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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의 상흔을 간직한 여름의 도시, 호찌민

  • Editor. 정태겸
  • 입력 2018.02.07 1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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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 Chi Minh
붉은 더위가 훅 끼쳐 왔다. 해가 저물어 가고 있음에도 끈적하게 들러붙는 열기가 쉬이 가시지 않는다. 같은 베트남이어도 역시 남쪽은 남쪽이었다. 북쪽의 하노이와는 확연한 차이가 느껴진다. 캄보디아 국경과 그리 멀지 않다는 것을 몸이 먼저 느끼고 있었다. 
 
호찌민의 아침은 여느 대도시와 다르지 않지만 느긋함이 배어 있다

호찌민은 과거 사이공이라 불리던 도시로 베트남의 경제중심지이자 상업도시다. 함께 다니던 베트남 현지 가이드 토니는 이곳에 여전히 미국의 잔재가 많이 남아 있다고 했다. 프랑스인들에 의해 전형적인 식민도시로 키워졌고, 1908년 시로 승격되어 프랑스풍의 건물들이 많이 건축됐다. 베트남 전쟁 당시에는 미군의 수뇌부가 이 도시를 베이스캠프로 삼았고, 미국은 이 도시에 대사관을 지었다. 그때부터 미국의 문화가 이식됐다. 건축물의 양식만 봐서는 알 수 없었지만, 자본주의의 보이지 않는 화려함은 확실히 느껴진다. 편리하고 멋진 도시의 기능, 소비에 거리낌 없는 세련된 패션 피플…. 연애를 즐기는 데 있어서도 연인들은 아무 거리낌 없이 자기들의 감정을 드러낸다. 그럼에도 하노이에서 느꼈던 베트남만의 소박한 매력은 좀처럼 찾아보기 힘들다.

사이공이라 불리던 이 도시가 ‘호찌민’이라는 새 이름으로 불리기 시작한 건 1975년 북베트남에 의해 사이공이 함락되고 통일정부가 수립된 이후였다. 우리가 흔히 부르는 월남전은 미국을 등에 업은 남베트남과 사회주의 노선을 고집한 북베트남의 싸움이었다. 수년을 끌었던 전쟁 끝에 함락된 도시 사이공에는 베트남의 국민적 영웅 호찌민의 이름이 수여됐다. 호찌민이라는 이름은 베트남어로 ‘깨우치는 자’라는 의미를 가진다.
 
그의 본명은 응우엔 신꿍. 본명에 부여된 의미는 ‘성공할 사람’이었다고 한다. 그는 1942년 중국에 투쟁지원을 요청하러 갔다가 체포, 투옥되는 일련의 사건을 겪은 이후 더 이상 본명을 쓰지 않았다. 대신 민족의 각성을 염원하며 가명인 호찌민을 쓰기 시작했다. 이 도시에 그의 이름을 붙인 건 결혼조차 거부한 채 일생을 국가를 위해 헌신한 자에게 바치는 최고의 존경이 아니었을까. 베트남 사람들은 지금도 종종 그를 ‘호 아저씨’라고 부른다.
 
구치 터널은 베트남 전쟁 당시 베트남 사람들이 열악한 환경에서도 얼마나 치열하게 버텨 냈는지를 오감으로 체험해 볼 수 있다
 
베트남 전쟁 당시 이들이 얼마나 처절하게 싸웠는지는 구치 터널(Cu Chi Tunnels)에서 오감으로 느낄 수 있다. 호찌민에서 차로 두 시간. 정글이라는 말이 너무나 잘 어울리는 곳에 베트남군의 전쟁터가 남아 있다. 구치 터널은 말 그대로 땅굴이다. 미군의 폭격을 피해 땅속에 숨어 전쟁을 치러야 했던 그네들의 절박한 유산이다. 이 터널은 무기의 월등함이  항상 전쟁의 성패를 결정짓는 게 아니라는 교훈을 보여 주고 있었다. 좁은 땅굴을 따라 뛰어다니며 곳곳에서 게릴라전을 펼쳤던 그들의 모습을 현지 관계자가 그대로 재연해 주었다. 

그를 따라 땅굴에 뛰어들어갔을 때 이내 후회의 탄식이 곳곳에서 터져 나왔다. 아무리 둘러봐도 입구 따위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숨겨진 뚜껑을 열고 땅굴 속에 들어가 저쪽 둔덕에서 튀어나오는 모습을 보면서는 “미군이 짜증날 만도 했겠다”는 감탄도 절로 나왔다. 그들은 그렇게 수년을 버텨가며 전쟁을 이겨냈다. 직접 손으로 부비트랩을 만들고, 살기 위해 적을 죽여야 했고, 폐타이어를 잘라 만든 신발을 신으면서 그들은 그렇게 버텼다.
 
빈 응이엠은 전통적인 베트남불교 양식의 차원이라. 호찌민에서도 이런 사원은 흔치 않다
통일궁은 험난했던 베트남의 지난 백년이 전시된 곳이다
호찌민의 찌는 듯한 더위를 피해 그늘을 찾아온 사람들

구치 터널에서 베트남의 저력을 확인했다면, 호찌민 통일궁은 그들의 험난했던 지난 백년의 역사를 확인한 곳이다. 1868년 프랑스가 인도차이나 통치를 위해 지은 이 건물은 1954년 제네바 조약에 의해 베트남이 남북으로 갈리면서 남베트남의 대통령궁으로 사용됐다. 1962년에는 대통령 암살을 목적으로 한 폭탄이 떨어져 파괴됐지만 1966년에 개축해서 다시 대통령궁으로 사용됐다. 그리고 1975년 4월30일. 북베트남의 소련제 T-55 탱크가 이곳으로 진격하면서 드디어 남북간의 전쟁이 멈추고 통일을 실현할 수 있게 됐다. 그것을 기념해 이 건물에는 통일궁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지금도 입구 한 쪽에 당시 대통령궁으로 진격했던 탱크가 서 있다. 
 
글·사진 정태겸  에디터 천소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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