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김서령의 우주여행] 마지막 소개팅

  • Editor. 김서령
  • 입력 2018.05.02 11:1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미국 중부의 어느 소도시에서 막 낭독회를 끝낸 참이었다. 나는 몹시 피곤했고 그래서 호텔로 돌아오자마자 침대에 발랑 누워 버렸다. 가을이었을 텐데, 낯선 소도시는 추웠고, 차가운 담요 안으로 몸을 게으르게 밀어 넣으며 나는 휴대전화를 열었다. 페이스북 알람이 여러 개 떠 있었다. 후배가 내 이름을 태그한 글을 올려 둔 모양이었다. “언니 언니, 나 어제 술자리에서 어떤 분을 만났는데요. 세상에 얘길 하다 보니 언니랑 소개팅 한 남자였어요!” 나는 화들짝 놀라 몸을 일으켰다. 

내 생애 소개팅은 단 세 번이었다. 첫 번째 소개팅 상대는 나를 만난 지 단 5분 만에 얼굴을 찌푸렸다. “그러니까, 드라마 작가가 아니라 소설가란 거죠?” 따지듯 묻는 남자의 말투가 어이없었지만 나는 말간 표정으로 그렇다고 끄덕였다. “와, 나는 드라마 작가인 줄 알고 나왔는데.” 내가 물었다. “소설가라서 실망하셨어요?” 내가 그렇게 말을 하면 아니라고 고개를 저을 줄 알았다. 하지만 남자는 보무도 당당하게 대답했다. “소설가, 그거 돈 돼요? 아니, 글 좀 쓸 줄 알면 드라마나 쓰지 왜 소설을 써요, 돈도 안 될 텐데? 자본주의에 적응이 안 되신 분이구나?” 나는 세상에 그렇게 예의 없는 남자가 있는 줄 모르고 살아 왔다. 정말이지 기가 막혔다. 두 번째 소개팅 상대는 누구였더라. 소개팅을 끝내고 나와 친구에게 한참을 전화로 하소연을 했으니 첫 번째 못지않았다는 건데 이젠 너무 오래 되어 기억나지 않는다. 세 번째 남자는 기억이 났다. 

나는 친구들과 함께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엘 배를 타고 간 적이 있었다. 스무 시간쯤 걸리는 뱃길이었다. 사람들은 그 먼 러시아까지 배를 타고 가는 분위기를 꽤나 궁금해 했다. 그럴 때면 내가 이렇게 대답해 주었다. “배 이름이 뉴 동춘호야. 그냥 동춘호도 아니고 뉴 동춘호.” 뉴 동춘호라는 이름이 주는 이미지, 그래, 딱 그대로다. 촌스럽기 짝이 없다. 러시아를 오가는 보따리상들로 복작복작한 배 안에서 나와 친구들은 딱히 할 일이 없어 선실에 앉아 마냥 보드카를 마셨다.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취해 있어서 제대로 도시를 둘러보지도 못했다. 턱없이 짧은 일정이었고 우리는 술이 깨자마자 다시 배를 타고 속초항으로 돌아와야 했다. 돌아올 때엔 열여덟 시간쯤 걸렸는데 술이 다 깬 우리는 할 일이 없어 다시 보드카를 마셨다. 정말 어처구니없는 여행이었다.

세 번째 소개팅에서 나는 남자에게 그 얘기를 해 주었다. 처음 보는 남자에게 그딴 얘기를 지껄인 건 남자가 하는 얘기들이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지루했기 때문이었다. 남자는 제 아버지의 직업에 대해 구구절절 늘어놓았고 형과 누나의 전공에 대해서도 한참을 떠들었다. 나는 그런 것들이 하나도 궁금하지 않았다. 급기야 작은아버지와 할아버지까지 등장하기에 나는 그의 입을 좀 막아 보고자 러시아 이야기를 꺼냈던 것이다. 우리는 그날 커피만 달랑 마시고 헤어졌다. 

후배의 말에 나는 그 셋 중 어느 남자일까 몹시 궁금해졌다. 후배가 곧 대답했다. “배 타고 러시아엘 가서 보드카만 마시고 온 여자랑 소개팅을 했다고 하는 거예요. 나도 그런 사람 안다고 했는데, 이것저것 끼워 맞추다 보니까 언니 얘기더라고요.” 러시아에 배를 타고 가서 보드카만 줄곧 마시고 온 것이 신기한 얘깃거리였나 보았다. 사람들 앞에서 무용담 늘어놓듯 ‘그런 여자’ 얘기를 늘어놓은 것을 보니 말이다. 내 얘기를 들을 땐 분명 지루해 보였는데. 

나는 그 이후로 소개팅을 하지 않았다. 평생 남자친구 없이 살더라도 소개팅은 이제 그만 됐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고는 늘 그랬듯 주변의 남자 녀석들과 시시덕거리며 시간을 보내곤 했다. 녀석들은 내 여행담을 지치지도 않고 들어 주었다. 절대 커피 따위는 마시지 않았고, 낙지볶음이나 소라탕을 앞에 두고 소주를 마셨다. 그러면 지나간 여행이 훨씬 더 신나게 떠올랐다. 시간이 뭉텅뭉텅 흘렀어도 녀석들은 여전히 나의 가장 가까운 청중이다. 고맙게도 말이다. 
 
소설가 김서령
1년 반을 이어 온 <트래비> 연재가 이번으로 마지막이다. 마지막 연재를 마지막 소개팅 에피소드로 끝맺게 되었다. 하마터면 나에게도 잊혀질 뻔했던 여행들을 <트래비>로 인해 다시금 기억하게 된 시간들이었다. 내가 잠시 여행을 쉬어도 다른 이들은 계속 여행을 떠나고 또 돌아오겠지. 떠나고 돌아오는 이들의 수트케이스는 아무리 보아도 아름답다. 그리고 애틋하다. 
www.facebook.com/titatita74
저작권자 © 트래비 매거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최신기사
트래비 레터 요즘 여행을 알아서 쏙쏙
구독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