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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스타리카에서, Bean Voyage

  • Editor. 김예지
  • 입력 2018.05.02 1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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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스타리카에서 날아온 사람과 커피를 마셨다. 
그리고 생각했다.
마침내 내게로 오기까지 이 커피는 
그 얼마나 긴긴 여행을 했을까.
 
 
몰랐던 진실을 마주하다

소개팅 자리는 아니지만 먼저 물었다. “승희씨는 전공이 어떻게 돼요?” 코스타리카에서 장장 40시간이 걸려 날아왔다는 그녀에게. “개발경제학이요.” 들어도 잘 모르겠다. “주로 개발도상국의 정치나 인권, 기아, 여성 등 사회 문제에 대해 공부해요.” 어리둥절한 내 반응에 승희씨는 친절하게도 풀어 설명했고 그제야, 아. 연결고리가 보였다. 코스타리카, 커피, 여성, 공정무역.

2014년 12월, 미국에서 대학생활을 하던 승희씨는 방학 단기 프로젝트로 코스타리카로 가게 됐다. 커피농장이 많은 페레즈 젤레돈(Perez Zeledon) 지역에 머물며 그동안 미처 몰랐던 사실을 알게 됐다. “한 잔에 3~4달러 하는 커피 값의 대부분이 커피 농부들에게 돌아가지 않았어요. 원두 1kg당 겨우 3달러 정도 받고 있었으니까요.” 전 커피공정의 70% 정도의 일을 도맡아 함에도 농부들은 정작 최종 수익의 8%도 채 가져가지 못하고 있었다. 게다가 커피농부의 80%인 여성은 남성에 비해 약 39%나 더 적은 수입을 받는 열악한 상황이라고 그녀는 말했다. “언어장벽도 있고 시간적인 여유도 없고요. 커피 값을 제대로 주는 거래처를 찾고 싶어도 막상 그들에겐 쉽지 않은 일이에요.” 다시 미국으로 돌아온 그녀는 몇몇 마음 맞는 친구들과 일을 도모했다. 재단을 설득해 지원금을 받고, 학교 비즈니스 아이디어 대회에 참가해 상금을 탔다. 클라우드 펀딩도 시도했다. 그렇게 1년의 준비기간이 끝나 갈 무렵, 2016년 승희씨는 졸업을 했다. 그리고 떠났다. 코스타리카로.  
 
 
내 머릿속의 지구본

사실 승희씨에겐 그리 생소할 것도 없었다. “어렸을 때부터 여기저기 다니는 게 익숙했어요. 부모님이 워낙 여행을 좋아하셔서요.” 경남 마산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그녀의 기억 속에 주말은 늘 ‘스타렉스’와 함께였다. 넉넉한 밴에 짐을 싣고서 엄마, 아빠, 동생과 훌쩍 떠나곤 했다. “시험기간도 상관없었어요. 엄마는 ‘잘하려면 잘하고 망하려면 망한다’고 하시더라고요(웃음).” 

그러니까 그 커피 씨앗이 자라 새빨간 열매를 맺었을 뿐. 14살, 그녀는 고모가 살고 있는 인도에 갔다. 학교를 다니면서 ‘더’ 어린 동생과 기차여행도 했다. “생각해 보면 진짜 아찔한 순간들이 많았는데 그땐 잘 몰랐어요. 여자애 둘이서 기차여행을, 그것도 인도라니. 지금보다도 더 겁이 없었던 거죠.” 이후 승희씨는 미국으로 대학을 갔다. 그러다 코스타리카를 만났고, 다시 미국으로 돌아온 그녀는 스페인으로 교환학생을 갔다. 학사 졸업 후 코스타리카에서 창업을 했고, 중국 베이징을 오가며 석사 과정을 밟았다. “안 그래도 석사 때문에 영국 런던에도 곧 가게 될 것 같아요.” 지구본이 휙휙 굴러가는 사이 승희씨의 눈은 반짝이고 말은 점점 빨라졌다. “제가 원래 좋아하는 얘기할 때는 이래요(웃음).” 그러고 보니 좀 아까 그녀는 스스로 속이 빤히 들여다보이는 ‘유리 같은 사람’이라고도 했더랬다. 그냥 유리 말고, 강화유리.
 
코스타리카 전통커피 드립퍼인 초레아도르(Chorreador)로 커피를 내리는 모습

카리브해의 푸에르토 비에호(Puerto Viejo) 부근, 플라야 우바(Playa Uva)의 풍경
 
하루는 커피를 따라 흐르고

“도심을 조금만 벗어나도 나무늘보가 있고 원숭이도 다니고요.” 어쨌든 지금 그녀의 좌표는 코스타리카다. “생물다양성으로 세계 최고 수준이라 들었어요. 정부 정책 자체가 환경보호라 자연이 잘 보존돼 있기도 하고요. 카리브해를 끼고 있어서 서퍼들의 성지로도 유명하죠.” 그래도 아직 한국인에게는 낯설다. “그마나 코스타리카를 찾는 한국인들은 커피를 다루는 사람들이더라고요.” 승희씨는 더 많은 한국 여행자들에게 코스타리카를 알리고 싶다. 온유한 날씨, 자극적이지 않은 음식, 스페인어 억양까지 여러모로 소화하기 편한 곳이기에. “중남미는 위험하다는 인식이 있는데 한 번도 그렇게 느낀 적이 없어요. 사람들도 정이 많고요.” 삶의 속도는 체하지 않을 정도로 느릿하다.

덕분에(?) 비영리단체를 등록하는 데만 6개월이 걸렸다. 승희씨는 2017년 코스타리카 산호세(San Jose)에서 본격적으로 ‘Bean Voyage’ 사업을 시작했다. “Bon Voyage에서 영감을 받기도 했지만, 여성농부들과도 관련이 있어요. 그들에게 꿈을 물어보면 ‘커피를 통해 세계여행을 하고 싶다’고 말하곤 했거든요.” 그녀가 하는 일은 트레이드(Trade)보다는 트레이닝(Training)에 가깝다. 여성농부들에게 독립적으로 커피를 생산하고 바이어와 가격을 협상하는 ‘힘’을 길러 주는 것이 사업의 핵심이다. 전문가들로부터 유기농 농업, 로스팅 등 커피가공법과 리더십, 회계 등 경영 세션을 이수한 농부들은 Bean Voyage의 이커머스 플랫폼을 통해 소비자에게 직접 커피를 판매한다. “문제는 커피 수확에서부터 거의 모든 일을 다 여성이 해도, 수익이 정해지는 최종 단계에서 주로 남성이 결정권을 갖고 있다는 거예요. 여성농부들이 커피의 전 프로세스를 관리하고, 그래서 질 좋은 커피를 ‘적절한’ 가격에 판매하도록 돕는 게 저희의 일인 거죠.” 이제 승희씨의 하루가 조금씩 그려진다. 커피농장에서 농부들을 만나고, 교육 프로그램 트레이너를 섭외하고, 직접거래 유통구조를 개발하고, 스폰서십을 맺을 재단을 찾아 나서는. “아, Voyage Program이라고 농장에서 함께 지내면서 커피공정을 경험할 수 있는 여행 프로그램도 있어요.” 하나 더 추가다. 
 
트레이닝 과정 중 커피 향미평가에 대해 배우고 있는 아나 로레나(Ana Lorena) 농부와 그녀의 딸 
한동안 따라수(Tarrazu) 지역 농가에서 지내며 수확을 도왔다. 에리카(Ericka) 농부 가족과 Bean Voyage 스태프들과 함께 찰칵
 
이미 우리에게 내재된 향

수확한 열매는 꽤 근사한 향을 냈다. 현재 Bean Voyage와 함께하는 여성농부의 수는 18명으로, 총 2만5,890잔의 커피가 직접 거래를 통해 판매됐고 농부들의 수익은 기존에 비해 300% 이상 늘었다. “프로그램에 참가했던 농가가 다른 농가를 소개시켜 주고, 그 분이 또 다른 분을 소개시켜 주고 그래요.” 서서히 풍기기 시작한 커피 향은 작년 연말, 보다 강력하게 퍼졌다. ‘2017년 페이스북 사회적기업상(Facebook Social Entrepreneurship Awards 2017)’에서 Bean Voyage는 파이널 네 팀 중 하나로 선정됐고, 결국 우승을 차지했다. “페이스북 광고 크레딧과 마케팅 멘토링을 받게 됐어요. 앞으로 더 많은 농부들의 이야기를 알릴 수 있을 것 같아요!” 

승희씨의 여정은 한창이고, 한창일 테다. 달콤하고 쌉쌀한 맛을 따르는 한. “당분간은 코스타리카와 커피겠지만 다음은 아마도 카카오가 아닐까 싶어요. 아프리카에 갈지도 모를 일이죠.” 뚜렷한 계획은 없지만 편견도 없고, 실수는 해도 두렵진 않다. “커피의 좋은 점은 전 세계 다양한 사람들을 서로 연결해 준다는 거예요. ‘커피 한 잔 하실래요?’라고 했을 때 거부감을 갖는 사람은 잘 없잖아요.” 그곳이 어디든, 최소한의 소통은 존재할 테니까.

승희씨를 만나던 날 마신 커피는 아쉽게도 코스타리카산이 아니었다. “Bean Voyage 사이트에서 원두를 사면 한국에도 배달되나요?” “아직은…. 다음번에 제가 직접 가져다 드릴게요. 아니면 코스타리카로 오시면 되겠다!” 또 그녀를 볼 수 있을지, 정말 코스타리카로 갈 수 있을지 지금으로썬 미지수다. 하지만 그게 언제든, 적어도 우리는 이미 공감대를 품고 있다. 승희씨와 나는 커피를 마신다. 코스타리카의 커피, 농부들의 꿈처럼 세계를 여행하고 있다. 

▶승희씨가 말하는
코스타리카 커피농가에서 살아 보기 tip
 
수확기를 파악하자
커피농가의 일상은 수확기와 비수확기로 구분된다. 11~2월 수확기에 방문하면 빨갛게 익은 커피열매를 볼 수 있고, 직접 농가에서 커피를 수확하는 경험을 할 수 있다. 지역별로 수확기에 차이는 있다. 고도가 낮은 지역은 11월 초쯤 수확을 하기도 하고, 고도가 높은 곳은 12월 말이나 1월에야 수확을 시작한다. 
 
무엇을 하고 싶은지 결정하라
커피 씨앗부터 컵까지 전 커피공정을 따라 여행하고 싶다면, 커피농장에 개별적으로 연락하는 것보다는 커피투어를 전문적으로 하는 곳에 문의하는 것이 편하다. 모든 농장들이 커피 가공시설부터 로스터리까지 갖추고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 지역조합이나 호스텔 등 농가와 파트너십이 있는 곳의 투어를 이용하는 것도 방법이다. 직접 커피열매를 따 보고 싶다면 팜스테이를 추천한다. 우프(WWOOF), 헬프엑스(HelpX), 워크어웨이(Workaway) 등 플랫폼에서 정보를 확인할 수 있다.
우프코리아 wwoofkorea.org
헬프엑스 www.helpx.net
워크어웨이 www.workaway.info
 
간단하게라도 스페인어 배우기
소규모 커피농가에는 영어를 사용하는 사람이 거의 없어 간단한 스페인어 표현이라도 익혀 가는 것이 도움이 된다. 팜스테이에서 현지인들과 지내다 보면 절로 스페인어가 쑥쑥 늘기도 한다.
 
빈틈없이 꽁꽁 싸매기
커피농가에서 생활하기 위해서는 긴 소매와 긴 바지, 손수건, 모자, 모기 퇴치제는 필수다. 산 모기나 벌레에 물리면 길게는 2주가 넘도록 간지러움이 가시지 않아 팔다리가 퉁퉁 붓는다.

 
글 김예지 기자  인터뷰사진 강화송 인턴기자  사진제공 탁승희
 
*탁승희는 코스타리카 비영리단체 ‘Bean Voyage’를 운영하고 있다. 커피농가의 여성농부들이 보다 제대로 된 보상을 받고 일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을 목표로. 사업가 이전에 여행가 기질이 탁월하다. 한국에서 인도, 미국, 코스타리카, 스페인, 중국, 영국까지 여러 대륙을 누벼 온 그녀는 언젠가, 아프리카를 넘보고 있다. 
홈페이지 beanvoyage.com  
페이스북 beanvoy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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