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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지금’을 사는 글 광대 박민우

  • Editor. 천소현
  • 입력 2018.10.02 10:4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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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민우의 여행기는 지질하고 비루하다. 당황스러울 만큼 솔직하기도 하다. 자칭 ‘글 광대’의 연희는 종이를 무대로 펼쳐진다. 
책을 펼쳤다면 이미 그의 주술에 걸려든 것이다. 당신은 곧 그의 팬이 된다. 곧 여행도 떠나게 될 터이고. 

 

●이렇게 즐거울 수도 있구나!  

“언니, 나 이 작가님 초청 강연 한 번만 해줘. 소~원이야!” 
여행 좋아하는 후배의 간청에서 그의 이름을 처음 들었다. 여행작가 박민우. <1만 시간 동안의 남미> 표지에 그의 얼굴이 있었다. 이상하게 낯이 익었지만 딱히 떠오르는 건 없었다. 일다 SNS를 연결했다. 몇 달이 흘러 방콕에 거주하던 그가 한국에 왔다기에 메시지를 보냈다. 그 사이 회복된 기억도 하나 있었다. “오빠! 저 기억하세요? 같은 성당 다녔던 소현인데요.” “어? 아! 알지!” 항상 바빠보였고 사람좋은 웃음을 짓던 스무 살 언저리의 청년. 내 기억이 그랬다. 25년 후 그는 여행 덕후들 사이에 인기 작가가 되어 있었다. 그 사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문장 하나에 목숨을 거는 작가가 될 생각은 없었다. 방송국 PD가 되고 싶었는데, 국문학 전공이 유리하다고 해서 선택했을 뿐. 그래도 재학 중에 광고 공모전, 시나리오작가협회 공모전 등에 입상했고, 여행잡지사에서 아르바이트를 한 경력으로 <유행통신>이라는 잡지의 기자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하지만 번번이 연예인 섭외에 ‘물을 먹다(특종을 놓치다)’가 스트레스로 원형탈모를 얻고 말았다. ‘이렇게 파괴되는가’ 싶은 절망감에 모두 접고 2001년 런던으로 어학연수를 떠났다. 여행은 좋았지만 영국 영어는 적응이 안 됐다. 1년 연수를 마치고 히스로공항으로 가던 날 처음으로, 지하철 방송에서 매일 들었던 “Mind the gap(틈 조심하세요)”이라는 말이 제대로 들렸다고. 돌아와서도 탈모는 여전해서 뒤통수에 손바닥만 한 한반도 지도가 생겼다. 자유기고가를 했지만 벌이는 불안정했고, 자괴감과 좌절감이 떨쳐지지 않았다. 


“진짜 심각했어. 탈모 때문에 죽고 싶다는 사람들이 이해가 되거든. 근데 죽기 전에 마추픽추나 이구아수 폭포를 본 사람이 얼마나 될까 싶더라고. 그래서 남미에 갔어. 한국에서 가장 먼 곳으로.”


여행은 1년에서 14개월로 연장됐고, ‘좋으면 얼마나 좋겠어?’가 ‘이렇게까지 즐거울 수 있구나’로 바뀌었다. 책을 쓰게 된 이유도 그 여행의 희열이 가시지 않아서였다. 이왕 쓰는 김에 쓰고 싶은 만큼 다 써서 3권 분량의 책이 나왔다. <1만 시간 동안의 남미>였다. 반응이 컸다. 인터뷰도 하고 방송도 출연하고, 후속 여행으로 다시 3권짜리 여행기 <1만 시간 동안의 아시아>를 썼다. 내친 김에 여행자 인터뷰집도 냈고, 자전적 소설까지 썼지만 이것만은 독자들로부터 외면을 당했다. 그래서 다시 인도 파키스탄 여행기로 돌아왔다. 책이 나오면 반짝 관심이 쏠리지만 실상은 7년째 방콕에 거주하면서 통장 잔액 100만원을 못 넘기는 가난한 작가일 뿐이다. 뉴욕 여행의 경비를 마련하기 위해 한국에 왔고, 덕분에 25년 만에 재회가 이뤄진 것. “그래서 탈모는 다 나았어요?” 그가 모자를 냉큼 벗었다. “여기 봐, 아직 흔적이 좀 남았어.” “뭐 멀쩡하네!”
 

●징글맞게 솔직한 
글 광대의 자폭 수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인터뷰를 앞두고 그의 책을 읽었다. 아는 사람 책을 읽는 것만큼 오글거리는 일이 없는데, 이번엔 그 이상이었다. 노련한 여행작가의 모습은 1도 없고, 무덤까지 비밀로 가지고 갈 만한 이야기들을 나불나불 잘도 풀어놓는 데다가, 수다가 끝이 없다. 과테말라 세묵 참페이(Semuc Champey)에서 튜빙을 하다가 구조되어 사람들 앞에서 소변을 싼 이야기라니. 자칭 ‘바보 여행자’이자 ‘찌질의 왕’임을 스스로 까발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 책을 놓지 못해서 화장실까지 들고 다녔다. 과연 안 읽은 사람은 있어도 한 권만 읽은 사람은 없다는 박민우의 여행기였다. 그래도 궁금했다. 왜 그렇게까지 자폭하는 것인가. 이쯤 되면 ‘지식 노동’이 아니라 ‘감정 노동’으로 보였다. 


“소심해서 그런 거야. 기대했다가 나중에 실망하는 것보다는, 지금 들켜 버려야지! 하는 마음. 솔직해야 깊이가 생기고, 깊이가 있어야 감동을 줄 수 있으니까. 글을 쓸 때는 정말 영혼을 썰어서 쓰지.”


물론 독자들의 호불호는 갈린다. 열 권의 책을 냈지만 판매 부수는 10만권을 넘지 않으니 베스트셀러 작가라고 하기도 애매하다. 하지만 그의 글은 사람들을 움직이게 한다. 용기를 얻어 여행을 하게 됐다는 사람부터, 영감을 얻어 


여행업을 하게 되었다는 사람들까지. 감동을 주는 일도 어렵지만, 용기와 영감을 주는 일은 더 어려운 것이 아닌가. 


그래도 팬들은 좋아하는 작가에게 기대하는 바가 크다. 지난여름 의욕적으로 100일간의 구직활동을 하는 동안 독자들에게 쓴소리를 들었다. ‘지나치게 솔직해서 너무나 좋았던 글쟁이 박민우가 장사꾼이 돼 버렸다’는 SNS 댓글이었다. 급브레이크를 밟았고, 작가로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한 고민까지 미끄러져 갔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다른 출구가 없었다. 몸부림을 쳐서라도 기회를 얻지 않으면 연봉 1,000만원 안팎의 작가가 여행도 하고, 글을 쓰며 살아갈 방법이 없다. 독자의 응원은 힘이 되지만, 돈이 되지는 않는다. 부럽다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작가는 되묻는다. ‘나처럼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있느냐’고. 사실 방콕 생활은 다운사이징을 위한 방편이다. 태국인 친구가 세 없이 빌려 주는 방 덕분에 아껴서 한 달 생활비 30만원이면 그럭저럭 살 수 있다. 한국에 있어야 강연이나 방송 섭외가 많아질 수도 있지만, 아닐 수도 있지 않은가. ‘만약’이라는 감옥에 살지 않기로 했다. 자유와 가난이 세트로 다니는 게 아쉬울 뿐. 다행히 태국은 그가 기꺼이 여생을 살고 싶은 나라다. 

 

●불안하지 않느냐고 
묻는 사람들에게

다음 만남까지 또 사반세기가 걸리지는 않겠지만 ‘계획’ 같은 걸 물어 두어야 할 것 같았다.  9월 중순부터는 뉴욕과 샌프란시스코 등을 여행할 계획이고, 기회가 되면 세계 곳곳에서 한 달 살이 여행을 이어 가고 싶다. 다음 책은 11월 예정이고, 일종의 ‘먹방’이다. 거주지인 방콕의 레스토랑 소개인데, 70개의 맛집과 30개의 맛을 더해 100개의 리스트가 나왔다. 쌀국수 마니아이자 요리하기를 꽤 즐기는 편이라 언젠가 방콕 현지에서 자신의 이름을 건 데이투어 프로그램을 진행해 보고 싶다. 


사실 독자들에게는 목적지도 주제도 중요하지 않다. 그저 박민우의 다음 글을 기다릴 뿐이니까. 그 갈증을 해갈시켜 주는 작은 실험도 해 봤다. 월 1만원의 구독료를 받고 매일 신선한 글을 배달해 주는 유료 메일링 서비스, 일명 ‘24시간 동안의 박민우’를 8월 한 달 동안 진행했다. 이슬아 작가의 ‘월간 이슬아’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 반응이 나쁘지 않아 뉴욕 여행을 시작할 때 다시 재개해 볼 생각이다. 통장 잔고가 바닥나지 않는 생계 구조만 만들어져도 좋겠다. 


그 밖에는 딱히 계량적인 삶의 목표가 없다. 가장 많이 듣는 질문 중 하나가 ‘불안하지 않느냐’는 것. 블로그에 올린 그의 대답은 꽤 장황한데, 결론은 명쾌하다. ‘나는 내가 책임져야 하는 이 상황만큼 불안합니다. 더 불안하거나, 더 많이 불안하지 않습니다.’ 불확실한 것에 온 생애를 걸고 살아가는 것보다 우선은 ‘오늘 하루만 잘 살자’는 것이 이른바 그의 귀납적 인생관이다. 하긴 우리의 재회 역시 지난 25년 동안에 한 번도 예측된 적이 없었으니. 

 

“암튼 잘 다녀와요. 우리는 또 만나게 되겠지. 탈모 조심하시고.” 그가 견딜 수 있는 만큼의 스트레스만 받고 살기를, 그래서 징글맞게 솔직한 글로 자꾸만 다시 돌아오기를! 그렇게 ‘지금 이 순간’ 그를 응원할 수밖에. 

여행작가 박민우
1973년생으로 국문학을 전공하고 잡지사에서 일했다. 지금은 여행은 허영이 아니라, 여행하지 않는 일이 손해라고 말하는 생계형 여행작가. 가공할 솔직함을 지닌 그는 남미를 여행하고 <1만 시간 동안의 남미> 1, 2, 3권을 썼고, 아시아를 다녀온 뒤 <1만 시간 동안의 아시아> 1, 2, 3권을 냈다. <가까운 행복 tea bag>, 중국 리장에서 눌러앉은 사람들을 만나 <행복한 멈춤, stay>, 자전적 소설 <아흔 살의, 여덟 살>, <지금이니까 인도, 지금이라서 훈자>까지 합해 총 10권의 책을 냈다. 방콕에서 7년째 살고 있고, 가을엔 잠시 뉴욕을 여행 중이다. 
블로그: modiano99  페이스북: modiano99 

 

글 천소현 기자  인터뷰 사진 강화송 기자  여행사진 박민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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