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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ITOR΄S LETTER] 기억보다 오래도록

  • Editor. 천소현
  • 입력 2018.11.01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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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소현 기자
천소현 기자

 

폴란드 여행기를 쓰는 동안 다큐멘터리 <폴란드로 간 아이들>의 개봉 소식을 들었습니다. 1951년 김일성의 지시로 폴란드로 보내졌던 1,500명의 한국전쟁 고아들이, 8년 후 다시 모두 북송된 이야기를 담았습니다. 당시 아이들을 돌보았던 폴란드 선생님들은 70년이 지난 후에도 잊지 않고 생생하게 기억을 소환하더군요. 그리고 말했죠. “그 아이들에게 사랑한다고 전해 주세요.”
잊히지 않는 비극과 슬픔이 기억 밖으로 나와 증언이 되는 경험을 폴란드에서 수없이 했습니다. 사실 그 경험은 폴란드 여행의 거의 전부였습니다. 병원에 입원한 아이들을, 학살당할 것을 알면서도 차마 유태인 수용소로 보낼 수 없어서 병원에서 눈을 감게 했다는 폴란드 의사와 간호사들의 이야기처럼 말입니다. 


인간이 불멸할 수 있다면, 그건 기억 안에서 가능할 겁니다. 어느 누구도 평행선으로 걷지 않는 인생길에서 서로가 잠시 겹쳐졌던 몇 시간, 몇 날이, 100년이 지난 후에도 어제처럼 생생하게 되살아나기도 하죠. 폴란드는 한 사람 한 사람을 잊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폴란드인이든, 유대인이든, 북한의 아이들이든 말입니다. 머리가 아니라 심장에 새겨진 기억입니다.  


폴란드에 다녀와 휴가를 내고 신안군 도초도에 맘을 뉘였습니다. 전날까지 붐볐다는 캠핑장은 텅 비어 휑했는데, 저녁에 작은 개 한 마리가 다가왔습니다. “버려졌어요. 여행 왔다가 그냥 놓고 간 것 같아요.” 듣고 보니, 녀석이 틈만 나면 먼 산 바라기를 하던 이유가 있었던 거죠. 앞 해변의 이름을 따서 ‘시목’이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습니다. 깊은 밤 화장실에 갈 때에도, 잠을 잘 때에도 곁을 지켜 주었던 시목이에게 해 줄 수 있는 일은 목욕밖에 없었습니다. 시커먼 때 국물을 헹궈 내자 잘생기고 복실한 개 한 마리가 나타났습니다. 


다시 시목이를 만나게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지금쯤은 누군가의 무릎을 차지하고 있으면 좋겠습니다. 기억은 곧 희미해지겠지요. 하지만 제 손 안에서 보드랍던 시목이의 숨결은 기억보다 오래 남아 있을 겁니다. 


<트래비> 팀장 천소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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