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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리고의 여행의 순간] 비로소 카메라의 굴레에서 벗어난다면

  • Editor. 박 로드리고 세희
  • 입력 2019.02.01 15:54
  • 수정 2019.02.12 09:4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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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라다크

 

무게를 내려놓자 여행은 경쾌해졌다.
찍을 수 있는 것만 찍는 것이야말로 여행의 본질이다

시리아 알레포

 

●사진은 가벼움의 미학이다.

상대적인 의미다. 엄청나게 많은 장비를 동원하는 영화나 드라마 촬영은 무겁다. 카메라를 싣는 차가 있어야 하고, 조명까지 더하면 규모는 더욱 불어난다. 촬영 스태프뿐만 아니라 연출, 제작, 녹음, 미술 부서까지. 촬영장에는 대략 50여 명에서 많으면 100명의 스태프들이 상주한다. 장비에 사람까지 더해진 현장의 무게에 짓눌릴 때면 사진을 찍는 시간이 그립다. 어디론가 훌쩍 떠나 단출한 카메라 한 대를 달랑 쥐었을 때의 그 한없는 가벼움이란.


무거운 카메라를 내려놓게 된 계기가 있었다. 10여 년 전, 3년 동안 아시아 전역을 여행할 때다. 바야흐로, 필름에서 디지털 사진으로 넘어가고 있었던 시절 나는 필름의 품격과 디지털의 효율성 사이에서 헤매고 있었다. 결국 어느 한 쪽도 포기하지 못하고 필름과 디지털, 두 대의 전문가용 카메라와 광각 줌렌즈와 표준 줌렌즈를 챙겼다. 어두운 상황에 대처하기 위해 단렌즈 두 개 더, 후미진 지역에서는 ‘신선한’ 필름을 구하지 못한다는 불안감에 필름도 100개 정도는 항상 들고 다녔다(필름이란 저온에서 신선하게 보관해야만 하는 물건이다). 한두 달도 아니고 3년씩이나, 그것들을 다 메고 다니는 것이 여간 고역이 아니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어느 것 하나 놓을 수 없는 필수품들이었다. 


그런 줄로만 알았다, 그가 오기 전까지는. 방글라데시에서였다. 하룻밤에 2달러 하는 허름한 숙소에서 자고 있는 사이 도둑이 든 것이다. 잠들기 전에 찍은 사진들을 보느라 머리맡에 놓아 둔 디지털 카메라 한 대만 남겨 두고 나머지 장비는 죄다 훔쳐 갔다. 앞이 깜깜하고, 당장 괘씸한 기분밖에 들지 않았다. 그런데 덕분에 장비가 줄어들어 배낭이 날아갈 것처럼 가벼워졌다. 그동안 짊어졌던 건 결국 내 욕심의 무게였다는 것을 깨닫자 도둑에게 고마운 마음까지 들었다. 여행은 경쾌해졌다. 

알프스 오트루트

또 한 번은 알프스에서 산악스키를 타면서다. 내리막을 타는 보통의 스키와는 달리 산악스키는 눈 덮인 산악지형을 오르락내리락하는 트레킹에 가깝다. 알프스 오트루트(Haute Route) 코스와 프랑스의 샤모니(Chamonix)에서 스위스의 체르마트(Zermatt)까지 일주일 동안 이동하는 여정이었다. 세상에 이보다 힘든 일이 있을까. 산악스키라는 게 원체 체력 소모가 극심한 운동인데다 낮은 기온과 높은 고도는 더욱 버티기 힘든 조건이었다. 몸에는 두 대의 카메라가 매달려 있었다. 전문가용 DSLR 카메라와 콤팩트한 미러리스 카메라 하나. 힘들 것을 짐작하고 이미 줄이고 줄인 장비였지만 그런 이성적인 사고는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본능적으로 큰 카메라를 내려놓고 미러리스 카메라 한 대만을 챙겨 오트루트로 향했다. 미러리스 카메라에는 광각 렌즈가 달려 있었다. 넓은 풍경에는 좋았으나 구체적인 장면을 찍기 위해서는 피사체에 다가가야만 했다. 


포기해야 하는 순간들이 많았다. 그러나 그것이야말로 여행사진의 본질이었다. 찍을 수 있는 것만 찍는 것. 못 찍는 상황을 안타까워하지 않고 쿨하게 받아들이며 여행에 집중하는 것. 어디까지나 여행이 먼저고 사진은 나중이다. 오트루트에서 찍은 사진들에는 커다란 풍경에 사람이 점처럼 작게 담겨 있어 조금은 아쉬운 마음이 이는 건 사실이다. 망원 렌즈가 있었다면 더 잘 찍을 수 있었을 텐데. 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교훈이 담겼기에 나에겐 충분히 좋은 사진들이다. 좋은 사진은 좋은 카메라가 만드는 것이 아니다. 사진을 찍는 사람의 태도가 만든다. 


카메라를 새로 사려는 지인들이 간혹 카메라를 추천해 달라곤 한다. 그럴 때마다 시시한 답변을 내놓는다. 그냥 예뻐 보이고 맘에 드는 카메라 아무거나 사라고. 물론 카메라 브랜드나 모델마다 특징이 다르긴 하지만 그것은 너무나도 작은 차이들이다. 보다 큰 차이는 사진을 찍는 사람에게 달렸다. 애초에 모든 상황을 만족시키는 카메라와 렌즈란 없다. 그 순간, 손에 들려 있는 카메라와 렌즈가 담을 수 있는 만큼만 사진이 된다. 카메라에게서 해방되는 순간 여행은 더욱 즐거워진다. 

 

*박 로드리고 세희는 영화와 드라마, 다큐멘터리를 넘나드는 촬영감독이다. 틈틈이 여행을 하며 사진을 찍는다. <트래비>를 통해 여행사진을 찍는 기술보다는, 여행의 순간을 포착하는 태도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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