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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서령의 우주여행] 우리 마을에는 스물아홉 명이 삽니다

  • Editor. 김서령
  • 입력 2018.02.28 1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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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 혼자 여행을 하다가 호주 퀸즐랜드주의 작은 마을에 들른 적이 있다. 길게 휴가를 낸 뒤 호주 동부 해안을 따라 버스나 기차를 종종 바꾸어 타며 북쪽으로 올라가던 중이었을 것이다. 그 작은 마을에 내린 연유는 이제 기억나지 않는다. 크리스마스를 앞둔 때였으니 그곳은 여름이었고 나는 얇은 셔츠에 반바지 정도의 차림이었을 것이다. 늘 끌고 다니던 핫 핑크 수트케이스였을 테고. 그 어떤 예약도 없이 아무 데로나 다니던 때였으니 그 마을에 덜컥 내려 버린 건 아마 아무 이유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어쨌거나 그 적적한 마을 입구에는 표지판이 하나 붙어 있었다. 대충, ‘이 마을에는 모두 스물아홉 명의 주민이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곳에 오는 모든 이들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이런 내용이었다. 다른 것보다 스물아홉 명이라는 숫자가 또렷하게 기억이 난다. 나는 그 표지판 앞에 서서 잠시 망연해졌는데 세상에, 스물아홉 명의 주민이 산다면 도대체 몇 채의 집이 있다는 것이며 하루를 묵을 작은 호텔 같은 것이 있기나 할 것이며 그도 아니라면 커피 한 잔을 놓고 마른 빵을 씹을 수 있는 식당이라도 찾을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걱정 때문이었다. 

믿기 어려운 일이지만 나는 드문드문 선 집들 사이에서 식당을 찾아냈다. 더께진 유리창의 먼지가 하도 두꺼워 안이 잘 들여다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막상 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 할아버지 두 분은 쩌그럭쩌그럭 소리가 나는 낡은 슬롯머신 기계 앞에 앉아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식당 주인이 보이지 않았지만 그들이 아주 살짝 손을 들어 나를 맞아 주었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주인이 곧 나타날 테니 기다리라는 눈짓이었다. 설사 장사를 하지 않는 식당이라 해도 나는 더 걸을 기운이 없었다. 밖은 너무나 뜨거웠고 내 어깨는 오래 걷는 동안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아무 자리에 앉아 기다리자 곧 뚱뚱한 주인 여자가 나타났다.

나는 그날 무엇을 먹었을까. 잘게 다진 피클과 양상추와 햄이 들어간 케밥을 먹었을까. 아니면 볶음국수를 먹었을까. 왜 이렇게 아슴아슴할까. 아, 제대로 돌이켜보니 십년도 훨씬 지난 일이다. 그때 빨갛게 달았던 내 목덜미에는 푸른 나비 타투도 없었으니 기억이 나지 않을 만도 하지. 감자튀김을 먹었건 커피와 도넛을 먹었건 맛있게 먹은 기억은 아니다. 

가끔 그 작은 마을은 나에게 책 사이 아무렇게나 끼워 둔 사진처럼 떠오르곤 한다. 내가 정말 거기에 간 적이 있었나, 하는 생각처럼 말이다. 마치 내가 무심히 지나쳐 온, 사소하게 잊어버린 남자 같은 얼굴로 그 마을의 풍경이 안개처럼 떠오르는 것이다. 조용한 마을 거리를 요란하게 굴러가는 내 수트케이스 바퀴 소리가 민망해 나는 그곳을 곧 떠났다. 하루에 두 번 지나는 기차를 잡아 타고 떠났으니 그 마을에 머문 것은 고작 대여섯 시간 정도였을 것이다. 그것도 식당에서 두어 시간은 앉아 있었고, 잠깐 걸었고, 띄엄띄엄 조약돌처럼 놓인 집들을 바라보았으며, 대부분은 역사에 앉아 커피와 콜라를 번갈아 마셨을 뿐이다. 

그럼에도 나는 그 마을에 대해 오래 돌이켜 보았다. 왜 그곳에 더 오래 머물지 않았을까. 식당 주인에게 며칠 묵을 수 있는 호텔을 찾아 달라 했다면 그녀는 흔쾌히 알아봐 주었을 텐데. 그들은 스물아홉 명밖에 되지 않는 작은 마을이라 누구나 환영할 수 있다고 표지판을 세워 두었지만 때로 여행자에게는 스물아홉 명뿐인 마을의 진한 유대감이 오히려 공포스러울 수도 있는 법이다. 나는 아마 그랬을 것이다. 게다가 나는 고작 서른 살이었으니까. 그리고 그때의 여행은, 당장이라도 내 목을 조를 것 같은 외로움을 피해 달아난 것이었으니까.

지금 그 마을에는 누군가 아이를 낳아 서른 명의 주민이 살고 있을까. 아니면 한 사람은 심장발작으로 죽고 또 한 사람은 실종되어 스물일곱 명이 살고 있을까. 이름 모를 새가 신경질적인 울음을 울고 있는 지금 이곳, 내 집에는 십년 후 누가 살게 될까. 
 
소설가 김서령
그 작은 마을을 떠나올 때엔 그런 생각을 했다. 오래 걸어도 좋은 가을이나 봄에, 같이 걸을 수 있는 친구와 함께, 꼭 다시 오겠다고 말이다. 하지만 벌써 십년도 지난 일이라는 것을 알고 나니 문득 어깻죽지가 차분해지고 만다. 어쩌면 영영 그곳에는 가지 못하겠지. 산다는 건 못 다한 일을 깨닫는 날의 연속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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