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와 늑대의시간
개와 늑대의시간
  • 박 로드리고 세희
  • 승인 2019.01.01 15:4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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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중 세상이 가장 낯설게 느껴지는 오후가
어김없이 발길을 붙든다.
이 마법 같은 시간에 홀리는 것이야말로 
여행자의 특권이자 자유다.

폴란드 바르샤바
폴란드 바르샤바

 

겨울의 유럽을 사랑한다.

자전축이 기울어진 지구의 공전과 자전이 뒤섞인 결과로, 해가 높게 떠오르지 않고 하루 종일 비스듬하고 낮게 세상을 비추기 때문이다. 이때 찍힌 사진에는 세상의 깊이감이 잘 담긴다. 별 볼일 없는 평범한 풍경에도 감동이, 드라마틱한 분위기가 깃든다. 해 질 무렵을 ‘매직 아워(Magic Hour)’라고 하는 까닭이다. 마법 같은 시간. 보통의 경우 이른 아침이나 저녁 한두 시간 남짓이지만, 겨울의 유럽은 오전 내내 해가 뜨고 오후 내내 해가 지는 듯하다.

대신 낮이 무척 짧다. 위도가 높은 런던의 경우 오후 3시가 되기도 전에 땅거미가 내려앉는다. 해가 저물어 숙소로 돌아가는 트램을 타고 가다 보면 창밖으로 도시의 가장 아름다운 시간이 흐른다. 땅으로 꺼져 가는 태양은 마지막 숨을 토해 내며 하늘을 짙푸른 잔광으로 물들이고, 도시에 하나 둘 불이 들어온다. 이른바 개와 늑대의 시간. 프랑스 사람들은 해가 지고 난 직후 사물의 윤곽이 흐릿한 무렵을 이와 같이 부른다.

집 앞을 어슬렁거리며 지나가는 저 동물이 집에서 키우던 개인지 뒷산에서 먹이를 찾아 내려온 늑대인지, 보이긴 해도 명확하게 구분할 수 없는 시간. 낮도 아니고 밤도 아닌, 하루 중 세상이 가장 낯설고 새롭게 보이는 시간. 그 시간 동안 흐르는 창밖 풍경은 여행자를 홀린다. 도중에 트램에서 내려 사진을 찍기도 여러 번이었다. 시간에 맞춰 집으로 돌아가야 할 일도 없고, 돌아가서 해야 할 일도 딱히 정해져 있지 않은 여행자의 신분이었으므로. 어쩌면 그런 자유에 미혹돼, 겨울의 유럽을 사랑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체코 프라하, 올드타운 광장
체코 프라하, 올드타운 광장

 

‘Photography’의 어원은 그리스어로 빛을 뜻하는 ‘Phos’와 그리다를 뜻하는 ‘Graph’로 이루어진 말이다. 즉 사진은 ‘빛으로 그리는 그림’을 말한다. 지금이야 사진을 찍는다고 하면 눈 깜짝할 사이의 찰나를 담는 작업으로 당연하게 받아들이지만, 200여 년 전 사진이 처음 발명되었을 무렵만 해도 카메라를 고정시켜 놓고 몇 시간씩 기다려야 한 장의 사진을 겨우 얻을 수 있었다. 렌즈를 통해 빛이 들어와 필름에 상이 맺히기를 기다리는 것이 곧 사진사의 일이었고, 그 기다림의 시간을 줄여 온 것이 곧 카메라와 사진의 발전이자 역사다.

기계장치였던 카메라는 이제 전자장치가 되어 온갖 화려한 성능을 뽐낸다. 인터넷에 연결되는 것쯤은 이미 옛날 얘기고, 인공지능과 연계된 첨단 기술은 사진사를 놀라게 할 정도다. 그러나 사진을 찍는 건 여전히 사람의 일이고, 사진에 있어 가장 훌륭하며 절대적인 재료 또한 여전히 빛이다. 빛이 없으면 사진도 없다. 사진을 찍는 일은 빛을 다루는 일이다. 


빛과 사진사의 위치에 따라 사진의 인상은 천차만별이다. 사진을 찍을 때 빛과 관련된 두 가지 흔한 믿음에 딴죽을 걸고 싶다. 역광(피사체의 등 뒤에 가장 강한 광원이 있는 경우)에서 사진을 찍으면 안 된다는 것과 맑은 날 사진이 잘 나온다는 것. 역광의 경우 사진 찍기가 조금 까다롭긴 하다. 의도치 않게 사진이 어둡게 나오기도 하는데 그럴 때는 카메라를 조작해서 밝혀 주면 그만이다.

역광일 때 세상의 깊이감은 가장 강렬해진다. 역광은 사진사가 다루어야 할 빛의 방향일 뿐이지, 피해야 할 상황이 아니다. 맑고 흐림 역시 서로 분위기가 다른 것일 뿐, 좋고 나쁨의 기준일 수는 없다. 맑은 날은 대체로 사진이 선명하다는 인상을 주고 힘이 넘치며 흐린 날의 사진은 부드럽고 분위기가 차분하기 마련이다. 상업적인 촬영에서는 맑은 날 인물 사진을 찍을 때 얼굴에 드리워지는 그림자가 너무 진해 여러 장비와 스태프를 동원해 오히려 그림자를 만들기도 한다. 반대로 흐린 날엔 인공적으로 강한 빛을 주기도 한다. 사진이 필요로 하는 빛의 분위기가 그때그때 다른 것이지, 올바른 위치나 정답이 있는 것은 아니다. 

스위스 로잔, 올림픽 박물관 레스토랑
스위스 로잔, 올림픽 박물관 레스토랑

빛과 세상의 관계를 면밀하게 관찰하다 보면, 바라는 사진의 분위기가 마음속에 떠오른다. 그리고 발걸음은 마음이 흐르는 쪽으로 자연스레 옮겨 간다. 해가 더 아슬아슬하게 기울 때를 기다리기 위해 길가의 카페 테라스에 자리를 잡기도 한다. 반대로 해가 너무 많이 기울었다면, 우연을 가장해 다음날 조금 더 이른 시간에 괜스레 그곳에 다시 가 본다. 탁월한 사진사란 빛을 기다릴 줄 아는 사람이다. 사진이 처음 발명됐을 때 카메라 뒤에서 몇 시간을 기다려야 했던 옛날이나, 카메라가 인공지능을 품은 요즘이나 마찬가지로. 사진은 결국 빛이 하는 일이니까. 

 

*박 로드리고 세희는 영화와 드라마, 다큐멘터리를 넘나드는 촬영감독이다. 틈틈이 여행을 하며 사진을 찍는다. <트래비>를 통해 여행사진을 찍는 기술보다는, 여행의 순간을 포착하는 태도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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