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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리고의 여행의 순간] 고민 끝에 찾아오는 선물

  • Editor. 박 로드리고 세희
  • 입력 2019.04.01 09:5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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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아무리 찰나의 미학이라지만
좋은 사진은 우연히 얻어 걸리는 것이 아니다

프랑스 파리
프랑스 파리

필름이 가고 디지털이 왔다.

필름이 가고 디지털이 왔다. 촬영계에선 천지개벽이라 할만한 변화였다. 촬영의 방식도 크게 달라졌는데, 그중 가장 실감하는 변화는 ‘마구 찍는다’는 것이다. 필름으로 영화를 찍던 시절에는 단 한 장면을 위해 배우와 카메라가 리허설을 여러 번 거치고 나서야 촬영에 들어가곤 했다. 그에 비해 디지털 시대는 한껏 너그럽다. NG를 내도 필름을 버리지 않으니 마음 편히 레코딩 버튼을 누른다.


마구 찍기는 사진도 마찬가지다. 필름 시절엔 사진 한 장을 찍기 위해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잘못 찍은 사진은 돈 내고 버리는 쓰레기와 다름없었고 심지어 실수를 확인할 수 있는 건 한참 나중의 일이었다. 찍을까 말까, 이렇게 찍을까 저렇게 찍을까. 아끼고 고민하다 결정적인 순간을 눈앞에서 날려 버리기도 일쑤였다. 비용의 문제만이 아니었다. 많아 봐야 서른 몇 장 남짓 찍을 수 있는 필름 한 통이 다 비어 갈 때쯤이면, 조마조마 마음을 졸였다. 예상치 못한 상황이 불쑥 나타날까봐, 하필이면 그때 필름이 동이 날까 봐. 새 필름을 갈아 끼우는 1분의 시간이 영원과 같이 느껴졌고, 이미 사라진 찰나를 안타까워하며 머리를 쥐어뜯기도 했다. 손으로 셔터를 누르는 동안, 부지런히 머리를 굴리던 시절이었다.

프랑스 파리

바야흐로 디지털의 시대. 셔터를 누르는 부담이 현저하게 줄었지만, 여전히 적잖은 생각들이 남았다. 빛이 어떻게 닿는지 살피고, 입체감을 살려 주는 위치를 잡고, 초점을 잡고, 조리개와 셔터스피드를 맞추고. 다만 필름과는 달리 ‘일단 찍고 보기’가 허용된다. 초점이나 노출이 맞지 않더라도 아예 없는 것보다는 부족하게나마 있는 게 나으니 찍고 또 찍는다. 생각하고 찍기를 반복하며 더 나은 사진을 만들어 간다. 그렇다면 가장 나중에 찍은 사진이 가장 좋은 사진이 되어야 하겠지만 꼭 그렇지는 않다. 결정적인 순간은 빠르게 소멸하기 마련이고 찍는 사람의 판단이 틀릴 때도 많으니까. 같은 상황에서 찍은 여러 장의 사진 가운데 찰나의 묘미와 구성의 완성도를 조합해 최고의 한 컷을 골라 내는 것까지가 사진을 찍는 일에 포함된다. 흔들린 사진이어도, 사진 속 인물이 환하게 빛난다면 충분히 A컷이 될 수 있다.

방글라데시 치타공

아무리 찍어도 돈이 들지 않으니, 얼마나 큰 행운인가. 더구나 요즘 카메라들은 성능도 무척이나 좋아서 자동 설정으로도 훌륭한 결과물을 낸다. 기술적인 요소보다는 자신만의 독창적인 감각을 기르는 일에 집중해야 하는 이유다. 세상을 여행하며 최대한 많은 사진을 찍어 보고 경험하는 것이 중요하다. 서랍 속에 오래된 카메라가 있다면 일단 집 밖으로 나서 보자. 무엇을 담을까, 두리번거리며 하는 산책은 익숙했던 동네마저 새로운 여행지로 만들어 준다. 사진이 제 아무리 찰나의 미학이라지만 좋은 사진은 결코 ‘우연히’ 얻어 걸리는 것이 아니다. 내가 지금 무엇을 찍고 있는지, 어떻게 찍을 것인지 끊임없이 고민하는 일이 몸에 밴 사람에게 선물처럼 찾아오는 것이다.

 

*박 로드리고 세희는 영화와 드라마, 다큐멘터리를 넘나드는 촬영감독이다. 틈틈이 여행을 하며 사진을 찍는다. <트래비>를 통해 여행사진을 찍는 기술보다는, 여행의 순간을 포착하는 태도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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