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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올레꾼이 된다

  • Editor. 최아름
  • 입력 2019.05.02 09:50
  • 수정 2019.05.03 15:33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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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 에너지를 가득 받아 가는 올레꾼
초록 에너지를 가득 받아 가는 올레꾼

2만6,572보, 2만7,685보.
올레길을 처음 나선 이의
걸음 수는 차곡차곡 쌓여 간다.
그렇게 올레꾼이 된다.

●신구 코스
오모테나시와 함께 힘찬 출발을

혼자만 긴장했다. 팔자에 없던 걷기 운동을 앞두고 말이다. 전날 밤에는 그 좋아하는 생맥주도 기어코 거절했다. 상상만으로도 발바닥이 저릿저릿한 기분이다. 가지고 있는 양말 중 가장 폭신한 녀석을 골라 신고 런닝화의 끈을 단단히 동여맸다. 규슈올레 신규 코스를 거닐 준비를 마쳤다.

염소마저 올레 리본을 달았다
염소마저 올레 리본을 달았다

신구(新宮) 코스는 고령화로 한적해진 마을을 되살려 보고 싶다는 ‘신구마치 오모테나시 협회’의 ‘이케다데페이’씨의 소망으로 시작됐다. 규슈올레의 22번째 코스이며 후쿠오카현의 6번째 올레길이다. 후쿠오카시(福岡市)와 기타규슈시(北九州市) 사이에 끼어 있는 신구정(新宮町) 지역은 도시와 자연을 아우르는 여행을 하기에 적합하다. 신구 코스는 바다와 산, 숲, 역사적인 거리가 모두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오감을 이용해 거닐어야 한다. 야트막한 산을 한 번 넘고 나면 비교적 수월하게 걸을 수 있다. 난이도는 중-하, 총 길이는 11.9km. 오전에 열린 개장식 행사에는 900여 명이 모여 신구 코스의 시작을 축하했다. 초청된 사람들, 선착순 행사 신청 접수를 마친 일본인, 그리고 순서에 들지 못했지만 올레길 걷기를 함께하겠다는 현지인들이 자리를 가득 메웠다. 붐비는 인파 속에서, 생기로움이 느껴졌다.


우르르, 모두가 출발했다. 평평했던 도로는 산속으로 이어졌고 삼삼오오 대화를 나누던 사람들은 좁은 길을 따라 일렬로 늘어섰다. 90m가 조금 넘는 산본마쓰야마(三本松山)에 올라 다치바나산(立花山)이 걸쳐진 절경을 감상하기 위해서다. 발걸음이 나름 가볍다. 마치 간이라도 보는 듯, 얕은 오르막길이 종아리 근육을 자극한다. 

길을 잃었다면 올레 표지판을 따라가면 된다
길을 잃었다면 올레 표지판을 따라가면 된다

곧 이곳저곳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신구 코스의 시작을 알리는 절경이 펼쳐졌기 때문이다. 다치바나산 아래로 알찬 과육을 자랑하는 다치바나 귤 밭이 펼쳐진다. 핑크빛 벚꽃이 만개할 때쯤, 완벽한 풍경화 한 점을 감상할 수 있겠다. 아름다운 풍경을 마주한 이들에겐 오모테나시가 주어진다. 오모테나시(おもてなし)는 ‘접대’를 뜻하는 모테나시(もてなし)에 오(お)를 붙인 말로, ‘아주 극진히 상대를 대접하는 마음’을 뜻한다. 올레길 참여자들은 미리 받은 6장의 오모테나시 쿠폰으로 중간 중간 간식거리를 받을 수 있다. 첫 번째 오모테나시는 딸기 밀크 크레이프였다. 다치바나 귤과 함께 신구지역의 특산품으로 꼽히는 아마오우(あまおう)를 알리기 위한 간식이다. 크레이프를 한 입 가득 베어 물곤 대나무 숲으로 발길을 옮겼다. 

천황에게도 헌상된 다치바나 귤
천황에게도 헌상된 다치바나 귤

달콤함에 기분이 좋아진 이들은 서로에게 말을 건네기 시작했다. ‘힘들지 않냐, 조심해서 발을 디뎌라’ 대체로 말을 걸어 오는 이들은 한국인이었고, 눈이 마주칠 때마다 배시시 웃음 지어 주는 이들은 일본인이었다. 올레꾼들의 배낭을 들여다보는 것도 참 흥미로웠다. 규슈올레의 첫 번째 코스인 다케오(武雄)부터 작년에 문을 연 사이키 오뉴지마(佐伯 大入島) 코스까지. 코스 완주를 의미하는 배지가 배낭 곳곳에 자랑스럽게 달려 있었다. 올레의 마스코트인 간세 장식과 인형은 또 어떻고. 처음엔 전혀 중요치 않게 여기던 것들에 대한 욕심이 밀려왔다. ‘이 코스를 완주하고 배지를 받아 가방에 걸어야지’, ‘ 저 간세 인형은 어디서 팔지?’, ‘나도 완주 리본을 갖고 싶다!’ 초보 올레꾼의 욕심은 이렇게 시동이 걸렸다.

곧은 대나무, 그 사이를 걷는다
곧은 대나무, 그 사이를 걷는다

일요시장에서 구한 나의 올레 친구


오직 일요일, 신구 코스에는 시장이 열린다. 과일, 생선, 채소, 신구정의 특산품 등이 주요 메뉴다. 시장의 입구에서 따뜻한 일본식 감주를 한 잔 받았다. 오모테나시 행사와는 전혀 상관없는, 지역 주민들의 축하선물이었다. 주기적인 당 충전에 힘이 났다. 작은 시장 속을 이리저리 둘러보다 상점 속 파란 양동이에 홀로 남겨진 수선화 한 다발을 구매했다. 가격도 참 착한 100엔. 계속해서 사진을 찍느라 일행과 한참 떨어진 참이었다. 그런데도 안심이 됐다. 올레길을 함께 거닐, 노란 친구가 곁에 있었기 때문이다. 

올레길처럼 맑은 아이들의 미소
올레길처럼 맑은 아이들의 미소

노란 수선화를 배낭에 걸고 열심히 걸었다. 한동안 꽃길이 계속 되었다. 아랫동네 규슈에는 벌써 꽃이 피어난 듯했다. 서울에선 아직 이르다고 생각했던 꽃을 보았다. 계절을 조금 앞서 왔을 뿐인데도 다른 세상인 듯 새롭다. 목적지까지 얼마나 더 가야 하나, 수도 없이 지도를 들여다보며 성큼성큼 움직이던 걸음을 늦춘 건 길을 대하는 올레꾼들의 자세 때문이었다. 길 위에서 만난 인연의 질문에 답해 주고, 궁금한 걸 물어 가며 남은 길을 느릿하게 거닐었다. 길에서 인연이 되고 반가운 곳에서 다시 만나는 일, 올레길의 진정한 매력이다.

파란 바다에 놓인 다홍색 간세
파란 바다에 놓인 다홍색 간세

한동안 계속되던 꽃길을 지나니 ‘다치바나구치(立花口) 지구’로 들어섰다. 역사를 느낄 수 있는 장소다. ‘다치바나구치 지구’는 100년이 넘는 세월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전쟁을 피하기 위해 직각으로 만들어진 길을 따라 늘어선 오래된 주택들은 정성스럽게 관리가 되어 정갈한 모습이다. 일본 주택 특유의 느낌도 물씬 풍겼다. 알록달록한 등산복을 입고 있는 우리가 이방인이라고 느껴졌다. 마침 주택 대문 앞을 지나치던 할머니가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우리 마을을 찾아 줘서 고맙다는 그녀의 마음, 마을만큼 아름답고 깊었다.

 

걸을수록 매력 있네!


또 한 번의 오르막, 곁에 있던 올레 동지들은 어느새 또 다른 이들로 바뀌었다. 배낭 위 수선화는 아직 향기로웠다. 두 번째 오모테나시인 크로켓을 먹은 후였다. 앞사람의 뒤꿈치를 쫓아 오르다 보니 도리이(鳥居)의 색을 본떠 만든 다홍색 간세가 반겨 줬다. 도시와 현해탄이 한눈에 들어오는 신구 코스의 뷰 포인트, 바로 ‘사랑의 언덕’이다.  


‘산본마쓰야마’보다 조금 낮은 전망대에서는 고양이섬으로 유명한 ‘아이노시마’를 조망할 수 있으며, 날씨가 좋은 날엔 ‘오로노섬(小呂島)’과 ‘이키섬(壱岐島)’도 보인다. 그루터기에 앉아 인증숏을 남기며 한숨을 돌렸다. 저릿했던 발바닥도 조금 적응이 된 듯하여 신나게 내려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마셨다는 우물, ‘다이코스이(太閤水)’ 앞에 도착했다.

드디어 세 번째 오모테나시를 받을 차례. ‘학의 알’이라는 이름을 가진 ‘쓰루노코(鶴乃子) 마시멜로’였다. 후쿠오카의 100년 전통 명과자점, ‘이시무라 만세이도(石村萬盛堂)’의 간판 상품이다. 그 맛은 ‘신구 올레길이 생각날 때 한 박스씩 사 먹어야겠다!’ 싶을 만큼 완벽했다. 사랑의 언덕에서 내려와 넓은 유채꽃밭과 작은 대나무 숲을 지났다. 걸음을 더할수록 지루할 틈이 없었다.

8.3km 지점의 오키타 중앙공원에서 도시락을 먹으며 네 번째 오모테나시를 받았다. 후쿠오카에서 맛봤던 모츠나베(もつなべ)다. 한국식 곱창전골과 비슷하지만, 그 맛이 더욱 진하다. 짭짤한 국물에 담백한 일본식 도시락을 곁들이니 궁합이 잘 맞았다. 공원엔 올레꾼들과 주말을 맞아 나들이 나온 신구정 주민들이 뒤섞였다.

걷다 만난 올레꾼 할아버지는 젊은 시절 등산을 너무 많이 해 무릎이 안 좋아져 선택한 것이 올레길이라고 말했다. 지금은 등산에 대한 미련은 싹 버리고 올레길을 더 좋아하게 되었다고. 어른도 아이도 함께 어우러질 수 있는, 다 같이 잔디밭에 앉아서 도시락을 까 먹는 재미가 있는, 간식들을 서로서로 나누어주며 웃음 짓는 일이 가능한 길, 그것이 올레길이다.

 

바다에 안겨도 돼


신구 지역에는 거대한 소나무 숲이 있다. 17세기 바닷바람과 모래로부터 농작물을 지키기 위해 약 20만 그루의 소나무 묘종을 심었단다. 그래서 이름이 다테노마츠바라(楯の松原), 즉 ‘방패 소나무 벌판’이다. 


소나무의 청량함 냄새, 맡아 본 적 있는 사람이라면 공감할 것이다. 피톤치드를 한껏 들이마시며 천천히 소나무 숲을 거닐었다. 스쳐 간 바람과 흘러간 세월만큼 굽어진 소나무의 굴곡이 숲을 더욱더 울창하게 만든다. 그 어떤 억지도 더하지 않은 모습이다. 소나무 방패를 기어코 뚫어낸 이에게는 ‘신구 해안’이라는 선물이 주어진다. 하얀 모래와 푸른 바다의 분명한 경계, 아찔한 햇빛이 비춘다. 사실 알고 있었다, 그동안의 설렘은 이곳을 위한 준비였음을. 자꾸만 마음이 울컥거렸다.

●무나카타 오시마 코스
대한해협을 옆구리에 끼고 들숨, 날숨

‘무나카타 오시마 코스’는 2018년, ‘사이키 오뉴지마 코스’가 탄생하기 전까지 유일하게 배를 타고 들어가야 하는 섬 올레였다. 세계문화유산 후보지인 오시마섬은 후쿠오카현에서 가장 큰 섬이다. 그러니 섬을 한 바퀴 돈다는 것 자체로 큰 의미를 찾을 수 있는 셈이다. 

무나카타 대사의 모습
무나카타 대사의 모습

오시마섬은 일본 신화에 등장하는 ‘무나카타의 세 여신’을 숭배한다. 무나카타 오시마 코스 초입에 위치한 신사, ‘무나카타 대사’는 일본에 있는 6,400여 개의 신사 중 총본사다. 교통안전을 기원하는 곳이라 관련된 부적을 발급받을 수 있는데 후쿠오카현에서는 대부분이 새 차를 구입한 뒤 이 부적을 붙인다고 한다.

신사를 둘러보고 나면 본격적인 등산을 시작할 차례다. 224m의 미다케산(御嶽山)을 오르는 데는 필요한 시간은 약 40분. 베테랑 올레꾼들 사이에서 뒤처지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앞만 보며 걸었다. 그러니 주변 풍경이 들어올 리가. “저기, 숲속 너무 예쁘지?” 어느 올레꾼이 건넨 한마디와 함께 상쾌하고도 차가운 공기가 느껴졌다.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정복하지 말고 이 순간 그대로를. ‘자연 속을 걸으며 행복하자’라는 올레의 정신을 다시 새겨야 할 순간이다. 전망대까지 오르고 나니 한시름 놓였다. 전망대 아래쪽으로 코스를 단축할 수 있는 지름길이 있었지만, 가뿐히 무시하고 정식 코스로 향한다. 신들의 섬이라고 불리는 ‘오키노시마(沖之島)’가 내려가는 오솔길을 장식한다. 여성은 출입할 수 없다는 것이 영 의문스럽지만 섬 자체가 멋진 건 별개의 문제다.  

깡통을 흔들면 멧돼지가 싫어하는 소리가 난다
깡통을 흔들면 멧돼지가 싫어하는 소리가 난다
섬 올레의 매력, 어디를 가나 바다
섬 올레의 매력, 어디를 가나 바다

대한해협을 옆구리에 두고 올록볼록한 길들을 지났다. 산을 한번 오르니 그 다음부터 몸이 무중력 상태인 듯 가볍기만 하다. ‘무나카타 오시마 코스’의 하이라이트 ‘풍차 전망대’와 ‘포대지터’에 다다랐다. 포대지터는 1936년 규슈 연안의 방위를 강화하기 위해 만들어졌지만 단 한 번도 전투에 사용되지 않았다. 오시마섬 최고의 경치를 자랑하는 풍차 전망대는 완벽한 위치에 자리한다. 올레길을 닦을 때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이 놀라울 정도로. 목장으로 운영되었을 때 만들어져 지금은 올레꾼들의 포토존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이토록 낭만적인 길은 제주도와 닮아 있어 규슈올레길 중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코스로 꼽힌다는데, 한국 올레꾼들은 그래도 원조가 최고란다. 문득 제주올레도 거닐고 싶은 마음이 퐁퐁 솟는다.

●야메 코스
우린 다시 한 번 길 위에서, 올레!

야메(八女) 코스, 쉽사리 잊지 못할 코스다. 바다도, 높다란 전망대도 없는데 숨 한 모금에 낭만이 벅차올랐던 기억 때문이다. 2014년 문을 연 야메 코스는 잔잔한 어쿠스틱 음악을 연상케 한다. 절정이 없다. 흐르는 바람을 따라 언덕을 오르는가 싶으면 고요한 오솔길이 시작되고, 그 뒤로는 풍광에 업혀 녹차 바람을 타고 휘휘 거닐면 그만이다. 걷는 내내 따스한 공기가 함께한다. 야메 코스의 본격적인 시작은 ‘도난잔고분(童男山古墳)’이었다. 야메 지역에 있는 약 300개의 고분 중 가장 마지막에 만들어진 고분에서는 차가운 공기가 느껴졌다. 석실은 직접 들여다볼 수 있는데 길이가 무려 18m나 되어 2명은 거뜬히 들어갈 수 있었다. 

사과식초 한잔으로 에너지 충전
사과식초 한잔으로 에너지 충전

지금은 벌판이 되어 버린 이누오성터(犬尾城跡)를 지나 하이라이트인 ‘야메 중앙 대다원’에 도착했다. 갑작스레 새파란 녹차 밭이 등장하니, 올레꾼들의 표정엔 ‘그래, 이거지’ 하는 느낌이 묻어났다. 야메 코스는 올레꾼들의 애정이 특히 묻어 있는 코스다. 걷는 내내 향기로운 녹차 밭이 따라다니기 때문이다. ‘야메차’는 가고시마의 ‘지현차(知賢茶)’와 함께 규슈 지역의 명차로 꼽힌다. 녹차 중 최고로 꼽히는 ‘옥로(玉露)’를 주로 만들어 내는데, 차밭에 안개가 생기는 특이한    지형적 조건이 태양광을 적당히 차단하고 아미노산 생성을 촉진시킨다. 무려 전국 옥로 생산량 중 50%를 맡고 있다. 

걷는 내내 볼 수 있는 푸른 녹차 밭
걷는 내내 볼 수 있는 푸른 녹차 밭
석실을 들어가 볼 수 있는 도난잔고분
석실을 들어가 볼 수 있는 도난잔고분

아름다운 녹차 밭 때문일까, 아니면 이 길의 끝이 다가왔음을 예견한 탓일까, 모든 올레꾼들은 느릿하게 걸었다. 규슈올레는 그랬다. 보이는 게 다가 아니었고, 끝날 때까지 끝난 것이 아니었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대자연을, 오래도록 쌓여 온 역사를, 마을을 지키고 있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완벽히 ‘풍덩’ 빠져 버렸다, 세상에서 가장 건강한 올레길 중독에.  

 

글·사진 최아름  에디터 트래비
취재협조 후쿠오카현 관광홈페이지 www.crossroadfukuoka.jp/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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