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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란드 100년의 이야기] 1918 바르샤바, 123년의 공백을 깬 독립

영원한 W의 시간 폴란드 100년의 이야기 

  • Editor. 천소현
  • 입력 2018.11.02 15:1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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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폴란드는 독립 회복 100주년을 맞았다. 
그 100년은, 곳곳에 애잔한 아름다움이 깃든 이 나라로 성큼 들어서는 시간의 열쇠였다. 
미지의 문 안에 선 여행자에게 꼭 맞는 열쇠보다 더 큰 행운은 없다. 

앤 성당 첨탑에서 내려다본 바르샤바의 석양. 역사지구는 나치에 의해 완전히 파괴되었다가 전후에 시민들의 노력으로 복원되었다

폴란드 | 북쪽으로 발트해를 끼고 있는 동유럽의 국가로 1989년 체제 전환 이후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인구는 3,850만 명, 대부분이 가톨릭 신자다. 수도 바르샤바와 역사의 도시 크라쿠프, 비엘리츠카 소금광산과 아우슈비츠가 유명하고, 홀로코스트의 역사가 워낙 강렬하게 각인되어 있지만 아름다운 중세의 유산을 보존하고 있는 소도시와 자연 등 더 넓고 깊게 봐야 할 이유가 충분한 나라다. 

스탈린의 선물이었다는 문화와 과학궁전은 여전히 독보적인 랜드마크지만, 바르샤바의 도심을 채워 가고 있는 현대식 빌딩에 가려질 날이 멀지 않았다
스탈린의 선물이었다는 문화와 과학궁전은 여전히 독보적인 랜드마크지만, 바르샤바의 도심을 채워 가고 있는 현대식 빌딩에 가려질 날이 멀지 않았다

 

●한 세기 독립의 페이지를 넘기며 


점심 무렵부터는 인파가 급속도로 늘어나기 시작했다. 폴란드 독립 회복 100주년을 맞이해 그 어느 해보다 성대하게 준비했다는 국군의 날(Armed Forces Day)*퍼레이드가 있는 날이었다. 좋은 자리를 맡겠다고 샌드위치로 점심을 때우며 8월의 뙤약볕을 견뎌야 했지만 투덜거림이 나오진 않았다. 정면에는 아까부터 두터운 정복을 입고 부동자세로 대기 중인 1,000여 명의 군인들이 마주 서 있었기 때문이다. 드디어 안제이 두다(Andrzej Duda) 현 대통령의 차를 선두로 행렬이 흐르기 시작했다. 유니폼이 다르면 걸음걸이도 달랐다. 소속도 달랐지만, 시대가 다르기도 했다.

최신형 전투기들이 하늘을 가를 때에는 대기 중인 헌병들도, 중세 기사단도 일제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수십년 전 이탈리아 보급기가 봉기군에게 꾸러미를 투척했던, 독일이 도시를 폐허로 만들겠다고 포탄을 쏟아 부었던 그 하늘이었다. 

폴란드-소련 전투에서 승리한 8월15일은 폴란의 국군의 날이다. 독립 회복 100주년을 맞이해 어느 해보다 성대했던 퍼레이드
폴란드-소련 전투에서 승리한 8월15일은 폴란의 국군의 날이다. 독립 회복 100주년을 맞이해 어느 해보다 성대했던 퍼레이드

1918년 11월11일, 100년 전 폴란드의 독립 회복은 1차 세계대전의 결과였다. 왕정 쇠퇴 후 123년 동안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러시아에 의해 통치되었던 폴란드가 다시 지도에 등장한 것은 1918년 베르사유 조약 덕분이었다. 그러나 독립은 평화를 동반하지 않았다. 2차 세계대전의 발화점이기도 했던 폴란드는 가장 큰 피해국이었고, 1945년 이후 소비에트 연방에 강제로 종속되면서 1989년 냉전의 시대가 끝나고 나서야 완전한 자주권을 회복할 수 있었다. 하지만 20여 년이 지난 이날 퍼레이드에서 안제이 두다 대통령이 미군의 폴란드 영구 주둔을 요청해야 할 만큼 강대국 사이에서 견제와 균형을 잡는 일은 여전히 이 나라의 중요한 과제다. 

안제이 두다 대통령이 행렬의 선두에 섰다
안제이 두다 대통령이 행렬의 선두에 섰다
비스와강은 바르샤바를 동서로 나누며 흐른다
비스와강은 바르샤바를 동서로 나누며 흐른다

이만큼만 요약해도 남의 이야기 같지 않은 폴란드의 역사는, 어느 장면에 멈춰서도 대한민국의 현대사와 오버랩이 된다. 바르샤바 공산주의 박물관에서 본 한 장의 사진이 인상 깊게 남았다. 1981년 12월 계엄령이 내려진 폴란드 시청사 앞에 소련군의 탱크가 서 있는 사진은, 비슷한 시기 이 땅의 남쪽 어느 도시와 깜짝 놀랄 만큼 비슷했다. 그래서인지 이날의 퍼레이드는 군사력을 과시하는 보통의 군 퍼레이드와는 다르게 다가왔다. 이제 막 한 세기의 독립이라는 페이지를 넘기며 폴란드는 혹은 한국은 다음 세기의 여백에 무엇을 기록하게 될까. 해를 넘기면 임시정부수립 100주년을 맞이하는 대한민국에도 중요한 질문이다.

*폴란드는 1920년 폴란드-소련 전쟁에서 소련 군대를 물리친 8월15일을 ‘국군의 날’로 기념하고 있다. 10분의 1밖에 안 되는 전력으로 일군 승리라서 ‘비스와(Vistula)강의 기적’이라고도 부른다.  

쇼팽 박물관. 흩어진 조국을 평생 그리워했던 쇼팽은 죽어서 심장으로 돌아왔다
쇼팽 박물관. 흩어진 조국을 평생 그리워했던 쇼팽은 죽어서 심장으로 돌아왔다

 

●심장으로 돌아온 피아니스트 


쇼팽1810~1849년은 삼국 분할로 지도상에 폴란드가 없던 시절 태어나 바르샤바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바르샤바 대학 등 여러 곳에 그가 살았던 흔적이 남아 있다. ‘기린’이라는 별칭으로 불렀던 거실 피아노로 7세에 첫 작곡을 했고 13세에 공개 연주회로 이미 유명해진 천재 음악가는 비엔나 연주로 국제무대까지 진출했다. 스무 살이 된 쇼팽은 바르샤바 연주를 마지막으로 일생을 타국에서 보냈지만 항상 조국을 그리워하며 폴로네즈(폴란드의 무곡에서 유래)를 작곡했고, 혁명 에튀드 등에 조국을 걱정하는 마음을 담았다.

멀티미디어로 전달되는 쇼팽의 삶과 음악을 탄생부터 더듬어 나간다
멀티미디어로 전달되는 쇼팽의 삶과 음악을 탄생부터 더듬어 나간다

귀향의 꿈이 이루어진 것은 사후였다. 쇼팽은 39세의 나이에 병환으로 파리 페르 라세즈 묘지에 잠들었다. 그의 두 가지 유언은 모두 이루어졌는데 첫 번째는 장례식 때 모차르트의 레퀴엠을 들려 달라는 것과 심장을 꺼내 달라는 것이었다. 지금 그의 심장은 바르샤바 성 십자가 성당의 지하 묘지에 안치되어 있다. 

바르샤바 쇼팽 박물관은 음악애호가들의 성지다. 최신 멀티미디어 기술도 좋지만 무엇보다 마음을 설레게 하는 것은 쇼팽이 알알이 그려 넣었다는 친필 악보와 놀라운 실력의 스케치, 직접 사용했다는 플레이엘 피아노(Pleyel piano) 등을 보는 일이다. 프랑스 소설가 조르주 상드(George Sand)와의 러브스토리 등 쇼팽의 일생이 스토리로 쫙 엮어진다. 박물관에 부쩍 한국인이 많은 것은 2015년 제17회 쇼팽 콩쿠르 금메달 수상자가 조성진이기 때문이다. 17~28세의 젊은 피아니스트만 참가할 수 있는 이 세계적인 콩쿠르는 5년에 한 번씩만 열린다. 

바르샤바여행 공식사이트  www.warsawtour.pl 
쇼팽 박물관  www.chopin.museum/pl 
 

글 천소현 기자  사진 이승무 
취재협조 폴란드대사관 www.seul.msz.gov.p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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