤을 때 서울은 매우 흥미로운 도시다. 세계적인 건축가들의 작품으로 비교하면 서울은 도쿄와 비교 대상이 되지 않는다. 높고 길쭉한 건물들이 빛나는 홍콩처럼 한눈에 매력적이지도 않다. 강남에는 개입된 도로와 아파트가 있는가 하면 강북에는 궁궐부터 적산가옥, 70~80년대 건물들도 남아 있다. 조선시대 골목 형태가 아직 많이 남이 있어서 옛 동네에 가면 시원한 느낌이 든다. 긴 역사가 있다는 점에서 다른 나라들과 다른 매력이 있다. 

얼마 전 서울시 공무원들을 대상으로 강의를 할 기회가 있었는데, 을지로가 강남보다 더 좋다는 이야기를 시작하자 눈이 반짝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전통 건물, 식민지 시대의 건물들을 다 지워 버리면 서울도 결국 고층 빌딩만 가득한 재미없는 도시가 되어 버릴지 모른다. 그래서 대규모 재개발을 극단적으로 반대한다.

단순하고 아름다운, 모던 한옥을 고민하다 

답사를 다니다 보면 한양에서 즉, 권력의 중심인 왕으로부터 지리적으로 멀어질수록 집을 화려하게 짓는 경향이 확연하다. 신축 한옥에서도 여러 개의 부재를 겹쳐서 쓰고, 굵고 화려하게 만들어서, 궁궐처럼 한껏 멋을 낸 한옥들이 종종 있다. 텐들러 소장은 장식성이 과한 한옥보다는 단순하게 지어진 고택들이 더 아름답다고 느낀다. 보통은 아기자기하고 화려한 창덕궁을 선호하겠지만, 건축적으로 보면 완벽하다고 할 만큼 ‘클리어한 공간’을 가진 종묘가 더 좋다. 

사실 한국에서 건축가로, 그것도 외국인으로 한옥을 설계하는 일은 쉽지 않다. 편견이나 오해들이 있다. 한국에서도, 독일에서도, 친한 사이가 아니면 대뜸 이름을 부르는 경우가 없는데, 초면인 사람도 그를 ‘다니엘씨’라고 부른다. 현장에서도 적응이 필요하다. 아무리 날렵한 처마선을 설계해도 대목의 손맛에 따라 서까래가 굵어져 버리기도 하고, 처마 끝은 와공의 느낌대로 가 버린다. 잘 맞는 사람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 재정적으로도 더 안정되면 좋겠다. 언젠가 자신을 위한 한옥을 짓고 싶지만 가능한 시점이 너무 멀어 보인다. 한옥 신축의 경우 평당 최소 1,200만원, 일반 건축의 2배가 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계속 한국에서 건축가로 살아가기를 선택했다. 독일의 정확성보다는 한국식 융통성이 이미 더 편안하게 느껴진다. 가끔 친구들과 지방 여행을 다녀오고, 공연장을 찾고, 달리기를 하고, 엥두와 노을이라는 이름의 두 마리 고양이와 함께 사는 일상은 꽤 만족스럽다. 한국에서의 삶을 선택하면서 단 하나 아쉬운 점이 있다면 가족들을 잘 만나지 못하는 것이다. 가끔 독일에 가면 지인들을 만나기에도 시간이 빠듯하다. 

하지만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게 되었으니 더 바랄 것이 없다. 건축가로서 해야 할 일도, 하고 싶은 일들도 많다. 한국의 건축은 식민통치와 개발독재를 거치면서 단절된 부분들이 있다. 일제시대에 건축을 공부한 이들이 극히 적었고, 개발시대에는 가구를 포함해 전통이 담긴 것들은 죄다 내다 버렸다. 최근에야 다시 한옥마을이 생기고, 재미있는 작업들도 늘어나고 있다. 언젠가는 전통적인 비율, 소재 등 한국적인 것의 ‘에센스’를 이해하면서도 완전히 현대적인 집을 설계해 보고 싶다. 마치 번역을 하듯 말이다. 그는 지금, 한국의 한옥 건축 현실에서 꼭 필요한 역할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다.  
 
 
학생 때 실습 차 갔던 음성 한옥 신축 현장의 기둥을 그렸다
대들보 디테일
 
음성 |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스케치다. 포클레인이 건물의 부분을 손상시켰는데, 장마철에 모두 무너져 버렸다. 무너져 가는 건물의 아름다움을 그렸다
백인재 | 북촌 한옥 마을의 기품 있는 한옥
 
그를 버티게 해 준 스케치들 

건축학과는 경제학과와는 또 다른 어려움이 있었다. 
도면을 그리거나 설계 모형을 만들며 하얗게 새우는 밤들이 너무 많았다. 적응하기 어려웠던 그 시간을 견디게 해 준 것이 스케치 수업이었다.
 
 
●텐들러 소장의 한옥 예찬 
 
한옥을 이해하고 싶다면 그곳에 살던 사람들의 생활을 상상해 보라. 왜 거기에 쪽문이 있고, 창호가 있는지를. 봉화 한옥마을로 답사를 갔을 때 고택에서 묵은 적이 있다. 비가 오는 밤, 열린 창문을 통해 들려오던 빗소리가 인상적이었다. 그래서인지 봉화의 한옥들이 사랑스럽다. 기억 속에 특별하게 자리 잡은 한옥 몇 채를 더 소개한다. 
 
경주 양동마을 관가정 
위치가 좋아서 누마루에 앉으면 시원하고 마음도 편안해진다. 거기 오래 앉아서 스케치를 했었다. 사랑채와 안채가 분리되지 않는 것도 특징이다. ㅁ자 한옥의 앞부분이 사랑채 역할을 하고, 뒷부분이 안채다. 남녀 차별이 심했던 조선에서는 드문 구조다. 
 
남원 몽심재 
집 구성이 ‘조선답다’고 느꼈다. 행랑채에 대문이 있고, 그 뒤에 사랑채, 그다음에 안채가 있는 구성이다. 뒤로 갈수록 땅이 비스듬하게 높아져서 조경도 보기 좋다. 사랑채 구조는 그리 간단하지 않지만 적당한 높이의 기단에 앉혀 있고, 대문을 통과해 들어가는 느낌이 아름답다. 안채는 아늑하다. 
 
해남 윤두서 고택
규모가 꽤 되는 집인데, 구조가 간단하다. 불필요한 장식도 없고. 지금은 사는 사람이 없어서 휑하지만, 예전을 상상하면 꽤 좋았을 것 같다. 가끔 생각한다. 심플하면서도 화려한 느낌은 혹시 윤두서가 화가였기 때문이 아닐까 하고.
 
글 천소현 기자  인터뷰 사진  Photographer 이승무  한옥사진 Hooxme 이상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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