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란드 100년의 이야기] 1944 바르샤바, 불꽃으로 살아간 그들
[폴란드 100년의 이야기] 1944 바르샤바, 불꽃으로 살아간 그들
  • 천소현
  • 승인 2018.11.02 15:2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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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토에서 발굴한 진실의 편린 

바르샤바의 박물관은 크든 작든, 모든 것이 특별하고 애틋했다. 전후 잿더미가 된 도시를 맞이한 그들에게 박물관은 대대로 물려받은 것, 우연히 발굴된 것들을 전시하는 곳이 아니다. 도시를 재건해 냈듯, 역사를 재건해 내고, 그곳을 다시 출발점으로 삼아 나아가려는 결연한 의지가 보인다. 최고의 건축가, 최고의 기술을 동원한 인터렉티브 뮤지엄들은 따분하다는 선입견을 뒤집어 놓을 만큼 획기적인 체험을 약속한다. 바르샤바에서 꼭 가 봐야 하는 박물관을 꼽으라면 이견 없이 두 곳이 있다. 

유대인의 역사를 건축으로도 느낄 수 있는 폴린 유대인 역사 박물관
유대인의 역사를 건축으로도 느낄 수 있는 폴린 유대인 역사 박물관

폴린 유대인 역사 박물관(POLIN Museum of the History)에 입장하는 순간 홍해가 갈라지고 예루살렘이 나타났다. 국제공모전을 통해 걸작으로 완성된 폴린 박물관이 선사하는 건축적 황홀경이다. 시나이산을 닮은 출입문으로 들어서 홍해의 기적 같은 통로를 지나면 홀 내부가 온통 예루살렘의 라임스톤을 연상시키는 노란색이다. 전시관 내부의 모든 빛과 색, 선과 공간에는 유대인들의 삶과 역사가 담겨 있어 감정을 뒤흔든다. 

폴린 박물관 맞은편에 있는 바르샤바 게토 영웅 기념비. 1970년 빌리 브란트 서독 총리가 이곳에서 무릎을 끊고 사죄했었다
폴린 박물관 맞은편에 있는 바르샤바 게토 영웅 기념비. 1970년 빌리 브란트 서독 총리가 이곳에서 무릎을 끊고 사죄했었다

11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폴란드 유대인의 역사는 폴린에 차곡차곡 쌓여 있다. 왕이나 군주에게 세금을 내는 대신 유대인 공동체만의 종교, 언어, 관습을 보장 받으며 공존했던 중세의 이야기는 참혹한 현대사에 가려져 잘 알려지지 않았던 부분이다. 갈등이 없진 않았지만 폴란드 유대인은 지속적으로 늘어나 1940년대는 350만명에 이르렀다. 최악의 홀로코스트가 이곳에서 일어났던 이유다. 


나치는 1940년부터 유럽 전역에 598개 게토를 설치해 유대인들의 주거를 제안했고, 그중 가장 큰 것이 바르샤바 게토였다. 고통은 단지 ‘고립’에 있지 않았다. 바르샤바 면적의 3%에 인구의 30%가 가둬졌고, 2,000칼로리 이상을 섭취해야 하는 성인에게 주어진 하루 배급량은 200칼로리에 불과했다. 최대 46만명에 이르렀던 게토에서 1년 만에 1만명이 죽었고 1942년부터 게토 폐쇄와 집단 수용소로의 강제 이주가 시작되면서 26만명이 학살당했다. 죽음을 예감한 이들은 실상을 기록한 자료들을 땅에 묻어 두고 떠났다. 게토에 남은 6만여 명의 유대인들도 1943년 일어난 게토 봉기의 실패 이후 죽거나 흩어져 버렸다. 2차 세계대전 중 전 유럽에서 600만명의 유대인이 학살당했다. 

박물관 내부에 복원된 목조 유대인 회당. 못을 하나도 사용하지 않았다
박물관 내부에 복원된 목조 유대인 회당. 못을 하나도 사용하지 않았다

사실상 무덤이 된 도시의 재건이 시작될 때 반유대인 정서에 밀려 많은 유대인들이 폴란드를 떠났다. 공산당 치하에서 폴란드와 이스라엘의 관계는 적성국이었고, 이때 폴란드를 떠나야 했던 유대인들은 체제 전환 이후에야 돌아올 수 있었다. 게토에서 유대인 아기 2,500명을 구출해 낸 간호사 이레나 센들러(Irena Sendler, 1910~2008년)의 선행이 제대로 조명을 받은 것 역시 90년대에 들어서서다. 현재 바르샤바에 거주 중인 유대인은 900여 명에 불과하지만, 폴린 뮤지엄은 그들만의 역사가 아니다. 폴란드만의 역사도 아니다. 모두가 알아야 할 아픈 인류의 역사다. 

폴린 유대인 역사 박물관
www.polin.pl

뱌르샤바 봉기의 역사는 시민들의 기증으로 재건되었다
뱌르샤바 봉기의 역사는 시민들의 기증으로 재건되었다

 

●영원히 지속되는 W의 시간


다음해인 1944년 바르샤바 봉기가 일어났다. 당시를 증언하는 사진, 영상, 기록들을 모아 봉기 60주년에 문은 연 것이 바르샤바 봉기 박물관(Muzeum Powstania Warszawskiego)이다. 8월1일부터 10월2일까지 63일간 오로지 희망이라는 무기를 들고 일어섰던 항쟁의 주역들이 박물관에서 진짜 이름을 찾아 차례로 호명되고 있었다(봉기 당시 그들은 신변보호를 위해 별칭으로만 알려졌었다).

주변국들의 배신과 외면으로 바르샤바 봉기는 시민군 4만명 중 절반 이상이 목숨을 잃고 실패로 돌아갔다. 복수를 결심한 히틀러는 소련군이 천천히 진군해 오는 동안 시민들을 학살하고 전례를 찾을 수 없을 정도로 철저하게 도시를 파괴했다. 90만명에 이르렀던 바르샤바 시민은 40%가 사망하고, 나머지는 추방당해서 1,000여 명이 남았을 정도다(이 생존자들은 ‘로빈슨 크루소’라고 불렸다). 

봉기 박물관 야외 전시장
봉기 박물관 야외 전시장
바르샤바 봉기 박물관 입구. 평일에도 긴 줄이 늘어서 있다
바르샤바 봉기 박물관 입구. 평일에도 긴 줄이 늘어서 있다

그러나 역사는 지워지지 않았다. 박물관에 모두 재현되어 있다. B-24 리버레이터 전투기가 날개를 펴고 있고, 보급상자 안의 비스킷, 지뢰, 무기들도 그대로다. 하수도 안으로 구부정하게 걸어 들어가니 어느 순간에라도 맨홀 뚜껑이 열리면서 독일군의 수류탄이 떨어질 것 같은 공포가 밀려왔다. 총 연장 340km에 이른다는 바르샤바의 지하통로는 봉기군의 비밀통로였다고.

봉기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여전히 분분하지만, 그 뜻을 기리는 마음은 한결같다. 바르샤바 봉기를 뜻하는 P(Powstanie)와 W(Warszawskie)를 합친 닻 모양의 로고를 바르샤바 시내 어디에서도 쉽게 볼 수 있다. 바르샤바에서는 봉기를 시작했던 8월1일 오후 5시가 되면 모든 일을 멈추고 짧은 기념식을 가진다. 혁명의 시간, W의 시간은 영원히 흐르고 있다. 

바르샤바 봉기 박물관
www.1944.pl 

 

글 천소현 기자  사진 이승무
취재협조 폴란드대사관 www.seul.msz.gov.p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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