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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란드 100년의 이야기] 1980 바르샤바의 고아한 재림

  • Editor. 천소현
  • 입력 2018.11.02 1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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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색빛 도시에 뜬 무지개 

폴란드의 이웃들, 특히 독일이나 체코에서 아우라 넘치는 중세의 풍경에 흠뻑 취했던 여행자라면 회색빛을 다 씻지 못한 바르샤바의 스카이라인이 실망스러울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도시의 역사에 귀를 기울여 보면 도시는 더 이상 풍경이 아니라 치열한 삶의 자리다. 소비에트 양식의 무뚝뚝한 건물과 생경한 현대 건축물이 공존하는 도시는 시간을 보낼수록 구석구석이 아린 느낌이다. 스탈린의 선물이었다는 문화와 과학 궁전(Palace of Culture and Science)은 310m 높이로 여전히 폴란드에서 가장 높은 건축물이지만, 택시 기사는 이렇게 말했다. “스탈린은 저걸 선물이라고 줬지만, 우리는 뼈 속까지 고통 받고 있었다고요.” 

시민들의 모금과 노력으로 복원된 바르샤바 역사 지구
시민들의 모금과 노력으로 복원된 바르샤바 역사 지구

전후 폴란드는 재건에 총력을 기울였다. 가장 큰 피해를 입었던 구도심을 재건할 때 중요한 사료가 되어 주었던 것은 이탈리아 화가 베르나르도 벨로토Bernardo Bellott(Canaletto)의   정교한 그림들. 지금 왕궁 박물관에서 볼 수 있다. 17세기 도시의 풍경을 완벽하게 재건해 낸 것은 시민들의 모금과 노력이었다. 이 노고에 대한 가장 큰 보답은 1980년 바르샤바 역사 지구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였을 것이다.

마켓 광장은 음악과 커피, 아이들의 웃음소리로 가득하다
마켓 광장은 음악과 커피, 아이들의 웃음소리로 가득하다

그러나 이곳에도 역사의 단서들이 남아 있다. 바르샤바 왕궁 시계탑의 바늘은 독일군의 폭격이 떨어졌던 11시15분에 멈춰 서 있고, 매일 같은 시간에 트럼펫 연주가 울린다. 죽음의 시간은 그렇게 멈춰서 있지만 바르샤바의 오늘은 다이내믹하게 흐르고 있었다. 바르샤바에 있는 동안 역사 지구의 광장을 3번이나 찾았다. 낮 동안 자전거와 마차가 분주한 광장의 하늘엔 솜사탕과 풍선이 떠다녔는데, 저녁이 되자 거리 공연팀의 불타는 링이 휙휙 날아다니고, 댄서들의 현란한 동작이 공기를 데웠다. 앤 성당의 종탑 위에 섰을 땐 매일의 해가 오늘도 무사히 넘어가고 있었다. 

바르샤바 왕궁 뮤지엄 
www.zamek-krolewski.pl 

바르샤바 역사 지구 풍경
바르샤바 역사 지구 풍경
복원된 성당의 내부는 의외로 모던하기도 하다
복원된 성당의 내부는 의외로 모던하기도 하다
크라쿠프스키에 프셰드미에시치에 거리에서 만난 봉기군 입상
크라쿠프스키에 프셰드미에시치에 거리에서 만난 봉기군 입상
역사 지구 광장의 거리 연주자들
역사 지구 광장의 거리 연주자들
바르샤바 대학 도서관
바르샤바 대학 도서관
빌라누프 궁전
빌라누프 궁전

 

●역사적으로 산책하기 
로열 루트 Royal Route

쇼팽과 퀴리 부인이 걸었던 그 길을 걸어 보자. 3개의 왕궁을 포함해 바르샤바의 주요 유적들을 모두 볼 수 있는 11km의 로열 루트다. 시작점은 구도심 역사 지구 광장의 로열 캐슬(Royal Castle), 끝점은 빌라누프 왕궁(Wilanow Palace)이다. 고풍스러운 분위기의 크라쿠프스키에 프셰드미에시치에(Krakowskie Przedmieście) 거리와 가짜 야자수가 인상적인 노비 시비아트(Nowy Świat) 거리를 따라가다 보면 성 안나 성당 등 유서 깊은 교회, 대통령 궁, 바르샤바 최고급 숙소인 브리스톨 호텔 등 역사의 중추들을 모두 만나게 된다.

이어지는 알레예 우야즈도프스키에(Aleje Ujazdowskie) 거리는 대사관과 정부기관들이 모여 있는 19세기 풍의 부촌. 그 끝에서 강변 쪽으로 쇼팽의 음악을 야외 공연으로 즐길 수 있는 와지엔키 공원과 우아한 빌라누프 왕궁이 앉아 있다. 겨울 동안의 로열 루트는 일루미네이션으로 반짝거린다고. 116번, 180번 버스 이용.

 바르샤바 대학의 지붕 정원은 지상이지만 천상 같다

 

●세상을 다 가졌던 촉촉한 오후 

철학자 키케로(Cicero)는 말했다. “만약 당신에게 정원과 도서관이 있다면, 모든 것을 가진 것이다”라고. 그래서 바르샤바 대학 도서관(Biblioteka Uniwersytecka w Warszawie)의 지붕 정원은 아무것도 부러울 것이 없는 완벽한 세상이었다. 지상에는 라이브러리가, 옥상에는 정원이 있으니. 게다가 이 도서관에는 방학이라는 휴식도 있었다. 멀리서 온 손님의 특권으로 도서관을 잠시 독점 관람할 수 있었다.

1999년 건축학과 교수들이 설계한 도서관답게 입구 계단 위에는 감히 우러러보지 않을 수 없는 학자들의 동상이 가장 높은 곳에 서 있다. 그 엄숙한 관문만 통과하면 내부는 유리와 스테인리스로 기능을 극대화시킨 산업주의 양식 건물이다. 자연채광이 잘 들어오는 도서관의 내부도 좋지만 가장 놀라운 것은 바깥에 있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옥상으로 올라가니 1,000여 종이 식물이 자라는 1.5헥타르의 옥상 정원이 나타났다.

사계절 릴레이로 꽃들이 피고 지는 정원은 웨딩 촬영의 명소로 자리 잡은 지 오래다. 2000년과 2002년에 오픈한 아래 정원(Lower Garden)과 위 정원(Upper Garden) 식물재배에 필요한 100톤의 흙을 수레로 실어 나르는 작업에만 한 달 반이 걸렸다고 증언해 준 이는 안내를 자청한 경비원 할아버지였다. 남한에서 왔다고 하자 “남한의 역사를 조금 알고 있다”며 총총 돌아서는 그의 행동이 차마 아픈 이야기를 듣지 못하겠다는 의미라는 것을, 통역사를 통해 알게 되었다. 도서관을 오래 지켜 온 그는 아는 것이다. 지식보다 중요한 것은 공감이라는 것을. 예기치 않은 곳에서 만난 그의 제스처는 촉촉한 위로였다. 

바르샤바 대학 도서관 
www.buw.uw.edu.pl 

존경심이 저절로 드는 도서관 입구의 학자 동상들
존경심이 저절로 드는 도서관 입구의 학자 동상들
웨딩 촬영의 명소가 된 지붕 정원
웨딩 촬영의 명소가 된 지붕 정원

글 천소현 기자  사진 이승무
취재협조 폴란드대사관 www.seul.msz.gov.p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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