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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리고의 여행의 순간] 찍고 찍히는 사이의 거리감

  • Editor. 박 로드리고 세희
  • 입력 2019.07.01 09:40
  • 수정 2019.11.06 10:5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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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래스카, 데날리산
알래스카, 데날리산

사진이 만족스럽지 않다면 
더 가까이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Forget the long lens, 
stuff only looks good up close
(망원 렌즈를 쓰지 말고, 
피사체에 가까이 다가가서 찍어라).” 

총 대신 카메라를 들고 전쟁터를 누비는 저널리스트들의 애환을 다룬 영화 <뱅뱅클럽>에 나오는 대사다. 전쟁터에서 망원 렌즈를 든 신참에게 고참은 표준 렌즈나 광각 렌즈로 촬영할 것을 권한다. 총알이 빗발치는 상황에서 망원 렌즈는, 신참으로서는 본능적인 선택이었을 것이다. 멀리 있는 피사체를 끌어당겨서 찍을 수 있고, 위험 지역에서 한 걸음이라도 떨어지게 해 주니까. 반면 표준 렌즈는 사람의 눈과 엇비슷한 화각을 가졌고, 광각 렌즈는 피사체를 멀리 밀어내 조금만 떨어져 찍어도 아주 먼 것처럼 보이게 만든다. 피사체에 충분히 다가가야만 사진을 찍을 수 있다. 

루마니아 부쿠레슈티, 인민 궁전
루마니아 부쿠레슈티, 인민 궁전

고참의 조언은 사실 전설적인 종군 사진기자 로버트 카파(Robert Capa)*의 명언을 빌려 온 것이다. 카파는 “사진이 만족스럽지 않다면 더 가까이 가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말을 남겼다. 폭력과 분쟁의 참상을 기록하고 세상에 알려야 하는 책무를 가진 저널리스트의 입장에서 비극의 현장에 가까워질수록 직업윤리에 충실한 것이었을 테다. 피사체에 가까이 다가가 찍은 사진에는 그만큼 현장의 분위기와 입체감, 마치 현장에 함께 있는 듯한 생생한 느낌도 담긴다. 반면 망원 렌즈로 찍은 사진 속의 피사체들은 평면적으로 덧붙여진 것처럼 공간감이 압축돼,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현장에서 멀리 떨어져 관조하는 기분이 들게 한다. 


*로버트 카파│헝가리 출신 종군 사진기자. 스페인내전, 2차 세계대전 등에서 활동했다. 투철한 기자정신을 뜻하는 ‘카파이즘’이라는 말도 그에 의해 탄생했다. 
    

폴란드 바르샤바, 문화 과학 궁전
폴란드 바르샤바, 문화 과학 궁전

다행히 우리는 전쟁이 아닌 여행 중이므로 망원 혹은 광각으로, 렌즈를 유연하게 선택할 수 있다. 이때 가장 우선적으로 고려해야 할 것은 피사체와의 ‘심리적’ 거리감이다. 피사체와 가까운 느낌을 드러내고 싶을 때 광각 렌즈를 사용한다. 카메라를 들고 조금씩 다가가며 피사체와의 소통으로 경계심을 허문다. 반대로 일정한 거리감을 두고 관찰하는 느낌을 연출하고 싶을 땐 망원 렌즈를 장착하고 피사체에서 점점 멀어진다. 피사체가 사람이라면 멀고 가까워지는 거리가 수십 걸음 이내겠지만, 거대한 구조물이거나 자연이라면 원하는 거리감을 위해 몇 시간에 걸쳐 이동해야 할 때도 있다. 그렇게 찍을 위치에 도달하면, 크고 작은 여러 피사체를 배치할 수 있고 사진에는 운율이 생긴다. 


마땅한 렌즈를 골라야 하는 이유는 배경이 되는 피사체를 효과적으로 포함하거나 배제하기 위해서다. 적절한 거리감을 확보함으로써 사진의 공간감을 압축하기도, 과장하기도 한다. 사진은 결국 찍는 사람과 찍히는 것 사이의 상관관계에 의해 탄생한다. 그럼에도 세상을 있는 그대로 담지 못하지만, 카메라를 든 사람이 부지런히 발걸음을 옮긴 만큼만 사진의 내용이 된다. 

 

*박 로드리고 세희는 영화와 드라마, 다큐멘터리를 넘나드는 촬영감독이다. 틈틈이 여행을 하며 사진을 찍는다. <트래비>를 통해 여행사진을 찍는 기술보다는, 여행의 순간을 포착하는 태도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 
 

글ㆍ사진 박 로드리고 세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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