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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하기 딱 좋은 여행지 보르도

  • Editor. 손고은
  • 입력 2018.02.07 1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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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라빛 향기 가득한
보르도 Bordeaux 
투명한 와인 잔을 빙그르르 휙 돌리길 수차례. 한 잔이 두 잔이 되고, 두 잔이 세 잔이 됐다. 어느새 아랫입술이 보랏빛으로 물들고 만다, 보르도에서는. 
 
작은 저택이 딸린 샤토 레 까르므 오 브리옹

●와인도 섞어야 제맛
 
보르도에서는 온종일 취하기 딱 좋다. 훌륭한 요리에 맞는 와인 한 잔은 물론인데, 거리를 걷다 보면 발에 차이는 것이 와인 숍이다. 여기에 들어가면 평소에는 엄두도 내지 못했던 100만원을 호가하는 와인도 10유로면 한 잔(!) 맛볼 수 있다. 고급 와인의 예상치 못한 가격에 호텔 방에는 자꾸만 와인 병이 쌓였다. 수백년의 역사를 가진 와이너리 투어도 보르도에선 어렵지 않다. 그러니 취할 수밖에. 

공부를 좀 해봤다. 보르도 와인에는 몇 가지 특징이 있는데, 가장 인상적인 것은 두 가지 이상의 포도 품종을 섞은 블렌딩 와인이 많다는 것. 적게는 두 가지지만, 많게는 6가지도 섞는다. 이때 포도 품종의 비율이 어떻게 되느냐에 따라 맛은 천차만별로 달라진다. 보르도 대부분의 와이너리들은 이렇게 자신만의 방식으로 황금 비율을 찾고 있다. 참고로 보르도에서 가장 많이 수확하는 포도 품종은 메를로로 전체의 약 60%를 차지한다고. 

와인을 잘 몰랐을 때는 ‘샤토’가 붙은 와인을 최고라 여겼다. 크게 틀리진 않았지만, 보르도 와인에는 ‘샤토(Chateau)’라는 단어가 붙는 경우가 많다. 샤토는 사전적으로 ‘성(城)’을 의미한다. 하지만 보르도에서 샤토라 불리려면 세 가지 조건을 갖춰야 한다. 크건 작건 성(저택)이 있어야 하고, 일정 면적 이상의 포도밭과 와인을 제조하고 저장할 시설이 필요하다. 세 가지 중 하나라도 충족하지 못하면 와이너리에 샤토를 붙일 수 없다. 이러한 조건을 갖춘 샤토 와이너리가 보르도에만 6,500개 이상이 넘는다. 보르도가 와인의 도시라는 불변의 공식이 절로 외워졌다. 
 
보르도에서는 크고 작은 와인숍을 종종 만나게 된다. 보통의 750ml 사이즈가 부담스럽다면 375ml를 선택하자. 호텔에서 자기 전 가볍게 마시기 좋다 
 
샤토 레 까르므 오 브리옹에서는 수확한 포도를 오크통에 2년간 숙성한다. 숙성이 끝나면 2~3가지 포도 품종을 블랜딩한 와인을 만든다
 
●샤토에 가다 

보드도에서 와이너리 투어를 건너뛸 수는 없다. 보르도 다운타운에서 40분이면 닿을 수 있는 ‘샤토 레 까르므 오 브리옹(Chateau les Carmes Haut brion)’을 찾았다. 보르도가 속한 아키텐주에서 주소 상으로 중심 도시인 보르도에 속하는 유일한 와이너리다. 원래 개인 소유의 와이너리였으나 1년 전 여행객들을 위해 개방했다고. 

9월 초부터 10월 초까지는 포도 수확기다. 샤토 레 까르므 오 브리옹에서는 이 기간 직접 손으로 포도를 수확하는데, 겨울이 되어 포도 잎이 다 떨어지고 나면 내년에 다시 잘 자랄 수 있게 가지치기 작업에 들어간다. 이곳에서 수확하는 포도 품종은 카베르네 프랑(40%), 카베르네 소비뇽(18%), 메를로(42%)다. 이렇게 세 가지 포도 품종의 비율을 유지하는 것이 훌륭한 포도 산지를 유지하기 위한 중요한 요소라고. 또 선선하고 풍부한 수량도 한몫하고 있다. 

와이너리에서는 수확한 포도를 검품한다. 질 좋은 포도만 저장소행 티켓을 쥘 수 있다. 저장소는 지하 18m에 있다. 커다란 오크통 한 개는 225리터로 와인 약 300병을 생산할 수 있는 어마어마한 양이다. 약 2년 동안 숙성의 시간이 필요하다. 숙성된 와인은 포도 품종에 따라 블렌딩되는데, 레시피는 매년 다르다. 어느 품종을 얼마나 넣을지는 그 해 수확한 포도의 양과 품질에 따라 매번 다르다.
 
지난해 가을 저장소에 들어간 와인은 2019년 9~10월경 문을 열고 나오는데, 우리의 식탁에 오르기까지는 시간이 더 걸린다. 이듬해인 2020년 1~2월에 도매업자에게 납품되고 프랑스나 해외 등으로 수출하는 시간까지 생각하면 지난해 만들기 시작한 와인은 2020년 4월경에나 맛볼 수 있다. 

인고의 시간을 견디면 보상이 따르는 법. 이제 와인을 음미할 차례다. 투명한 잔에 담긴 레드 와인을 하얀 구름에 살포시 비추어 본다. 와인 한 병이 어떻게 빚어지는지 듣고 마시니 입 안 가득 지극 정성의 향이 은은히 퍼졌다. 보르도 와인이었다. 
 
샤토 레 까르므 오 브리옹
주소: Chateau les Carmes Haut brion 20 Rue des Carmes, 33000 Bordeaux 
전화: +33 5 56 07 47 00 
홈페이지: www.les-carmes-haut-brion.com
 
보르도 와인 박물관. 잔에 담긴 와인이 소용돌이치는 모습을 형상화했다
 
●와인에 대한 모든 것을 담다 

아침부터 서둘러 향한 곳은 보르도 와인 박물관 ‘라 시테 뒤 뱅(La Cite u Vin)’이다. 보르도를 찾는 수많은 여행객들이 필수로 방문하는 곳으로 주말이면 긴 줄을 서야 한다는 가이드의 조언이 있었기 때문. 실제로 오픈 시간인 오전 10시 전부터 입장을 기다리는 이들이 꽤 많았다.

와인 박물관은 지난 2016년 6월 오픈했다. 프랑스 건축의 거장 아눅 르정드르(Anouk Legendre)와 니콜라스 데마지에르(Nicolas Desmazieres)가 와인 잔을 빙그르르 돌릴 때 소용돌이치는 모습에서 영감을 받아 외관을 디자인했다. 내부는 보다 야심차다. 박물관은 와인에 대한 모든 것을 오감으로 보여주겠다는 전략으로 전시관을 꾸몄다. 와인에 이렇게 많은 향이 있었던가. 초콜릿, 벨벳, 가죽, 후추, 과일 등 와인이 가진 향을 직접 맡을 수 있게 향기 확산기가 흥미롭다. 

킁킁거리며 후각을 곤두세우곤 향을 기억하려 애쓴다. 지루하게 느껴질지도 모르는 와인에 대한 역사와 특징들은 상황극을 만들어 3D 홀로그램으로도 보여 준다. 보르도뿐만 아니라 복잡하고도 다양한 전 세계 유명 와이너리와 포도 품종 등에 대한 시청각 자료, 코르크의 종류나 와인 병의 디자인, 라벨과 같은 21세기 트렌드에 대한 자료까지 전시 모듈만 23개다. 그러니 어쩌면 이곳은 와인 애호가들에게 24시간이 모자란 곳일지도 모르겠다. 

공부를 마쳤으면 직접 와인을 마셔 보아야 하지 않겠나. 박물관 8층은 와인 시음 공간으로 꾸며졌다. 무려 파노라마뷰를 자랑한다. 박물관 입장료 20유로에 와인 한 잔 시음권이 포함돼 있으니 어쩔 수 없이 식전부터 또 한 잔 기울이게 된다. 말하지 않았나, 보르도에서는 하루 종일 취할 수밖에 없다고. 테이스팅 바에는 보르도 와인을 비롯해 전 세계 각종 와인으로 가득하다. 각자의 취향을 와인 소믈리에에게 말하면 적당한 와인을 추천해 주는데, 놀랍게도 여기에 한국인 스태프가 일하고 있다.
 
보르도 관광지 어느 곳에서도 한국인 여행객을 마주치지 못했건만, 왠지 자랑스럽고 반갑다. 그녀에게 곧 점심식사를 할 예정이라고 말하자 식전주로 화이트와인 리슬링(Riesling) 한 잔을 추천했다. 눈앞에 펼쳐진 가론강을 바라보며 잔을 들었다. 연한 노란색의 화이트와인 리슬링은 파란 하늘만큼이나 시원하고 상큼하다.
 
라 시테 뒤 뱅 (La Cite du Vin)
주소: 134, Quai de Bacalan, 33300 Bordeaux 
전화: +33 5 56 16 20 20
가격: 성인 20유로(입장+와인 한 잔 시음 포함)
홈페이지: www.laciteduvin.com/en
 
지롱드(Gironde)강 건너 생 미셸 바실리카성당(St. Michel Basilica)이 보인다 
와인 박물관 7층에는 파노라마뷰를 자랑하는 레스토랑이 있다. 평일 런치 세트 메뉴에 와인 페어링을 더해 25유로다
보르도에서 가장 큰 규모의 독립 서점. 새파란 색의 입구가 눈에 띈다 
 
●파리지엥은 왜 보르도에 가는가 

잠시 와인을 내려놓고 보르도를 이야기해 보겠다. 최근 1~2년 사이 파리지엥들이 보르도를 눈여겨보고 있다. 보르도는 파리에서 남서쪽으로 약 562km에 위치한다. 그동안 파리에서 보르도까지는 초고속열차로 약 3시간 15분이 소요됐지만, 지난해 7월 프랑스 철도청이 새로운 노선을 개통하면서 파리에서 보르도까지 약 2시간 4분으로 크게 단축됐다. 렌까지도 1시간 25분이면 닿을 수 있다. 프랑스 서부 지역의 여행을 활성화하고 프랑스 기차 여행의 접근성과 편의성을 높이기 위해 추진된 사업으로 투자비만 총 120억 유로에 달한다. 

이러한 가운에 보르도가 새로운 데스티네이션으로 급부상한 것. 파리에 비해 물가도 저렴한 데다 보르도의 주요 산업인 철강·조선·화학 등 중공업과 관련된 비즈니스 상황이 좋아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가이드 이자벨(Isabelle)은 요즘 하루에 한 번쯤은 파리에서 온 사람을 만날 정도라고 했다. 공식적인 숫자로도 알 수 있다. 이자벨 가이드에 의하면 2016년 보르도를 찾은 방문객은 약 600만명이었으나, 지난해 10월까지만 해도 방문객 수는 이미 700만명을 넘어섰다고. 현재 보르도 인구는 약 25만명이지만 프랑스 정부는 2030년까지 100만명을 넘어설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알고 보니 이자벨 가이드도 보르도에 정착한 지 몇 년 되지 않은 이주자였다. 

처음엔 반신반의했다. 보르도에서 과연 이틀이나 머물러야 하는지에 대해 말이다. 하지만 보르도에 머무른 시간은 평범하지만 특별한 순간으로 가득 찼다. 왜 파리지엥들이 보르도에 ‘살기 위해’ 내려오는지 어렴풋이 알 것만 같았다. 파리로 가는 길, 와인을 사랑하는 누군가와 다시 한 번 보르도를 찾겠다, 약속하고 말았다.  
 
글·사진 손고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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