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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의 지름길을 항해하다, 말라카 해협 크루즈

  • Editor. 박준
  • 입력 2019.04.01 1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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겐팅 드림에서 바라보는 말라카 해협의 황금빛 석양
겐팅 드림에서 바라보는 말라카 해협의 황금빛 석양

갈라지는 뱃길로 지구 위에 이내 사라질 그림을 그린다. 거대한 크루즈선을 타고 ‘지구의 지름길’이라 불리는 말라카 해협을 지나는 길이다. 때로는 꿈같은 환희고, 때로는 낯설고 막막한 세상이다. 나는 순간순간 들떠 함성을 지른다. 5박 6일, 2,200km의 항해 끝에 바다를 좀 더 알게 되었다. 크루즈선을 타고 항해했기에 볼 수 있었던 바다다. 나와 아무 상관없는 줄 알았던 그 바다가 나를 위로해 주었다. 

*이번 크루즈 여행은 해양 실크로드의 한 구간이었다. 싱가포르를 출발해 인도네시아 수마트라섬과 말레이 반도 사이 말라카 해협을 따라 말라카, 포트 클랑, 페낭을 지나 안다만해에 접한 푸껫까지 북상했다가 싱가포르로 돌아온다. 5박 6일간 대략 2,200km를 항해하는 일정이다. 동북아시아 바닷길과 동남아시아 바닷길, 두 개의 해양 실크로드가 만나는 곳이 바로 말라카 해협이다.


●Maritime Silk Road
항해하라, 여행하라


여정을 그려 본다. 2,200km 구간을 비행기 아닌 오로지 배로 이동하는 것을 그려 보았을 뿐인데 좋은 시라도 읊은 듯 가슴이 두근댄다. 보통 배가 아니다. 순전히 여행이 목적인 크루즈선을 타고 말라카 해협이란 길을 간다. 이 길은 인도양과 태평양을 가장 가깝게 잇는 해로이자 아시아 식민지 역사가 시작된 비운의 해로다. 누군가는 이 길을 ‘지구의 지름길’이라 부른다. 이 길을 통하지 않으면 1,600km를 더 우회하기 때문이다. 

이 길은 지구 어디에나 있는 단순한 바닷길이 아니다. ‘해양 실크로드’의 한 구간이다. 동북아시아 바닷길과 동남아시아 바닷길, 두 개의 해양 실크로드가 그것인데 이 두 길이 합쳐지는 곳이 있었으니 그곳이 바로 말라카 해협이다. 비단에서 원유로, 오가는 물품은 달라졌지만 동서양 교역로서의 의미는 여전하다. 바닷길을 통해 향신료, 도자기, 차만 교역된 게 아니라 어떤 나라는 운명조차 뒤바뀌었다. 해양 실크로드가 없었다면 인도네시아와 말레이시아, 브루나이가 과연 이슬람을 국교로 삼게 되었을까. 


누군가는 지중해를 나서 홍해를 거쳐 말라카 해협을 지나 신라와 고려에 다다랐고, 누군가는 반대로 섬라곡국(暹羅斛國, 태국)을 지나 대식국(大食國, 아라비아)에 이르렀다. 돈을 벌려고 나선 길이 아니라 저 바다 너머에 어떤 세상이 있을까 동경하며 목숨을 걸어야 했던 길이었다. 문명도 해양 실크로드를 따라 말라카 해협을 흘러가고 흘러왔다. 

크루즈선은 밤에 가장 아름답다
크루즈선은 밤에 가장 아름답다

인생에서 가장 긴 항해


4년 전 파리 그랑 팔레 뮤지엄에서 본 ‘비행하라, 항해하라, 여행하라-루이 비통(Volez, Voguez, Voyagez-Louis Vuitton)’ 전시가 떠오른다. 1854년에서 현재까지 마차에서부터 기차, 비행기까지 진화해 온 교통수단, 그리고 이런 교통수단에 걸맞게 디자인된 루이 비통 가방, 정확히 말하면 ‘트렁크’에 관한 전시였다.

루이 비통 트렁크를 싣고 사치스런 여행을 떠난 상류층 부인이건, 망망대해 너머 식민지를 찾아 나선 제국주의자이건, 이탈리아로 그랜드 투어를 떠났던 영국이나 프랑스의 귀족 자제이건, 해양 실크로드를 오간 상인이건, 달랑 배낭 하나 맨 여행자이건, 인류 역사상 가장 거대한 교통수단인 크루즈선을 타고 이제 막 출항한 나이건, 각자의 목적은 모두 다르겠지만, 누구에게나 비행하라, 항해하라, 여행하라, 이 말은 매우 유혹적인 말이지 않았을까?

단 6일이지만 내 인생에선 가장 긴 항해다. 크루즈선에 어울릴 루이 비통 트렁크는 들지 않았지만 그보다 훨씬 근사한 겐팅 드림(Genting Dream) 크루즈선에 승선했다. 크루즈선을 타고, 크루즈선만큼이나 웅장하게 갈라지는 뱃길로 지구 위에 그림을 그린다. 이내 사라질 그림이라 눈길이 떨어지지 않는다. 꼼짝 않고 뱃길을 보고 또 바라본다. 이내 사라진다 하더라도 순간이나마 지구라는 별에 내 궤적을 남기는 순간이다. 

페낭섬 크루즈 터미널에 정박한 겐팅 드림
페낭섬 크루즈 터미널에 정박한 겐팅 드림

●Port of Call  Penang 
저스트 유니크한 조지타운

항해 2일째, 싱가포르에서 출항한 지 19시간만인 낮 12시, 페낭 크루즈 센터(Swettenham Pier Cruise Terminal)에 도착했다. 어제 저녁 먹고 잠자리에 들었는데 어느새 첫 기항지에 도착했다. 나는 가만있지만 내 몸은 어딘가로 이동해 버렸다. 크루즈 여행의 매력이다.

페낭섬 크루즈 터미널에는 두 대의 크루즈선이 정박해 있다. 한 대는 아이다(AIDA), 그중에서도 ‘아이다벨라(AIDAbella)’다. 독일 배다. 지난겨울 유럽에 머물 때 지중해 크루즈를 타겠다고 눈여겨봤던 배였는데 그 배를 여기서 만났다! 그런데, 아이다벨라는 유럽에서 여기까지 그 먼 길을 왔단 말인가 의아했는데 알고 보니 모항이 방콕이다. 방콕을 출발해 14일 동안 말레이시아 반도와 베트남을 한 바퀴 돈다. 그런데 어른이 아이를 내려다보듯 아이다가 저 아래로 보이는 걸 보니 새삼 겐팅 드림이 얼마나 큰 배인지 알겠다. 

현재의 비치 스트리트 인근 옛 페낭 항구의 모습
현재의 비치 스트리트 인근 옛 페낭 항구의 모습

말레이시아에 입국하는데 여권은 필요 없다. 내 이름이 쓰인 캐빈 카드 한 장으로 모든 게 이루어진다. 여권 없이 어느 나라에 입국하고 출국하기도 처음이다. 여권에는 아무 흔적도 남지 않아 좀 서운하지만 이것도 수천명의 관광객을 실은 크루즈선의 위력이라면 위력이다. 페낭에서 하선했다가 다시 승선하는 시간은 밤 10시30분이고, 배는 밤 11시30분 출항한다. 시간이 충분한데도 문득 배를 못 타면 어쩌지 하는 공연한 걱정을 하다 친절한 안내문을 보았다. ‘만에 하나 배를 놓치면 다음 기항지로 비행기를 타고 오세요. 물론 본인 돈으로 오셔야죠.’  


강한 햇볕을 피해 오후 2시쯤 배에서 내렸다. 기항지 투어를 신청할 수도 있지만 혼자 편하게 둘러보기로 했다. 마침 페낭의 주도인 조지타운은 항구에 바로 접해 있다. 그런데 말레이시아의 항구 이름이 영국 국왕 조지 3세의 이름을 딴 건 여전히 어색하다. 


페낭에 내리기 전 배에서 바라본 페낭은 고층빌딩이 즐비한 신시가지 일색이다. 뜻밖이다. 그러고 보니 페낭 집값이 말레이시아에서 가장 비싸다는 얘기를 말레이시아 친구에게 들은 적이 있다. 말레이시아에서 두 번째 비즈니스 시티로 불릴 만큼 경제가 번성한 곳이다. 수백년간 페낭은 전 세계 선박의 기항지(Port of Call)였다. 500년 이상 동서양의 교류가 지속된 곳이고 조지타운에는 그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조지타운을 흔히 말레이시아에서 가장 잘 복원된 올드 타운이라고 설명한다. 


배에서 내려 비치 스트리트(Beach Street)를 걷는데 콜로니얼 스타일의 빌딩들, 말레이어, 중국어, 영어 등 다양한 언어로 쓰인 간판들이 이국의 정서를 자극한다. 


빅토리아 시계탑 바로 옆에는 콘월리스 요새(Fort Cornwallis)가 있다. 콘월리스는 1700년대 벵갈 총독인데 여기에 자기 이름을 남겼다. 말레이시아의 이슬람 타운이었던 조지타운은 16세기 중반 포르투갈의 지배로 영향을 받았고, 1963년 말레이시아로 편입되기 전까지 페낭은 200여 년간 영국의 지배를 받았다. 캡틴 프란시스 라이트(Captain Francis Light)는 1786년 페낭을 영국 식민지로 삼고 조지타운을 수도로 정했다. 18세기 후반부터 영국의 지배를 받으며 영국적 색채가 더해졌다. 동남아시아 지역에서 좀처럼 볼 수 없는 독특한 건물들이 있는 이유다.

페낭에는 리틀 인디언 구역도 있다
페낭에는 리틀 인디언 구역도 있다

스트리트 오브 하모니의 현재 

하지만 유럽의 흔적이 페낭의 전부는 아니다. 말레이시아는 이슬람 국가이지만 모스크뿐만 아니라 교회도 있고, 중국 사원, 태국 사원, 미얀마 사원, 힌두 사원도 있다. 페낭으로 유입된 중국인 이민자들은 고무, 코코넛 플랜테이션에서 일했는데 현재의 클랜 제티(Clan Jetties)가 바로 중국계 이민자들의 거주지였다. 가난했던 이들은 땅에 집을 갖지 못하고 바다 위에 집을 짓고 살았다. 페낭은 말레이시아에서 중국인이 가장 많이 사는 곳이지만 페낭 로드나 추리아 스트리트(Chulia Street) 같은 리틀 인디아 구역도 있다. 전에는 추리아 스트리트에 트램이 다녔고 경찰서가 있었다. 이렇듯 페낭은 말레이시아와 중국, 인도, 영국 등 유럽인이 뒤섞인 다채로움이 큰 곳이다. 2008년 7월에 조지타운 전체가 ‘말라카 해협의 역사도시’로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이유다. 

페낭 추리아 스트리트는 여행자 거리다
페낭 추리아 스트리트는 여행자 거리다

대여섯 시간 정도 조지타운을 둘러보는데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현재의 페낭을 말하는데 1786년부터 200년 동안 페낭을 지배했다는 영국의 흔적에 대해서만 주로 얘기했던 것. 페낭을 보고 ‘동양의 진주’라는 식으로 말하는 건 식상하지만, ‘스트리트 오브 하모니(Street of Harmony)’란 별명은 여러 생각을 하게 한다. 말레이시아가 실제로 하모니를 이루며 사는지 의문이 들었기 때문이다. 관광객들이 약속이라도 한 듯 찾아간다는 벽화 거리도 의아하다. 한두 개의 거리 그림이 마치 페낭의 대표적인 이미지인양 소비된다. 

페낭에는 모스크,절, 인디언 사원이 공존한다
페낭에는 모스크, 절, 인디언 사원이 공존한다

어둠이 내리기 시작하자 날이 좀 선선해졌다. 그래 봐야 여전히 27도를 가리키지만. 내 여정은 아직 끝나지 않았는데, 낮이고 밤이고 뮤지엄 같은 ‘저스트 유니크(Just Unique)’한 조지타운을 떠나 어느새 배로 돌아갈 시간이 돼 버렸다. 


●On The Voyage  
바다, 출렁이는 지구의 껍질


어둠이 채 가시기도 전에 잠에서 깨어 갑판으로 나갔다. 말라카 해협에서 꼭 한 번 일출을 보고 싶었다. 항해 4일째, 새벽 6시53분, 아무도 없는 8층 갑판에 나와서 바다를 바라본다. 바다와 하늘을 구분할 수 없을 만큼 주위는 새까맣다. 세상과 홀로 마주선 듯한 이런 순간이 또 있을까? 어둠 속에서도 크루즈선의 프로펠러가 가르는 물길만은 선명하다. 어둠이 걷히자 바다의 표면이 서서히 제 모습을 드러낸다. 넘실거리는 바다, 유혹하는 바다가 숨을 막히게 한다. 날은 흐려도, 비가 내려도, 천둥이 쳐도 여명의 붉은 기운은 피어난다. 몸을 흔들어 댈 만큼 바람은 거센소리를 낸다. 세찬 바람에 밀려 어디론가 날아가 버릴 것만 같은 두려움에 빠져 드는데 구름 위로 초승달이 떠오르고, 초승달 옆에선 별이 빛난다. 초승달은 어디서나 보이겠지만 바다에서 크루즈선 너머로 보이기에 특별하다.?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이런 바다, 이런 하늘을 보려고 이 배에 탔구나.’ 

4일차 기항지, 랑카위의 석양

세상에는 온갖 바다가 있지만 지금 이 바다는 나의 바다다. 길을 가는 게 아니라 바닷길을 따라 지구를 간다. 지평선 너머는 하늘이 아니라 구름이다. 바다는 구름 속으로 흘러간다. 배는 파도를 밀려가게 하고 때로는 덤벼들게 한다. 가슴이 심하게 울렁거린다. 평생 두고두고 떠오를 이 세상 최고의 사치를 누리는 순간이다. 항해를 하며 마주한 내 인생 최고의 바다다. 갈라지는 뱃길 옆으로 하얀 포말이 밀려난다. 그저 파도일 뿐인데, 그저 포말일 뿐인데 가슴이 시려 온다. 파도가 치는 게 아니라 지구의 껍질이 출렁인다. 말라카 해협의 껍질, 안다만해의 껍질이다. 500년 전 이 바다를 지나간 이들을 떠올려 본다. 그들이 포르투갈을, 네덜란드를, 영국을 떠나 말라카 해협까지 항해한 나날을 생각한다. 식민지를 찾아 나선 탐욕스런 그들로선 영광의 나팔 소리만큼 고난의 시간이었을 것이다. 그들이 500여 년 전 단지 배를 타고 여기까지 왔다는 사실만으로 경이롭다. 배를 타고 고작 며칠간의 항해를 한다고 식민주의자, 제국주의자에게 감정이 이입되다니…, 나도 놀랐다. 


아침 7시, 음악이 나오기 시작했다.?여느 휴양지 같은 크루즈의 하루가 시작되었다. 불쑥 크루즈 보안요원이 뒷모습을 보이며 내 앞을 지나갔다. 장엄한 바다보다 그의 모습이 더 비현실적이다. 그만큼 이 순간이 비현실적이다.

 

●Port of Call  Phuket, Langkawi
100년 전, 사이노 콜로니얼 거리

항해 3일째. 말레이시아 페낭을 출발해 다시 하룻밤이 지나고 낮 12시경 겐팅 드림은 태국 푸껫섬 인근에 정박했다. 수심이 낮기 때문인지 접안시설이 없는 건지 겐팅드림은 더 이상 비치에 접근하지 않는다. 태국은 꽤 자주 왔지만 배를 타고 오긴 처음이다. 데크(Deck) 4층으로 내려가 탠덤보트를 타고 빠통 비치로 향한다. 말레이시아를 떠나 태국에 입국하는데도 여권 없이 캐빈 카드 하나 달랑 목에 걸고 토트백 하나 어깨에 걸친 채 작은 보트를 탔다. 입국 심사 없는 입국이다. 크루즈에서 진행하는 기항지 투어 대신 비치에서 스쿠터를 빌려 시동을 걸었다. 빠통 비치 인근에는 관광객이 정말 많다. 정실론(Jungceylon) 쇼핑센터, 까론 비치(Karon Beach)와 까따 비치(Kata Beach) 같은 빠통의 관광지는 다 생략하고, 관광객들 무리에서 좀 벗어나고 싶었다. 

푸껫 올드타운에서 볼 수 있는 중국-포르투갈 스타일의 건물 2
푸껫 올드타운에서 볼 수 있는 중국-포르투갈 스타일의 건물

포르투갈인과 중국인이 탐낸 그것 


현재 기온은 33도, 하지만 체감온도는 40도쯤 되는 것 같다. 목적지는 18km 정도 떨어진 푸껫 올드 타운이다. 길을 몰라 두어 번 헤매며 갔더니 거의 한 시간쯤 걸렸다. 올드 타운에 도착하자 제일 먼저 알록달록한 집들이 눈길을 끈다. 거리 곳곳에 파스텔 톤 형형색색의 집들이 늘어섰다. 푸껫에 미친 유럽의 영향을 보여 주는데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중국과 포르투갈 양식이 뒤섞인 집들이다. 얼핏 페낭 조지타운과 비슷해 보인다. 1920년대까지 수백 년 동안 푸껫의 주요산업은 주석광산이었다. 현재의 올드 타운에서 채 몇 킬로미터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에 거대한 광산이 있었다. 

푸껫 올드타운에는 감각적인 카페, 상점이 많다
푸껫 올드타운에는 감각적인 카페, 상점이 많다

포르투갈뿐 아니라 영국 등 유럽인들은 16세기 이래 푸껫의 주석을 찾아 몰려들었다. 주석 광산에서 채굴된 광석은 푸껫의 항구를 통해 화물선에 실려 말라카 해협을 지나 유럽으로 빠져나갔다. 화물선이 오가는 사이 태국에는 포르투갈 문화 등 유럽문화가 빠르게 스며들었고 많은 포르투갈 사람들이 푸껫에 살기 시작했다. 


주석 광산이 아니더라도 18세기 이전부터 푸껫은 유럽, 특히 포르투갈 상인과의 교류가 활발한 무역항이었다. 푸껫이 무역항으로 번성하면서 점점 더 많은 포르투갈인들이 찾아왔고, 이들은 ‘사이노 포르투기스(Sino-Portuguese)’ 또는 사이노 콜로니얼(Sino Colonial)’이란 독특한 문화를 만들어 냈다. ‘사이노(Sino)’는 중국을 의미한다. 

랑카위 크루즈 터미널
랑카위 크루즈 터미널

18세기 주석 광산이 번성하면서 주석을 찾아온 건 중국인들도 마찬가지다. 이들은 현재의 쏘이 로마니(Soi Romanee)에 주로 모여 살았는데 이들이 큰 영향을 미친 탓에 푸껫 올드 타운은 ‘푸껫의 차이나타운’으로 불리기도 한다. 18세 후반에 이르러 푸껫 주석 광산의 대부분은 중국 푸젠성 출신의 호키엔족에게 넘어갔고 이들은 ‘숍 하우스’라고 불리는 집을 짓고 살았다. 말 그대로 장사도 하고 살림도 하는 집이었는데 포르투갈의 영향도 받았기에 ‘사이노 포르투기스 숍 하우스(Sino-Portuguese Shop Houses)’라고도 불린다. 


팡나 로드(Phang Nga Road)의 ‘온 온 호텔(On On Hotel)’은 로비의 이국적 아우라가 단번에 눈길을 끌었는데 알고 보니 푸껫 올드 타운을 말할 때 빠지지 않는 호텔이었다. 1929년에 문을 연 푸껫 최초의 호텔이 바로 이곳이다. 당시 룸이 다섯 개였던 호텔의 숙박비는 80사탕(Satang), 1바트(36원)도 안됐다. 현재 온 온 호텔 오너의 할아버지가 주석 중개상을 하며 번 돈으로 여러 나라 무역상들을 위해 만든 숙소가 바로 온 온 호텔이다. 중국어로 ‘언 언’은 ‘모든 방문객에게 행복을’이란 의미라고. 아, 그런데 너무 덥다. 이른 아침, 고요한 이 길을 걸을 수 있으면 거리의 정취에 좀 더 흠뻑 빠질 텐데 그럴 시간이 없다. 

랑카위 세낭비치에 접한 시내 전경
랑카위 세낭비치에 접한 시내 전경

기항지 투어의 딜레마 


말라카 해협 항해 4일째 아침 10시, 랑카위에 도착했다. 크루즈 센터로 입항하는데 여러 섬이 겹친다. 랑카위가 100여 개 섬으로 이루어진 군도라는 걸 눈으로 확인한다. 배에서 점심을 먹고 하선해, 택시를 타고, 크루즈 직원이 추천한 세낭 비치(Cenang Beach)로 갔다.

그런데 푸껫에 이어 랑카위도 너무 덥다. 태양이 뜨거워 걷는 게 힘들 정도다. 세낭 비치에는 면세 쇼핑몰이 있지만 거기서 시간을 보내고 싶진 않았다. 크루즈선에서 진행하는 투어를 신청했어야 했나, 뒤늦은 후회도 했지만 낯선 랑카위 거릴 멋대로 걷는 것도 좋았다. 세낭 비치에도, 카페에도 사람은 많지 않다. 가는 곳마다 수많은 관광객이 북적대는 푸껫과는 비교가 안 된다. 세낭 비치는 지중해의 광선처럼 하얗게 빛난다. 랑카위에서 데이 투어도 아니고 결국 한나절 정도 시간밖에 없는지라 역시 아쉽다. 시간은 짧고 관광객 또는 크루즈 승객만 북적대는 곳에서 시간을 보내고 싶지도 않아 여기까지 왔는데 또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겠다. 한다고 했지만 기항지에 대한 공부가 부족했다. 

포트 클랑은 현대 해양 실크로드의 중요한 항구다
포트 클랑은 현대 해양 실크로드의 중요한 항구다

항해 5일째 낮, 포트 클랑의 부스테드 크루즈 터미널(Boustead Cruise Centre)에 정박했다. 이번에는 기항지로 하선하는 대신 크루즈선 안에서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잠시 하선해 포트 클랑(Port Klang) 땅을 밟긴 했다. 육지 바람 쐬러 잠시 배에서 내렸다가 금방 배로 돌아왔다 할까. 포트 클랑은 우리 식으로 말하자면 돼지갈비탕과 비슷한 ‘바쿠테(Bak kut teh)’가 유명하다는데 아쉽게도 다음을 기약한다.


클랑섬 자체는 길이 13km, 너비 6km밖에 되지 않고, 노스 클랑 해협으로 본토와 구별되는데 무엇보다 포트 클랑 기항지 투어의 대표적인 목적지인 쿠알라룸푸르가 너무 멀다. 

 

●On The Voyage  
낙타 대신 크루즈로 가는 
바다 실크로드

훅 지나가는 선상의 낮과 밤  

배에서 좀 쉬다 보니 지난 며칠을 복기하며 지나온 항로, 말라카 해협의 의미를 정리한다. 말라카 해협은 흔히 세계 경제의 생명선 같은 항로라 불린다. 여기를 지나지 않고 우회하면 3일이 더 걸리기 때문이다. 매년 5만척 이상의 각국 선박이 이곳을 지나간다. 전 세계 선박이 실어 나르는 화물의 1/4 정도가 이 항로를 지나는 셈이다. 우리나라에 수입되는 원유의 90%도 이곳을 지난다. 우리나라에서 유럽으로 수출하는 상품 대부분도 이곳을 지난다. 말라카 해협이 현대의 실크로드로 불리는 이유다. 아시아 대륙을 관통한 고대의 실크로드를 통해 비단과 보석, 이슬람이 오갔다면 말라카 해협을 통해선 원유가 오간다.

 

겐팅 드림을 타고 5박 6일간 말라카 해협을 항해했다
겐팅 드림을 타고 5박 6일간 말라카 해협을 항해했다

현대의 실크로드이지만 해양 실크로드란 의미도 갖는다. 5박 6일 겐팅 드림 크루즈는 낙타 아닌 배를 타고 해양 실크로드의 한 구간을 지나는 여행이다. 동서양을 잇는 길이 쉬울 리 없다. 놀랍게도 최근 전 세계 해적 출몰지는 소말리아가 아니라 서아프리카와 동남아시아, 특히 말라카 해협이다. 아직까지는 총기로 무장하진 않았다지만 느리게 항해하는 상선을 노린 해적선이 출몰한다는 곳이다. 말라카 해협에서 폭이 가장 좁은 곳은 65km, 이 중 배가 다닐 수 있는 구간은 2.5km에 불과한데 수심마저 20~30m 정도로 낮아 속도를 내기 어렵기 때문이다. 나는 안전한 크루즈에 승선한 주제에 순간이나마 21세기 바다를 누비는 모험가, 노매드 또는 무역상의 기분에 젖어 본다. 

처음에는 제법 길게 느껴졌던 6일간의 항해가 어느새 끝나 간다. 아쉽다. 5박 6일의 크루즈를 타 보니 이젠 14일간의 크루즈를 살펴본다. 아직 배에서 내리지 않았는데도 말이다.

 

▶travel  info
Singapore & Malaysia Cruise

Itinerary
겐팅 드림 크루즈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태국 5박 6일 
1일 싱가포르 출항, 2일 페낭, 3일에 푸껫, 4일 랑카위, 5일째 포트 클랑 도착, 6일째 정오 싱가포르에서 하선한다. 출항시간은 오후 5시에 출항하지만 체크인 마감은 3시30분이다. 매일 밤 캐빈으로 배달되는 선상 신문 <Dream Daily>를 통해 오늘의 하이라이트, 공지사항, 각종 쇼 정보, 아침·오후·저녁별 각종 액티비티 스케줄 체크는 필수다.  

Reservation  &  Cost  
크루즈 상품 요금은 나라마다 가격이 다르다. 한국어 홈페이지에선 종종 ‘Buy 1 Get 1’ 같은 프로모션이 뜬다.  2인 기준 5박 6일 싱가포르·말레이시아·태국 크루즈의 경우 발코니 캐빈은 1,234USD, 딜럭스 발코니 캐빈은 1,406USD인데 여기에 항구세 170USD가 포함된다. ‘크루즈는 비싸다’는 선입견 때문에 종종 이 금액에 대해 혼동하는 경우가 있는데 위 금액은 1인이 아니라 2인 기준이다. 유료 와이파이 이용도 가능하다.  
드림 크루즈 한국사무소 www.dreamcruises.co.kr
전화: 02 733 9033  

Navigator
말라카 해협은 말라카에서 수마트라섬 사이의 바다이자 서남아시아와 동남아시아의 경계다. 길이는 1,000m에 달한다 해도 수심은 20~30m밖에 되지 않는다. 수심만 보면 별거 아닌 것 같지만 전 세계 해상 운송량의 20%를 차지한다. 인도양과 태평양을 잇는 최단 해로이기 때문이다. 겐팅 드림 5박 6일 일정은 대략 2,200km를 항해한다. 

Check In & Out
싱가포르 마리나 크루즈 센터에서 체크인을 하고 안으로 들어가면 입국장이 나온다. 싱가포르에서 출국을 하고 2일째 페낭에 도착해 다시 말레이시아로 입국한다. 3일째는 태국 입출국, 4일째 다시 말레이시아 입국, 마지막 날인 6일째 다시 싱가포르로 입국하니 6일간 거의 매일 입출국을 반복한다. 여권 없이 승선 카드만으로 입출국 심사가 대체된다.

Port of Call Tour
기항지 투어는 7~8시간 정도 배에서 내려 관광지를 둘러보고 돌아오는 식이다. 크루즈에서 진행하는 기항지 투어를 예약해 참가할 수도 있고, 스스로 둘러볼 수도 있다. 기항지 투어마다 테마가 다르고, 활동량에 따라 1에서 3단계까지 액티비티 레벨도 다르니 자신에게 딱 맞는 투어가 무엇인지 살펴보는 게 좋다. 선내 데크 6에 기항지 투어데스크가 있는데 한국인 직원도 근무한다. 

Dining
겐팅 드림호의 모든 승객은 드림 다이닝룸, 겐팅 다이닝룸, 더 리도 뷔페 등 3곳의 레스토랑에서 매끼 식사를 무료로 즐긴다. 아침, 점심, 저녁은 물론 오전 10시부터 11시까지 차와 커피 서비스, 오후 3시부터 4시까지 애프터눈티 그리고 24시간 동안 운영되는 스낵바를 이용할 수 있다. 기본적으로 인터내셔널 코스를 선택하면 무난하다. 차이니스 스타일 조식도 좋다. 

tip
1인 1박당 21SGD가 부과된다. 외출했다 돌아왔을 때 객실의 산뜻하고 중후한 공기를 느끼는 값이다. 

ship inside
겐팅 드림의 중량은 15만1,300톤, 전장과 전폭은 335m, 40m, 캐빈 수는 1,674개다. 총 탑승인원은 3,352명, 총 승무원 수는 2,016명이다. 2016년 11월 첫 출항한 크루즈선으로 객실의 70% 이상이 발코니 객실이다. 2대의 잠수정, 워터슬라이드, 영화관, 볼링장, 암벽장, 농구장, 조깅 트랙 등 다양한 액티비티를 제공하는 최신 선박이다. 드림크루즈 한국어 홈페이지에서 겐팅 드림 도면을 다운로드할 수 있으니 승선 전 살펴보기를 권한다. 

 

글·사진 박준  에디터 천소현 기자
취재협조 겐팅 드림 크루즈 www.dreamcruis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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