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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산 잡힐 듯 동해 푸른 고성

  • Editor. 김선주 기자
  • 입력 2019.06.25 09:20
  • 수정 2019.07.02 10:1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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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성통일전망대에서 바라보면 금강산도 지척이다. 정면으로 금강산 구선봉이 우뚝하고 동해 바다 위로 해금강이 우아하다
고성통일전망대에서 바라보면 금강산도 지척이다. 정면으로 금강산 구선봉이 우뚝하고 동해 바다 위로 해금강이 우아하다

남과 북, 분단과 상처, 여전히 사무치는 감정…. 
눈앞의 광경은 의심할 여지없이 또렷했지만 
아득한 정서적 거리감 탓에 볼수록 믿기지 않았다. 
이렇게 가깝구나! 고성에서 새삼 깨달았다.

고성통일전망대 오르는 길에 있는 고성지역전투 충혼탑에서 한 가족 방문객이 묵념하고 있다
고성통일전망대 오르는 길에 있는 고성지역전투 충혼탑에서 한 가족 방문객이 묵념하고 있다
고성통일전망타워 실내에서 보이는 금강산과 동해
고성통일전망타워 실내에서 보이는 금강산과 동해

●민통선 넘어 쫄깃한 여행


우리나라에서 가장 북쪽이자 가장 동쪽에 있는 전망대이니 출발지가 어디이든 대개 가장 멀기 마련이다. 고성 통일전망대. 한반도의 허리를 가로로 반듯하게 자른 38선하고도 그 위 북쪽으로 88km나 더 올라간 동해 바닷가에 앉아 있다. 휴전선까지의 거리라야 고작 3.8km, 빠른 걸음이면 한 시간이면 족할 거리다. 그야말로 북쪽으로 바짝 파고들었다. 여느 통일전망대들처럼 삼엄하거나 삭막하지는 않다. 북녘을 향해 카메라 셔터 한 번 마음대로 누를 수 없는 삼엄함, 낡은 건물과 황량한 산야뿐인 저 너머의 삭막함이 이곳에는 없다. 대신 꽤 넓은 전망대 공간을 제 맘껏 거닐 수 있는 자유로움과 금강산과 동해가 빚어내는 천혜의 절경이 반긴다. 그렇다. 이곳은 분단의 현장이기에 앞서 한반도 대자연의 아름다움을 오롯이 조망할 수 있는 여행지다. 서울 집에서 가장 먼 통일전망대지만 두 번째 여행에 나섰던 이유다. 아무 주저 없이!

통일전망타워 내에는 수많은 이들의 소원지가 재잘 댄다
통일전망타워 내에는 수많은 이들의 소원지가 재잘 댄다

초행길도 아닌데 하마터면 출입신고소를 지나칠 뻔 했다. 민간인 통제구역인 민통선 안에 있기 때문에 반드시 출입신고를 해야 한다. 도로 가에 커다란 안내문과 표지판이 노려보고 있으니 놓칠 일은 거의 없을 법도 한데, 역으로 생각하면 그냥 지나치는 이들이 많아서 안내문 크기가 그렇게 커진 것도 같다. 통일전망대에 닿기 전 10km 정도나 떨어져 있으니 그럴 만도 하다. 마침 저 앞에서 차 한 대가 되돌아 들어갔다. 십중팔구 군 검문에서 퇴짜를 맞았거나 뒤늦게 알아챈 거다. 간단하게 인적사항을 적어 제출하고 입장료(성인 3,000원)를 내니 출입신고 완료! 군 검문소는 코앞이다. 이게 뭐라고, 죄진 것도 없는데 앳된 군인에게 한없이 선량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다른 여행에서는 느낄 수 없는 쫄깃한 긴장감…. 

2018년 12월 개관한 고성통일전망타워
2018년 12월 개관한 고성통일전망타워

긴장감은 호기심으로 변했다. 저게 뭐지? 지난 번 여행에서는 볼 수 없었던 높고 세련된 현대식 건물이 전망대 있던 산등성이 고지에 우뚝했다. 알파벳 D자를 닮은, 멀리서 봐도 두드러진 외양…. 전망대를 새로 지었나? 전망대 가는 비탈길을 성큼성큼 올랐다. 옛 고성통일전망대 옆에 ‘고성통일전망타워’가 새로 생겼다. 2018년 12월말이니 손색없는 ‘신상’이다. 발길은 새것보다 옛것에 끌렸다. 오래돼 누추하지만 세월을 머금은 친숙함의 힘이다. 옛 여행의 추억도 그곳에 고스란했으니 당연했다. 

 

●북으로 바투 파고드니 금강산


1984년 문을 열었으니 30년이 훌쩍 넘었다. 연간 100만 명 이상 찾는다니 누적 관람객 수도 3,000만 명을 훌쩍 넘는다. 2층짜리 소박한 건물이지만 대형 통일미륵불과 성모마리아상, 통일 기원 범종, 전진십자철탑, 351고지전투전적비, 전차와 비행기 전시물 등이 이미 오래 전부터 동행한 덕분에 외롭지는 않다. 다만 이토록 오래됐다는 게 한반도의 아물지 않은 상처를 말해주는 것 같아 안타까울 따름이다.

고성은 세계 유일 분단국가의 갈라진 도(강원도)에 속한 분단 군이라는 아픔을 지녔다. 그깟 선 하나가 둘로 갈랐다. 1953년 휴전 당시 남쪽 고성 인구의 대부분은 이북5도 출신의 피난민이었고 1980년까지도 인구의 77%가 실향민이었다고 한다. 실향민들이 틈 날 때마다 들러 실향의 아픔을 달래던 곳이 바로 이곳 통일전망대다.

통일 염원 우체통 뒤로 북쪽을 바라보고 있는 통일미륵불이 보인다
통일 염원 우체통 뒤로 북쪽을 바라보고 있는 통일미륵불이 보인다

야외 전망 포인트에 섰다. 망향의 감정이 켜켜이 쌓였을 자리,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아름다운 풍경이 막힘없이 시원하게 펼쳐졌다. 수채화 같았다. 수채화 왼쪽 아래 부분에서 시작된 도로와 철길은 우상향 대각선으로 달렸고, 오른쪽 아래에서는 양편으로 너른 해변과 푸른 바다를 낀 해안선이 북으로 올랐다. 도로와 철길과 해안선은 얼마 못 가 한 지점에서 만났는데, 거기에서 수평선과 지평선은 갈라지고 또 합쳐졌다. 금강산과 동해 바다가 서로를 안았다. 진짜지만 가짜 같은 풍경…. 다들 탄성을 지르며 사진 찍기에 바빴다. 그 틈바구니 속에서 손자인 것 같은 젊은이의 부축을 받은 채 백발의 어르신이 미동조차 없이 하염없이 북녘을 바라보았다.


마침 날이 맑았다. 이런 날이면 금강산 1만2,000봉 중 으뜸 봉우리들인 신선대며 옥녀봉이며 채하봉 등을 볼 수 있다던데, 흐릿해서 확신할 수는 없었다. 대신 금강산 마지막 봉우리인 구선봉과 ‘바다 위 금강’ 해금강이 꼿꼿하고 우아한 자태로 달랬다. 저게 동해북부선 철도길이구나, 아 저 도로가 금강산 육로관광 버스가 줄지어 달렸던 길이구나…. 500원짜리 동전을 전망 망원경 투입구에 넣고 이리저리 톺았다.

6·25전쟁체험전시관 입구
6·25전쟁체험전시관 입구
6·25전쟁체험전시관 내부
6·25전쟁체험전시관 내부

●Dream Making Zone의 꿈


새로 생긴 통일전망타워는 옛 전망대보다 높아서인지 마치 상공에서 내려다보는 것 같은 색다른 조망미를 선사했다. 해발 70m 고지에 세워진 높이 34m의 전망타워, 1984년부터 한 자리를 지켜온 옛 통일전망대의 역할을 이어받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밖에서 보면 건물은 가운데가 뚫린 알파벳 D자를 닮았는데, DMZ의 D를 형상화한 것이라고 한다. 전시관, 교육실, 홍보관, 실내외 전망대가 이 3층 타워를 촘촘하게 채웠다. ‘통일되면 평양냉면 먹으러 가즈아’, ‘통일 되면 기차타고 런던에 갈 거예요.’ 수많은 이들의 소원지가 홍보관 벽면에서 알록달록 재잘댔다.

DMZ박물관 입구
DMZ박물관 입구

북녘의 산과 바다를 조망하는 데서 멈출 일은 아니다. 왜 남과 북으로 분절됐는지, 어떤 아픔인지, 무엇을 소망해야 하는지…. 진중한 상념은 마땅하고 당연하다. 6·25전쟁체험전시관과 DMZ박물관은 그 관문이다. 과거지만 미래를 말하고 전쟁에서 말미암았지만 평화를 지향한다. 6·25전쟁체험전시관으로 향했다. 전망대 주차장 끄트머리 쪽에 있고 외관도 이렇다 할 게 없어 자칫하면 그냥 지나칠 수 있다. 그래서일까? 전시관 앞 퇴역 탱크와 6·25라는 글자가 유독 선명하고 크게 느껴졌다. 전쟁을 기록한 옛 사진과 영상물은 참혹했다. 그래서 지금의 일상이 새삼 고마웠고 지속되기를 바랐다. 

DMZ박물관에서는 과거 남과 북이 서로에게 뿌렸던 심리전단지들도 볼 수 있다
DMZ박물관에서는 과거 남과 북이 서로에게 뿌렸던 심리전단지들도 볼 수 있다

휘익 보면 20~30분이면 족한 6·25전쟁체험전시관과 달리 DMZ박물관은 규모가 커 1~2시간은 할애해야 한다. 2009년 8월14일 개관했으니 올해로 10주년이다. 유료로 운영되다가 2018년 6월1일부터 무료 관람으로 개방됐다. 군 검문소를 지나 전망대 가는 도중에 있으니 아마 우리나라 최북단 박물관일 것 같다. DMZ에 초점을 맞춘 박물관이다. 무엇보다 DMZ 뜻풀이가 맘에 쏙 들었다. 비무장 지대 ‘Demilitarized Zone’이 아니라 꿈을 실현하는 지대 ‘Dream Making Zone’이란다. 군대와 무기가 배제된 비무장지대로서의 DMZ가 아니라 꿈을 실현하는 땅으로서의 DMZ다. 그 꿈은 평화와 생명이다. DMZ은 군사분계선을 중심으로 남북으로 각각 2km씩 총 4km의 폭으로 서해 임진강 하구부터 동해 고성까지 248km에 걸쳐 흐른다. 6·25전쟁이 낳은 비극의 땅, 인간의 개입이 사라지자 그 땅에는 비로소 평화와 생명이 움텄다. DMZ박물관은 그렇게 말하고 싶은 듯했다. 비록 지금은 남측 DMZ 뿐이지만 언젠가는 북측 DMZ 얘기도 모두 들려주겠노라….

‘김일성 별장’을 감싸고 있는 소나무 숲
‘김일성 별장’을 감싸고 있는 소나무 숲

●이승만·김일성 별장 너머 화진포


고성은 우리나라 현대 역사의 생생한 현장이자 그 자취를 고스란히 간직한 박물관이다. 고성통일전망대처럼 민간인 출입통제선을 넘어 북으로 바투 올라야만 만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화진포를 빼놓을 수 없다. 한 때 바다였지만 오랜 세월에 부서진 바위와 풍랑이 나른 모래에 물길이 막혀 이제는 호수가 된 석호. 누구는 우리나라 석호 중 최고라고 엄지를 치켜세우기도 한다. 호수와 바다가 작은 육지를 경계선으로 마주 보고, 그 땅 위에 소나무가 숲을 이루고 곱고 너른 모래해변이 길게 내달린다. 호수와 바다, 송림과 해변, 사람과 동물…. 아름답다. 한반도 격동의 시기, 남과 북의 권력자들도 그 아름다움에 매료됐었나 보다. 이승만과 김일성이 이곳 별장에서 휴양했고, 북한 군 간부가 휴양소로 사용했던 별장을 나중에는 남한의 부통령이 별장으로 썼다. 

김일성 별장 뒤로 화진포가 보인다
김일성 별장 뒤로 화진포가 보인다

김일성 별장이 가장 궁금했다. 정식 명칭은 ‘화진포의 성’이지만 1948년부터 1950년까지 김일성이 여름 휴양지로 사용했다고 해서 김일성 별장으로 더 잘 불린다. 화진포해수욕장 한쪽 끝 소나무 숲 우거진 해안가 산 중턱에 앉아 있다. 나무 계단을 따라 오르니 돌계단 위로 돌로 외벽을 쌓은 별장이 단단한 자태로 맞았다. 지하 1층 지상 2층의 석조 건물인데 1964년 우리나라 육군이 철거한 다음 재건축했고 1995년에는 개보수해 장병 휴양시설로 사용했다고 한다. 지금 건물은 2005년 옛 모습으로 재건된 것이다. 건물 앞 돌계단에는 이곳이 김일성 별장이었음을 알려주는 흐릿한 사진 한 장이 걸려있다. 1948년 당시 6살이었던 김정일이 돌계단에 앉아 찍은 사진이다. 1994년 아버지 김일성이 죽고 난 뒤 북한을 이끌던 그 꼬마도 2011년 사망하고, 이제는 그 꼬마의 아들이 그 자리에 있다. 

이승만 별장에는 과거 집무실 등이 재연돼 있다
이승만 별장에는 과거 집무실 등이 재연돼 있다

김일성 별장에서 이기붕 별장은 걸어서 3분 정도면 충분할 정도로 가깝다. 이승만 자유당 정권 아래에서 부통령으로서 권력의 2인자로서 단맛을 누렸던 인물의 말로는 비참했다. 1960년 3·15 부정선거로 촉발된 4·19혁명으로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하고 자유당 정권이 몰락하자, 맏아들에 의한 일가족 권총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이승만 별장은 이곳에서 1km쯤 떨어진 화진포 호숫가 산 중턱에 있다. 기념관도 함께 들어서 있어 우리나라 초대 대통령 이승만의 생애를 간략하게 훑어볼 수 있다. 이런저런 상념이 일었지만 화진포의 호젓한 기운에 금세 씻겨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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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사진=김선주 기자 vagrant@traveltim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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