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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로망, 쇄빙선 극지 여행

  • Editor. 유호상
  • 입력 2019.07.01 13:05
  • 수정 2019.07.23 13:3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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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이다. ‘극지탐험’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집까지 팔 필요는 없었다. 
세계 유일의 대중적(?)인 쇄빙선의 출항지인 핀란드 라플란드를 알게 됐다.
드디어 3월의 얼음바다를 항해하고 왔다.

얼어붙은 바다 위로 상륙(?)하는 진기한 경험을 했다
얼어붙은 바다 위로 상륙(?)하는 진기한 경험을 했다

쇄빙선 | 핀란드 케미에서 남쪽으로 약 10km 떨어진 아요스(Ajos)항에서 출발한다. 가이드가 동행해 쇄빙선 내부 투어를 진행한다. 크루즈는 2가지 종류(3시간, 4시간) 중 선택할 수 있으며 4시간 크루즈에는 점심 뷔페가 포함된다. 둥둥 뜬 얼음 조각을 헤치고 겨울바다에서 뛰어들어 보는 이벤트도 포함. 
요금: 3시간 크루즈 300Eur, 4시간 크루즈 450Eur (어린이는 50% 할인)  
삼포 아이스브레이커 www.experience365.fi

조각난 얼음 부스러기들 때문에 바닷물은 보기 힘들다
조각난 얼음 부스러기들 때문에 바닷물은 보기 힘들다

●아이스브레이커인가 드림브레이커인가

내게는 탐험가 기질이 있다. 얼어붙은 북극의 바다 위를 걸어 보는 것이 오래 전부터 로망이었으니까. 하지만 북극의 얼음을 뚫고 부상하는 잠수함도, 그 함정의 승무원들이 얼음 위에서 축구를 하는 모습도, 극지방 연구원들이 쇄빙선을 타고 얼음을 깨며 북극점을 탐험하는 모습도 현실과는 거리가 먼 다큐멘터리 영화 속 한 장면일 뿐이었다.


그러다 알게 됐다. 일반인들도 할 수 있는 북극점 탐험 크루즈가 있다는 사실을! 러시아의 대형 쇄빙선을 타고 항해하여 북극점을 찍고 근처의 섬들을 탐사하고 돌아오는 ‘환상적인’ 여행이었다. 2주 간의 여정 하나하나가 주옥같지만 그중 하이라이트는 북극점 정복이다. 북극점에 도달하면 얼음 위로 하선해 다양한 이벤트를 여는데, 특히 얼음 위에 걸터앉은 쇄빙선의 선수를 배경으로 사진을 남기는 일이 단연 압권이다. 이 크루즈는 곧바로 나의 위시리스트 맨 위칸에 자리잡았다. 하지만 그 발견의 기쁨도 잠깐이었다. 상품성이 ‘환상적’인만큼 비용도 ‘환상적’이었다. 2주간의 1인당 경비는 자그마치 3,000만원에 달했다. 북극탐험은 그렇게 내 머릿속에서 희미해져 가고 있었다.

가장 쇄빙선다운 모습은 역시 얼음 위에 걸터앉았을 때!
가장 쇄빙선다운 모습은 역시 얼음 위에 걸터앉았을 때!

●꿩 대신 닭? 닭 대신 꿩! 

항공권 검색으로 바빠지기 시작한 게 불과 몇 달 전이었는데, 어느새 우리는 핀란드로 가는 비행기에 올라타 있었다. 그 사이 이름도 생소한 핀란드 북부의 케미(Kemi)에 일반 관광용 쇄빙선이 있다는 ‘특급정보’를 입수한 것이다. 산타마을로 유명한 로바니에미(Rovaniemi)에서 차로 1시간 반 거리였다. 와우, 쇄빙선을 체험하기 위해 북극까지 가지 않아도 되고, 집을 팔아 돈을 마련하지 않아도 된다니. 특히 4월 중순까지도 쇄빙선 크루즈가 가능하다는 사실이 마음에 들었다.


환승을 위해 하루를 머문 헬싱키. 캐리어를 끌고 숙소까지 춥고 눈 덮인 헬싱키 거리를 어떻게 가야 하나 했던 고민은 그저 기우였다. 헬싱키는 완연한 봄이었고 눈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북쪽도 이러면 어쩌지? 다음날 마음 한 구석에 근심 아닌 근심을 안고 케미행 비행기에 탑승했다. 일찍 일어난 탓일까. 쏟아지는 잠을 이기지 못하고 잠시 눈을 붙였다가 기내 방송에 눈을 떴다. 부리나케 창밖부터 내다봤다. 다행이다. 전부 하얗다. 그도 그럴 것이 북쪽으로 무려 700km나 떨어진 곳이니까. 그런데 자세히 보니 눈 덮인 호수라고 생각했던 하얀 부분이 상식 이상으로 넓었다. 자동차나 썰매 같은 것이 지나다닌 흔적이 있는 것으로 봐서는 평원 같긴 한데 이렇게 넓은 곳에 나무 한 그루 없는 것도 이상했다. 착륙할 무렵 고도가 더 낮아지자 이 미스터리는 곧바로 풀렸다. 하얀 부분은 호수나 평원이 아니라 바다였던 것.

해도를 보고 항로를 점검하는 승무원
해도를 보고 항로를 점검하는 승무원

●난생 처음 탄 쇄빙선

케미 남쪽 아요스(Ajos) 항에서 마침내 쇄빙선에 올랐다. 화창한 날이었다. 한겨울이 아니어서인지 춥지는 않았지만 내내 몸이 날아갈 듯 바람이 불었다. 쇄빙선이라 뭔가 다를까 싶었지만 겉으로 봐서는 보통의 배와 다르지 않았다. 정박한 배 주변을 얼음조각들이 둘러싸고 있다는 것만 뺀다면 말이다.

현역 쇄빙선 시절 승무원들이 잠을 청하던 곳
현역 쇄빙선 시절 승무원들이 잠을 청하던 곳

승선 후 내다본 항구 풍경 또한 생소했다. 바닷물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곧 이은 출항으로 4시간짜리 항해가 시작되자 승무원은 브리지, 기관실, 승무원실뿐 아니라 구석구석의 편의 시설까지 데리고 다니며 안내해 주었다. 배의 역사부터 오래된 사연, 그리고 얼음을 깨고 나아가는 방법 등등, 어찌나 설명이 알차던지 말미에는 머리를 쥐어짜도 더 이상 질문할 게 없을 정도였다. 아쉬운 게 있었다면 마지막 귀띔이었다. 우리의 항해가 멀리 가는 것이 아니라 보트니아(Gulf of Bothnia)만의 해안 근처를 맴도는 여정이라는 것. 당연하긴 했지만, 몰라도 될 만한 정보였다.  


설명이 끝난 후 갑판으로 나왔다. 이미 항구를 벗어난 지 오래고 배는 얼음 조각들을 헤치며 항해 중이었다. 아직은 새로운 얼음지대를 깨고 가는 것이 아니라 이미 ‘개척된’ 구간을 지나는 중이었다. 그럼에도 분위기는 장관이었다. 배가 나아가면서 배 옆으로 물보라가 아닌 크고 작은 얼음 조각들이 나뒹구는 것은 충분히 낯선 풍경이었다. 잠시 후 쇄빙선이 새로운 구간으로 접어든다는 방송이 나오자 모두들 배 앞과 옆으로 몰려들었다. 빙판 앞으로 배가 나아가자 하얀 얼음판이 쩍 갈라졌다. 마치 펜으로 까만 선을 긋는 듯했다. 그리고 더 작은 얼음조각으로 쪼개졌다. 계속해서 배가 이들을 지날 때 두꺼운 얼음판들이 뒤집어지는 모습은 묘한 쾌감을 주었다.

얼음으로 뒤덮인 곳에 구명정이 필요할까 싶기도 하다
얼음으로 뒤덮인 곳에 구명정이 필요할까 싶기도 하다

●꽁꽁 얼던 케미가 부동항이 된 이유 

핀란드는 숲과 호수의 나라로 잘 알려져 있다. 주력 산업은 나무를 가공하여 만든 펄프와 종이다. 휴대폰 회사 노키아(Nokia)도 시작이 종이회사였던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오늘날 풍요로운 핀란드를 보면 ‘정말일까?’ 싶지만 불과 반세기 전만 해도 핀란드는 내일 먹을 식량을 걱정해야 하는 나라였다. 주변국에 천연 자원을 팔아서 먹고 살아야 했던 핀란드에게 항구는 무엇보다 중요한 시설이었다. 하지만 핀란드는 세계에서 유일하게 겨울이 되면 모든 항구가 얼어붙는 나라이기도 했다. 추울 때는 기온이 영하 30℃까지 내려가는데 1999년 기록은 무려 영하 51.5℃였다고 전해진다. 소금물인 바다가 어떻게 그리 단단히 얼까 싶은데 이곳 보트니아만은 수심이 얕은 데다가, 염도도 다른 곳에 비해 현저히 낮아서, 과장을 좀 보태면 그냥 마실 수도 있을 정도라고. 최소 45~100cm 두께로 얼기 때문에 그 위로 자동차도 다닐 수 있다고 했다. 


하지만 긴 겨우내 바다가 언다는 것은 경제활동의 마비를 의미했다. 그래서 등장한 것이 쇄빙선이다. 2차 세계대전 이후 핀란드는 새로운 쇄빙선을 본격적으로 건조했다. 이때 활약한 것이 1950년대 말 건조된 카르후급(Karhu Class)의 쇄빙선, 그중에서도 1961년부터 취역한 삼포(Sampo) 쇄빙선이다. 쇄빙선은 화물선들이 항해할 수 있도록 미리 얼음을 깨서 길을 내는 역할을 맡았다. 1972년 케미를 비롯한 인근 항구가 혹한으로 4일간 폐쇄되었던 일 외에는 삼포 쇄빙선이 취역한 이래 이곳 항구들은 늘 열려 있을 수 있었다고. 지금도 핀란드 해상 운송의 35% 이상이 겨울에 발생할 수 있는 이유다. 하지만 1980년대에 접어들자 3척의 카르후급 쇄빙선들은 아직은 일할 수 있는 나이임에도 ‘명퇴’의 위기에 처했다. 배가 낡아서만은 아니었다. 최신 화물선들의 크기가 점차 커져 앞에서 길을 내는 쇄빙선 역시 더 커져야만 했기 때문이었다. 1986년 한 척은 폐기되고, 한 척은 소련에 팔렸다. 남은 한 척의 삼포는 케미시에서 사들였고, 관광용 크루즈선으로 부활했다. 지금은 세계 각지에서 연간 1만2,000명의 관광객들이 찾는 인기 어트랙션이 됐다. 이 배가 핀란드 전설에 등장하는 3가지 보물을 만들어 낸다는 ‘삼포’의 이름을 달고 있는 건 우연일까?

마치 잎사귀를 갉아 먹는 애벌레 같다
마치 잎사귀를 갉아 먹는 애벌레 같다

●쇄빙선의 원리

막연히 쇄빙선이라고 하면 배 앞에 얼음을 깨는 톱니나 망치라도 달려 있을 것만 같다. 하지만 그런데 직접 본 쇄빙선은 일반 배와 달라 보이지 않았다. 원리는 단순했다. 선체가 얼음판 위를 살짝 타고 올라가서 배의 무게로 얼음을 깨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선체의 앞부분은 일반 선박보다 훨씬 두껍고 무겁게 만든다.


이때 만약 얼음이 깨지지 않으면 배가 좌초될 수도 있다. 그럴 경우 배는 다시 후진을 해서 같은 동작을 반복해야 한다. 배는 자동차와 달리 전·후진 동작을 신속하게 바꾸는 것이 어렵다. 그래서 초창기 쇄빙선과 달리 요즘 쇄빙선들은 전후로의 전환조작이 복잡한 엔진이 아닌 전기모터로 추진을 한다고. 그럼 아까 본 엔진들은 뭘까? 그것은 발전용이다. 즉, 항해시 배의 추진 프로펠러는 전기 모터로, 엔진은 이 모터 및 배에서 필요한 모든 전력을 공급하는 용도로 가동하는 것이라고! 

깨진 얼음 사이로 즐기는 북극 바다의 여흥
깨진 얼음 사이로 즐기는 북극 바다의 여흥

●바다 위 하선!

쇄빙선이 마침내 멈췄다. 잠시 후 갑판에 달린 기중기를 이용해서 트랩이 내려졌다. 바다 한가운데서 하선이라니. 승객들 모두가 이 ‘신선한’ 이벤트에 눈을 번뜩이며 선미로 몰려들었다. 승무원들은 얼음 위에서 벌어질 ‘여흥’ 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마침내 바다 위에 첫 발을 내딛었다. 기분이 묘했다. 한편으로는 실감이 나지 않았다. 가끔씩 발이 푹푹 빠지는 곳이 있을 때는 ‘괜찮을까?’ 멈칫했다. 하지만 얼음 위에 내려 쌓인 눈이 물러진 것일 뿐 얼음 자체가 녹는 것은 아니었다.


모두들 배에 오르락내리락, 배 주변 여기저기로 옮겨 다니며 이 진기한 순간을 사진에 담기에 여념이 없었다. 한편 배 뒤편에서는 쇄빙선에서나 가능한 깜짝 이벤트도 벌어지고 있었다. 극지 바다 수영이었다. 몸에 완전히 밀착되어 물에 젖지 않고 수영을 즐길 수 있는 드라이 슈트(Dry Suit)를 입고 깨진 얼음 사이의 바닷물에 뛰어드는 것이었다.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이색적이고 즐거웠다.


케미에 와서는 생각보다 춥지 않은 날씨, 게다가 하루는 비까지 내려 쇄빙선 크루즈가 가능할까 걱정도 했는데 이 역시 기우였다. 한 번 두껍게 언 얼음은 그렇게 쉽게 녹지 않는 법이었다. 적당한 추위, 파란 하늘과 대비되는 하얀 바다, 날씨는 더 없이 좋았다. 이제 회항한다는 방송이 나왔다. 충분한 시간을 가졌음에도 뭔가 해야 할 것들을 다 못한 기분이었다. 그러나 아쉬움이 남아야 또 다시 찾게 되는 법. 이 아쉬움은 이렇게 달래 보기로 했다. 


‘이번 크루즈는 예행연습, 다음에는 진짜 북극점에 도달하는 쇄빙선 크루즈에 오르리라.’ 물론 그때까지는 차 한 대 비용쯤이야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지불할 수 있는 경제력을 갖추든가, 아니면 북극점 크루즈 비용이 완전히 ‘대중화’되든가 둘 중 하나가 돼야겠지만.  


글·사진 유호상  에디터 천소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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