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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소보, 미지의 세계에서 마주한 순간들

  • Editor. 노중훈
  • 입력 2018.08.07 14:51
  • 수정 2018.08.09 15:5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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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로마의 유적이 발굴된 울피아나. 주변 풍경이 목가적이다
고대 로마의 유적이 발굴된 울피아나. 주변 풍경이 목가적이다

 

코소보와 알바니아 출장 의뢰가 들어왔을 때 농담하는 줄 알았다. 
크로아티아와 슬로베니아를 가 봤으니 발칸반도가 아주 낯설지는 않았지만 두 나라에 관해서는 ‘내전’, ‘인종 청소’ 같은 무시무시한 단어 이외에는 아는 것이 전혀 없었다. 마치 듣도 보도 못한 미지의 생명체를 상대하는 것 같았다. 마른침을 삼키며 터키 이스탄불행 비행기에 올랐다.
 

누구나 한 번쯤 쳐다보게 되는 독특한 외관의 국립도서관
누구나 한 번쯤 쳐다보게 되는 독특한 외관의 국립도서관

이스탄불 공항 CIP 라운지에서 맥주와 와인으로 야금야금 시간을 죽이고 있는데 코소보(Kosovo)행 터키항공 TK1017 편이 한 시간가량 지연 출발한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휴대폰으로 확인한 코소보 수도 프리슈티나(Priština)의 날씨는 뇌우였다. 인천공항에서부터 동행한 레옹 말라조구(Leon Malazogu) 주일 코소보 대사가 “5월이 코소보 여행의 최적기”라고 분명히 말했는데…. 70분을 날아 프리슈티나 아뎀 야사리(Priština Adem Jashari) 국제공항에 도착했다.

공항을 빠져나오니 기다리고 있는 것은 맑고 공활한 봄 하늘이었다. 천둥과 번개를 동반한 비의 흔적은 어디서도 찾을 수 없었다. 알고 보니 프리슈티나 공항의 짙은 안개 때문에 이륙이 늦어졌던 것이다. 그제야 레옹 대사의 말에 신뢰가 갔다. 일행을 맞아 준 영민한 현지 가이드 베킴(Bekim)도 “5~6월이 코소보를 여행하기에 가장 좋은 시기”라며 재차 확인해 주었다. 공항에서 프리슈티나 시내로 이동하는 도중에도 날씨 이야기는 이어졌다. 여름에는 기온이 35도까지 치솟지만, 습도가 낮아 견디기 수월하다는 설명. 하지만 겨울이 찾아오면 영하 20도는 기본이고 40도까지 내려가는 날이 있을 만큼 일기가 엄혹하다. 게다가 눈도 많이 온다는데, 바다 없는 나라에 눈은 굉장히 소중한 존재다.

세르비아로부터의 독립을 기념해 세워진 뉴본 조형물
세르비아로부터의 독립을 기념해 세워진 뉴본 조형물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의 동상. 독립을 지지하고 도시 재건을 도왔다는 이유로 코소보 사람들에게 큰 사랑을 받는다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의 동상. 독립을 지지하고 도시 재건을 도왔다는 이유로 코소보 사람들에게 큰 사랑을 받는다

 

●Priština 프리슈티나

비로소 알게 된 것들

한국 시간으로 지난 7월23일 오전 3시에 열린 2018 러시아 월드컵 E조 경기에서 스위스는 세르비아에 2:1 뒤집기 승을 거뒀다. 정작 경기 승패보다 더 큰 화제를 모은 건 득점을 올린 스위스의 ‘제르단 샤키리’와 ‘그라니트 자카’의 세리머니였다. 두 선수는 상대편 그물을 흔들자마자 미리 약속이나 한 듯 두 개의 엄지손가락을 엇걸어 독수리가 날갯짓하는 모양을 연출했다.

사실 이 ‘독수리 세리머니’에는 발칸반도의 슬픈 역사가 응축돼 있다. 머리가 둘 달린 독수리는 알바니아의 상징으로 국기에도 등장하는데, 두 선수 모두 코소보-알바니아계 혈통이다. 압축해서 설명하자면 세르비아의 자치주였던 코소보의 알바니아계 반군이 독립을 요구하자 이를 반대했던 세르비아와 코소보 내 세르비아계는 1998년 끔찍한 인종 청소를 자행했다. 이듬해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군사 개입이 이뤄졌고, 결국 세르비아는 항복하기에 이른다.

자카의 아버지는 코소보 독립을 지지했다는 이유로 옛 유고연방의 정치범 수용소에서 3년 반이나 지냈으며, 코소보에서 태어난 샤키리는 가족을 따라 스위스로 탈출, 난민 생활을 견뎌야 했다. 샤키리의 축구화 한쪽에는 스위스 국기가, 다른 쪽에는 코소보 국기가 새겨져 있다. 어쨌든 알바니아계 주민들이 약 90%를 차지하는 코소보는 2008년 2월 세르비아로부터 독립을 선언했으나 세르비아를 비롯한 일부 국가는 여전히 이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참고로 한국은 같은 해 3월 코소보를 주권 독립국가로 공식 승인했다.

프리슈티나 시내에서 우연히 만난 거리의 악사
프리슈티나 시내에서 우연히 만난 거리의 악사

 

종전 후 20년이 채 지나지 않았고, 독립국가로서 지위를 인정받은 지도 겨우 10년이 된 나라, 코소보. 내전의 이미지가 워낙 강해서일까. 코소보에 간다고 주변에 알렸을 때 위험하지 않으냐는 걱정이 폭포수처럼 쏟아졌다. 막상 대면한 코소보의 도시와 마을들은 안전하고 평화로워 보였다. 사람들은 친절했고, 밤늦게까지 카페와 펍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었다. “We never say don’t go there”라는 가이드 베킴의 말에는 코소보 치안 환경에 대한 자부심이 녹아 있었다. 물론 단 며칠간의 체류로 ‘풍경의 안쪽’까지 다 살펴볼 수는 없었지만.

프리슈티나 중심가에는 초대형 영어 알파벳을 나란히 세운 뉴본(Newborn) 조형물이 설치돼 있다. 말 그대로 세르비아로부터 독립해 새로 태어났다는 의미다. 현재는 스펠링 ‘B’와 ‘R’ 자리에 숫자 10이 들어서 있는데, 이는 독립 선언 10주년에 맞춰 새롭게 디자인한 것이다. 새로 태어난 나라는 젊은 나라이기도 하다. 실제 인구의 70% 이상이 35세 이하로 국민들이 매우 젊다. 다만 청년 실업이란 심각한 문제점도 안고 있다. 코소보 정부는 실업률이 25%라고 밝혔지만 실제는 45%에 육박한다는 것이 정설이다.

코소보인들의 커피 사랑은 유별나다. 도시마다 카페도 엄청나게 많다
코소보인들의 커피 사랑은 유별나다. 도시마다 카페도 엄청나게 많다

 

프리슈티나는 종교에 대한 편견을 깨기 좋은 곳이다. 코소보 국민들의 약 90%, 그러니까 거의 대부분은 이슬람을 믿는다. 가톨릭 신도는 3% 남짓. 그런데, 도시 한복판에는 10년의 공기를 들여 지난해 완공한 마더 테레사 성당이 우뚝하다. 테레사 수녀는 현재 마케도니아 공화국의 수도인 스코페 태생이지만 그의 어머니가 바로 알바니아인이다. 때문에 코소보와 알바니아에서는 테레사 수녀를 국모로 여긴다.

국립박물관에는 테레사 수녀의 얼굴을 스테이플러의 침을 이용해 만든 대형 미술품이 걸려 있기도 하다. 성당 내부에서 잠적한 시간을 보내는 것도 좋지만 1유로를 내면 엘리베이터를 타고 시계탑 꼭대기에 오를 수 있다. 도심의 모습을 한눈에 굽어 살필 수 있는데, 몇몇 건물들이 멀리서도 존재감을 발휘한다. 그중 철사로 칭칭 동여맨 듯한 독특한 외관의 건물은 국립도서관이다. 1982년에 첫발을 뗀, 프리슈티나에서 무엇보다 눈에 띄는 현대적 건축물이다. 400석 규모의 열람실과 2만여 권의 장서를 구비하고 있다. 도서관 옆에는 세르비아 정교회 건물이 방치된 채 적막한 세월을 경험하고 있으며, 뒤쪽으로는 창의성이 돋보이는 설치미술 작품을 여럿 보유한 국립미술관이 버티고 있다.

프리슈티나 외곽에서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 그라차니차(Gracanica) 수도원을 빼놓을 수 없다. 1321년에 건립됐으며, 후기 비잔틴 양식의 정점을 보여 준다는 평가를 받는다. 사진 촬영이 엄격하게 금지된 내부에 들어서면 자연스레 벽화에 눈길을 빼앗기고, 첩첩이 쌓여 있는 밀도 높은 공기에 압도당해 절로 말수가 줄어든다.

프레카즈에는 전쟁의 참상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수십 기의 무덤이 있다
프레카즈에는 전쟁의 참상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수십 기의 무덤이 있다

 

●Prekaz 프레카즈

적도 재워 준다


이제 프리슈티나를 벗어날 시간. 코소보 해방 운동의 상징이자 독립군 최고 지도자 아뎀 야사리의 집이 있던 마을 프레카즈(Prekaz)에서 마주한 건 몸서리치는 전쟁의 비극과 참혹함이었다. 탱크 포격으로 골조만 스산하게 남은 주택과 출생 연도는 제각각이나 ‘1998’이란 동일한 사망 연도가 적혀 있는 수십 기의 무덤들. 1992년에 태어나 짧은 생을 마감한 어느 아이의 묘석 앞에서 그만 마음이 갈 곳을 잃었다. 말끔하게 정비된 묘역이 역설적이게도 더 큰 슬픔을 드러내는 듯했다. 프레카즈로 건너오기 전 잠시 바라봤던, 전쟁 중 강간당한 수많은 여성들을 기리기 위한 조형물 헤로이낫 메모리얼(Heroinat’ Memorial)도 다시는 반복되지 말아야 할 끔찍한 역사를 무겁게 증언한다.

전쟁 도중 탱크의 공습을 받아 골조만 남은 건물의 모습
전쟁 도중 탱크의 공습을 받아 골조만 남은 건물의 모습

 

코소보 서부의 페야(Peja)로 방향을 잡았다. 1만5,000여 명의 인구가 거주하는, 코소보에서 세 번째로 큰 도시다. 산이 깊고, 깊은 산에서 발원한 물맛이 좋으며, 좋은 물로 빚은 맥주가 맛있기로 유명하다. 에라ERA라는 이름의, 음식 맛보다 전망이 더 빼어난 레스토랑에서 페야 생맥주를 청해 마셨는데 깔끔하지만 살짝 싱겁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2013년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루고바(Rugova) 협곡을 찾았다. 총 길이 650m로 코소보에서 제일 긴 집라인이 기다리고 있었다.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집라인 전문 가이드는 장비 착용을 도와주며 “주저함 이외에 걱정할 건 하나도 없다”고 단호하게 말했지만 끝내 주저함이 발목을 잡았다. 험하고 좁은 골짜기를 횡단하는 한 가닥 줄에 몸을 의탁한 사람들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오금이 저렸다. 지상에 두 발을 딛고 있는 사람 입장에서는 허공으로의 질주를 감행한 ‘인간 새’의 시야와 감흥을 헤아릴 방법이 없었다. 금세 날이 끄느름해졌고 급작스레 장대비가 내렸다. 도시를 감싼 녹음이 더욱 짙어졌다. 세르비아 정교회의 총주교좌가 있던 페야 수도원에서 잠깐 머문 후 호텔로 이동, 여장을 풀었다.

전통 가옥 쿨라에서 노래와 연주에 맞춰 춤을 추는 집주인 할아버지. 코소보에는 손님을 환대하는 정서가 강하게 남아 있다
전통 가옥 쿨라에서 노래와 연주에 맞춰 춤을 추는 집주인 할아버지. 코소보에는 손님을 환대하는 정서가 강하게 남아 있다

 

코소보에는 ‘적도 재워 준다’는 말이 있다. 그만큼 내 집 찾아온 사람을 기꺼이 맞이하는 환대의 정서가 강하다. 심지어 이런 표현도 있다. ‘내 집의 소유주는 첫째가 신이고, 둘째가 손님이며, 셋째가 나 자신이다.’ 페야로부터 17km 정도 떨어진 쥬니크(Junik). 이곳에 터를 마련한 알바니아 전통 가옥 쿨라(Kulla)에서 사람 좋아하는 코소보인들의 정(情)과 흥(興)을 직접 확인할 수 있었다.

집에 들어서니 한쪽에서 팔순의 할머니가 허리를 굽힌 채 전통 음식 플리Fli를 옛 방식대로 굽고 있었다. 겹겹이 쌓인 페이스트리 형태의 플리는 보통 크림이나 요거트 등과 함께 먹는다. 옥수숫가루로 만드는 빵인 포가체(Pogace)도 코소보에서 흔하게 접할 수 있는 음식이다. 쿨라에서는 좌식 생활을 한다. 음식도 앉아서 먹는다. 커다란 상에 빙 둘러앉자 정성껏 준비한 음식이 줄줄이 상에 올랐다. 코소보 와인과 전통 증류주도 곁들여졌다.

방 한쪽에서는 세 명의 남성이 전통 악기를 연주하며 목청껏 노래를 불렀다. 양모로 만든 전통 모자 플리스(Plis)를 쓴 집주인 주메르 크라니시키 할아버지가 흥에 겨워 춤을 추기 시작했다. 밤이 이슥해도 노래와 연주와 춤은 도통 끝날 줄을 몰랐다. 가까스로 흥이 잦아들고 어느덧 헤어질 시간. 할아버지가 문 앞까지 나와 손님들을 배웅했다. 또 오라는 그의 말에서 진심이 느껴졌다. 전쟁 통에도 용케 살아남은 집과 그 집을 오랫동안 지키고 있는 할아버지의 인자한 미소. 콧날이 시큰했다.

손님 접대를 위해 전통 음식 플리를 만들고 있는 할머니
손님 접대를 위해 전통 음식 플리를 만들고 있는 할머니

 

이튿날 아침, 화창한 날씨가 아까워 체크아웃을 서둘러 끝내고 호텔 부근 산책에 나섰다. 이곳저곳을 어슬렁거리다 ‘Since 1994’가 쓰인 디오 커피숍(Dio Coffee Shop)에 들어가 더블 에스프레소를 주문했다. 가격은 1유로. 카페에서는 오전 8시와 어울리지 않는 끈적끈적한 음악이 흘러나왔고, 차양에서는 어젯밤 내린 비가 뚝뚝 떨어졌다. 테라스에 앉은 두 명의 남자가 마침 카페 앞을 지나가던 여자를 알은체했다.

코소보는 커피를 생산하지 않는다. 그런데, 코소보 사람들의 커피 사랑은 유별나고 남다르다. 카페도 엄청나게 많고, 이른 아침부터 문을 연다. 사람들이 무시로 들러 커피 한잔의 여유를 즐길 뿐만 아니라 비즈니스 미팅을 카페에서 갖는 경우도 빈번하다. 가격이 저렴해서 0.5유로만 지불하면 싱글 에스프레소를 마실 수 있다. 그야말로 ‘Cheap & Nice’다. 코소보에서 만난 여러 사람에게 묻고 듣기를 종합한 결과, 카페 창업이 비교적 용이하단다. 카페 사장들 가운데 젊은이가 많은 것도 그런 연유에서다. 도시를 떠나기 전 전통 시장도 스치듯 구경했는데, 무려 200여 년 동안 대물림으로 가위와 칼 등을 제작·판매하는 상점이 인상적이었다.

브레조비차의 너른 들판에서 편안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 사람들
브레조비차의 너른 들판에서 편안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 사람들

 

●Gjakova 자코바 & Prizren 프리즈렌

공존과 존중의 도시


자코바(Gjakova)는 블레리나 제이 둘라(Blerina J. Dula)의 고향이다. ‘B’라는 애칭으로 통하는 그녀는 코소보에서의 여정 내내 일종의 여행 자문역으로 함께했는데, 해박한 지식과 탁월한 언어 구사 능력 그리고 거침없는 친화력으로 큰 사랑을 받았다. 모든 도시가 그렇지만 자코바에도 밝은 면과 어두운 면이 혼재한다. 예로부터 뛰어난 예술가들을 많이 배출했지만 경제적으로는 가장 낙후된 곳으로 꼽힌다. 지역 전체가 민틋해서 자전거 타기 좋은 도시로 알려져 있기도 하다.

자코바에는 수십 개의 카페가 밀집한 거리가 있다. 수많은 노천 테이블과 의자들이 도열한 모습 자체가 장관이다. 어느 카페의 기둥에는 ‘Stop Enjoy Your Life’라고 쓰인 팔각형의 작은 간판이 달려 있었다. 카페 겸 레스토랑인 하니(Hani)는 400여 년 전 지어진, 자코바 최고령 건물에 깃들어 있다. 역사가 긴 만큼 곡절도 많아서 2차 세계대전 당시 감옥으로 사용된 적도 있다. 요청한 터키식 커피를 한 모금 마시니 단맛과 쓴맛이 동시에 묻어났다. 얇은 파이 반죽 사이에 견과류를 넣고 시럽을 부어 만든, 터키의 국민 디저트 바클라바를 곁들여 먹으니 달콤함이 배가됐다.

양모로 만든 모자 플리스를 쓰고 있는 자코바 주민. 흰색은 설산을 상징한다고 한다
양모로 만든 모자 플리스를 쓰고 있는 자코바 주민. 흰색은 설산을 상징한다고 한다
자코바 하두미 모스크. 규모가 크지는 않지만 내부는 상당히 정교하고 화려하다
자코바 하두미 모스크. 규모가 크지는 않지만 내부는 상당히 정교하고 화려하다

실제 인구 200만명의 프리슈티나가 코소보 으뜸의 도시라면 인구 20만명의 프리즈렌(Prizren)은 버금의 도시다. 2,000년 역사를 지닌 코소보의 ‘문화 수도’로 전쟁의 포화 속에서도 피해를 거의 입지 않아 고도(古都)로서의 풍모를 잘 간직하고 있다. 프리즈렌은 다른 것을 밀어내는 뺄셈의 도시가 아니라 다른 것들이 공존하고 다른 것을 존중하는 도시다. 일단 공용어만 해도 알바니아어, 세르비아어, 터키어, 보스니아어 등 네 가지에 달한다. 세르비아 정교회 건물과 이슬람 모스크와 터키식 목욕탕인 함만이 서로 멀지 않은 거리에 둥지를 틀고 있다.

도시의 전망대라고 할 수 있는 프리즈렌성은 11세기 비잔틴제국에 의해 지어졌고, 도시를 가로지르는 강을 건너지르는 석교는 베네치아공화국의 영향을 받아 만들어졌다. 강변 카페에서 만나 커피 한 잔을 나눈 프리즈렌의 젊은 시장이 “사진 한 장에 다양한 종교 건축물을 담을 수 있다”라고 한 것은 허언이 아니었다. 프리즈렌에서 태어나 연어처럼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고위직의 부정부패가 문제”라는 의미심장한 말을 남기기도 했다.

다양한 문화가 공존하는 도시, 프리즈렌
다양한 문화가 공존하는 도시, 프리즈렌

 

모처럼 주어진 자유 시간. 사전 정보 없이 감으로 골라잡은 한 식당에서 1.5유로짜리 치즈버거와 2.5유로짜리 소시지, 1유로짜리 맥주를 사 먹었다. 요즘 유행하는 말처럼 ‘가성비’가 훌륭했다. 저녁식사 자리에서는 국제 다큐멘터리 & 단편영화제인 ‘도쿠페스트(Dokufest)’의 관계자들을 만났다. 영화제 사무국장은 “해마다 8월, 아흐레간 열리는 코소보 최대의 문화 이벤트로 올해는 65개국의 작품이 경쟁과 비경쟁 부분에 참가한다”고 전했다. 칼라야(Kalaja)로 불리는 프리즈렌성과 도시를 관통하는 비스트리차(Bistrica)강에서 영화가 상영되는 순간을 머릿속에 그려 봤다. 언젠가 코소보를 다시 방문하게 된다면 이 ‘한여름 밤의 꿈’ 때문일 거라 생각했다. 더불어 “코소보는 아직 고립된 나라다. 영화제는 다른 세계를 연결해 주는 창”이란 영화제 예술 감독의 말이 오래도록 귓가를 맴돌았다.

다음날 아침, 페야에서와 마찬가지로 호텔 부근의 한 카페에 들렀다. 상호는 알바니아어로 ‘목’이란 뜻의 카파(Qafa). 볼륨은 작지만 요란한 화면의 뮤직비디오가 브라운관을 통해 상영되는 카페 안에는 아저씨 몇 명이 따로 또 같이 모여 있었다. 무연한 얼굴로 허공을 응시하는 아저씨, 일을 마치고 커피로 한숨 돌리는 아저씨, 아이를 학교까지 데려다주기 위해 막 일어나려는 아저씨 등등. 세상에 원빈 같은 아저씨가 몇이나 되겠나. 진한 더블 에스프레소를 한입에 털어 넣고 아침밥을 먹기 위해 호텔로 되돌아왔다. 호텔 앞에서는 날품 인부들이 아침부터 공사판을 뒹굴었다. 아저씨들이 몸으로 밀고 나가는 숭고한 시간이었다.

화사한 드레스를 입은 채 맵시를 뽐내고 있는 프리즈렌의 여성들
화사한 드레스를 입은 채 맵시를 뽐내고 있는 프리즈렌의 여성들
코소보를 대표하는 휴양지 가운데 하나인 브레조비차
코소보를 대표하는 휴양지 가운데 하나인 브레조비차

 

알바니아로 넘어가기 전 마지막으로 브레조비차(Brezovica)에서 유유자적한 시간을 보냈다. 만년설을 이고 있는 산봉우리와 시원스레 펼쳐진 들판, 청신한 숲이 어우러진 코소보의 대표적 휴양지 중 한 곳이다. 스키 리조트도 있다. 해발 1,100m 지점에 위치한 식당에서 언제 또 코소보 음식을 먹어 보겠냐 하는 심정으로 배가 동글어지도록 먹어댔다. 코소보에서의 한 끼니 한 끼니가 그랬듯이 이번에도 테이블에 놓인 요리들 전부가 신선하기 짝이 없었다. 농업은 이 나라에서 두 번째로 중요한 산업이다. 물론 강에서 잡은 송어의 맛도 흐뭇한 미소를 짓게 했다. 산에서 내려와 도시로 접어든 전용 차량이 코소보-알바니아 국경을 향해 나아갔다. 또 다른 미지의 세계와 조우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브레조비차에는 별장과 자연 친화적 숙박 시설이 몰려 있다
브레조비차에는 별장과 자연 친화적 숙박 시설이 몰려 있다
농업이 주요 산업인 코소보에서는 언제든 신선한 채소를 먹을 수 있다
농업이 주요 산업인 코소보에서는 언제든 신선한 채소를 먹을 수 있다

 

▶travel  info

AIRLINE
한국과 코소보를 연결하는 직항편은 없고 주로 이스탄불 경유편을 이용한다. 터키항공은 인천-이스탄불 구간의 비행편을 주 11회 운영한다. 비행시간 약 11시간 10분. 이스탄불에서 코소보의 수도인 프리슈티나까지는 주 14회 직항편을 운영 중이다. 비행시간 약 1시간 10분. 프리슈티나 공항에서 시내까지는 약 19km로 택시 이용시 15유로 정도. 


weather
3~4월에 비가 많이 내린다. 여름에는 기온이 껑충 뛰지만 습도가 높지 않아 그늘에 들어가면 시원하다. 1~2월이 가장 추운데, 적설량은 보통 12월에 최고치를 기록한다. 5월과 6월이 여행 최적기다.


WHAT  TO  DO
프리슈티나 시내에서 약 20km 떨어져 있는 가디메(Gadime) 지역에는 코소보에서 가장 보존 상태가 좋은 대리석 동굴이 있으며 울피아나(Ulpiana)에서는 고대 로마 시절 건축물들의 흔적을 엿볼 수 있다. 국민의 90%가 이슬람 신자인 코소보에서는 어딜 가나 모스크를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하지만 전쟁으로 218개의 모스크가 파괴되기도 했다. 자코바에는 하두미 모스크가 있다.

 

FOOD
이슬람 문화권이라 돼지고기 대신 쇠고기와 양고기, 생선을 많이 먹는다. 요거트와 치즈는 빠짐없이 식탁에 오른다. 농업 국가답게 채소의 선도가 도드라진다. 개인적으로는 간 고기를 포도 잎으로 감싼 요리인 사르마(Sarma)가 입에 잘 맞았다. 라호벡(Rahovec)은 포도 재배와 와인 생산이 활발한 지역이다. 스톤 캐슬(www.stonecastlewine.com)이 대표적 와이너리다. 와인 이외에 브랜디도 생산한다.

 

HOTEL
5성급의 스위스 다이아몬드 호텔(www.sdhprishtina.com)은 시설과 서비스 면에서 프리슈티나 최고의 호텔로 일컬어진다. 주요 명소로의 접근성도 좋다. 페야 여행시에는 중심부에 위치한 호텔 듀카지니(www.hoteldukagjini.com)를 추천할 만하다.

 

글·사진 노중훈 에디터 천소현 기자
취재협조 터키항공 02 6022 4270 www.turkishairlines.com, 주일 코소보대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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