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삼척을 기억하는 법

  • Editor. 김예지 기자
  • 입력 2019.08.01 10:20
  • 수정 2019.08.01 10:2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그 자리에 있을 걸 알면서도 자꾸만 꺼내 보고 싶은, 
이번 여행은 돌이켜 보면 그런 마음들이었다.   

장마를 앞둔 장호항의 바다
장마를 앞둔 장호항의 바다

차라리 쏟아내 버리면 후련할 것을. 그러질 못했다. 날씨 따위에 아랑곳하지 않겠다, 했는데 먹먹한 하늘에 여전히 속이 상할 게 뭐람. 이런 해상 케이블카를 타는 게 얼마 만인지. 삼척은 또 처음이었다. 그저 새파랄 풍경을 상상하며 서울에서 4시간을 달려온 보람은 미미해져 갔지만 일기예보가 심심찮게 엇나간다는 사실에 희망을 걸어 보기로 했다. 장호역에 용화역까지 바다를 건너는 케이블카에서, 바닥에 뚫린 작은 유리 프레임에 시선을 박고. 물색이 농롱했다. 장마전선의 북상이 예보보다 늦어지던 여름날, 삼척의 바다는 초록에 가까웠다.  

한국의 나폴리라고 불리는 장호항
한국의 나폴리라고 불리는 장호항

●발가락에 차오르는 바다 


장호항이 ‘한국의 나폴리’라고 불리는 이유는 높은 데서 금세 알 수 있었다. 바닷물도 바닷물이지만 가장자리가, 반달 모양으로 오목하게 뻗은 해안선이 이탈리아 나폴리의 그것과 비슷했다. 나폴리보다도 두드러진 점이 있다면 기암괴석의 존재일 것이다(언젠가 나폴리에 직접 가 본다면 더 정확하게 말할 수 있겠다). 둥근 해변을 따라 솟은 괴석과 그 위를 드나드는 갈매기들은 장호항의 가장 일상적인 풍경이다. 여기에 투명카누와 스노클링이 더해져 장호항의 여름을 특별하게 만든다면, 이날은 특별하지 않았다. 아직은 시즌이 일러서인지 어째서인지 카누는커녕 스노클링 포인트마저 한산하기만 한 것이다. 케이블카에서 내렸을 때는 한껏 배를 불린 구름들이 급기야 하나 둘 빗방울을 토해 내기 시작했다. 우산이 없다.

맑아져라, 맑아지기만을 바라며 탄 케이블카
맑아져라, 맑아지기만을 바라며 탄 케이블카

잠깐 산책 정도는 기다려 주지 않을까. 용화해변 산책로를 설렁설렁 맴도는 동안 ‘이렇게 부풀 거면 아침에 머리를 만지지 말 걸’, ‘굽이 좀 더 높은 샌들을 신었어야 했는데.’ 온갖 잡생각들이 두서없이 서로 꼬리와 머리를 맞댔다. 다만 발가락에 닿는 빗물을 바다라고 상상하는 일이 꽤 즐거웠다고 한다면, 할 수 있는 게 그토록 많지 않았다는 의미가 될 것이다. 할 수 있는 게 없어도 반드시 서글프지 않았다는 뜻이기도 하고. 어차피 비는 오는데, 정말로 바다가 옆에 있었기 때문이다.

환선굴에는 뭔가 영험한 기운이 돈다
환선굴에는 뭔가 영험한 기운이 돈다

●동굴에서 생긴 일 


이튿날은 일찌감치 차를 몰았다. 산과 산 사이 골짜기에 갇힌 것 같은 도로가 꼬불꼬불 이어졌다. 안개에서 폴폴 풋내가 피어나는 아침, “산신령이 나와도 이상하지 않다”는 농담을 하며 향한 곳은 신기면(新基面) 대이리(大耳里).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동굴지대다. 


‘환웅이 만약 삼척에 왔다면 곰과 호랑이를 어느 동굴로 보내야 할지 고민스러웠을 것’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삼척에는 동굴이 많다. 80개가 넘는다고 알려져 있는데 환선굴, 대금굴, 관음굴 등 주요 동굴들이 대이리 동굴지대에 모여 있다. 그중에서도 환선굴은 무려 동양에서 가장 큰 석회암 동굴이다. 덕항산 중턱에 있는 환선굴로 가기 위해서는 30분 넘게 산을 타야 했다는 버거운 얘기가 얼핏 들려왔지만 다행히 10년 전 얘기다. 2010년부터 운행을 시작했다는 모노레일을 타고서 단 2분 뒤, 동굴 입구에 도착했다. 

덕항산을 오르는 모노레일이 꽤 가파르다
덕항산을 오르는 모노레일이 꽤 가파르다

들어가는 길과 나오는 길이 정해져 있으니까. 바다나 산보다 동굴은 어쩌면 그 여행법이 더 단순하다. 상상력, 그리고 온갖 우연의 일치들을 너그러이 받아들이는 자세가 필요할 뿐. 약 5억 4천만년 전에 생성된 석주와 석순은 미인이 되었다가 거북이가 되었다가 항아리가 되기도 하니까. ‘사랑의 맹세’라는 달콤한 구간을 얼마 지나지 않아 ‘지옥교’를 건너는 반전 스토리도 있다. ‘이제 당신의 죄는 없어졌습니다. 깨끗한 마음으로 편안히 사십시오’라는 문구가 적힌 참회의 다리를 건너자 동굴의 끝에 거의 다다랐다. 


깜깜한 굴 안에서 경험한 기이한 현상들이 있다. 족히 3km는 걸은 것 같았는데 1.6km(총 6.2km 중 개방구간)에 불과했고, 30~40분 정도 지난 줄 알았더니 1시간 반이 흐른 것이다. 그 또한 이래서였을까, 환선굴이 환선굴이 된 옛 사연에 새삼 솔깃해진다. 한 스님이 도를 닦으러 이 동굴에 들어갔다가 도통 나오질 않아 사람들은 그가 신선이 되었다고 믿었고, 이후 환선(幻仙)이라 불리게 됐다는 이야기. 아쉽게도(?) 신선이 되지는 못했으나 깨끗한 마음으로, 편안히 살아야겠다.   

환선굴
주소: 강원 삼척시 신기면 환선로 800 
운영시간: 하절기(3~10월) 매일 09:00~17:00, 동절기(11~2월) 매일 09:30~16:00(매월 18일 휴관)
전화: 033 541 9266
입장료 | 어른 4,500원, 청소년(13~18세) 3,000원, 어린이(7~12세) 2,000원
모노레일 | 어른 및 청소년(13세 이상) 왕복 7,000원/ 편도 4,000원, 어린이(7~12세) 왕복 3,000원/ 편도 2,000원

거울유리로 만든 방. 작품명 ‘실체와 허상이 공존하는 공간’
거울유리로 만든 방. 작품명 ‘실체와 허상이 공존하는 공간’

●마음은 유리 같은 거야 


She’s a Killer Queen 
그녀는 죽여 줘 
Gunpowder, gelatine, dynamite with a laser beam 
화약, 젤라틴, 다이너마이트와 레이저빔처럼
Guaranteed to blow your mind, anytime 
네 마음을 날려 버릴 걸, 언제든


열기가 오를 대로 올랐다. 달구고, 다듬고, 식히고의 과정을 반복하고 있었다. 원하는 색을 덧입히고는 후우. 부풀려 원하는 모양을 만들었지만 무언가를 담으려면 완전히 식어 굳을 때까지 반나절을 더 기다려야만 한다. 퀸(Queen)의 ‘킬러 퀸(Killer Queen)’을 노동요 삼아 유리 볼을 만드는 작가의 손이 피아노 위에서처럼 놀았다. 


때마침 블로잉 쇼(Blowing Show)가 한창이었다. 지난해 3월 개장한 도계유리나라는 유리 시연장을 비롯해 유리공예 갤러리, 유리 역사관, 유리 판매장 등 유리로 할 수 있는 모든 것들로 채워져 있다. 삼척과 유리. 얼핏 희박해 보이는 둘의 연결고리는 석탄이다. 삼척 내에서도 도계읍은 일제강점기부터 광복 이후까지 우리나라에서 손꼽히는 탄광촌이었다. 그러다 1980년 후반부터 석탄의 수요가 줄어들며 마을은 점점 쇠퇴해 갔는데, 위기 속에서 투명한 기회를 찾은 셈이다. 석탄을 채굴하고 남은 폐경석에서 유리의 재료나 금속을 채취할 수 있었던 것. 이후 지금껏 도계읍이 유리산업을 키워 낸 건 가히 도약이라 할 만하다. 삼척 어딜 가나 도계유리제품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

 

유리공예 체험장에서 티스틱을 만들어 봤다
유리공예 체험장에서 티스틱을 만들어 봤다

유리나라에 온 이상 유리를 직접 다뤄 봐야지. 다룬다는 말은 좀 거창하고, 다행히 지름길이 있었다. 유리공예 체험장에서는 선생님의 도움과 함께 10분도 안 돼 뚝딱 작품을 만들어 볼 수 있다. 목걸이, 반지, 컵 등등 중에 오늘은 티스틱 만들기에 도전! 그녀의 손길 없이 직접 한 거라곤 가위로 유리를 자른 것밖에 없지만 어쨌든 손수(!) 만든 하트 모양 티스틱이 완성됐다. 짝짝이일지언정 하트는 하트일 뿐 엉덩이가 아니다.      

도계유리나라 앞에 있는 분수가 유리처럼 튄다
도계유리나라 앞에 있는 분수가 유리처럼 튄다

도계유리나라
주소: 강원 삼척시 도계읍 강원남부로 893-36
영업시간: 화~일요일 09:00~18:00(월요일 및 설날·추석 당일 휴무)
홈페이지: www.dogyeglassworld.kr  
전화: 033 570 4206
입장료 | 성인 8,000원, 청소년 6,000원, 어린이 4,000원(유리공예 체험비는 별도, 사전예약)


●바람과 하늘과 볕과 시 


모처럼 하늘이 열렸으니까. 통째로 빌린 것처럼 사람이 없는 누각에서 잠시 쉬어 가기로 했다. 신발을 벗으니 그나마 있던 소음마저 가셨다. 바람, 흔들리는 나뭇잎, 새소리만이 전부다. 차갑게 한 발, 따뜻하게 한 발. 그늘과 볕을 번갈아 밟았다. 누각 안에는 옛 문인들이 남긴 한시들이 빼곡하게 내걸려 있었다. 

죽서루 안에는 옛 문인들의 시가 걸렸다
죽서루 안에는 옛 문인들의 시가 걸렸다

물론 그 한자들을 다 알아볼 리 없지만. 시를 쓰는 일만큼 인과관계가 분명한 행위도 드물다는 생각만은 분명했다. 관동팔경* 중에서도 제1경으로 꼽히는 죽서루(竹西樓)는 그 자체로 숱한 묵객들의 글감이 되어 주었을 테다. 율곡 이이도 고려 말 학자 겸 정치가였던 이승휴도 죽서루에 대한 시를 썼다. 12세기*에 지어진 죽서루는 조선시대 당시 삼척부 소속의 부속 건물로 접대와 향연을 위한 장소로 쓰였다. 그 어느 시에도 이런 공적인 용도는 없다. 빛, 하늘, 바위, 산, 물고기, 들, 아름다움, 세월. 대신 그저 더없이 사적인 단어들로 표현됐을 뿐이다. 


보통의 일상보다 훨씬 더 아름다운 장면이었기에. 누각 앞을 흐르는 개천에 한참이나 시선을 뒀다. 햇빛에 반짝이는 잔물결이 참 예쁘다 하니, 고맙게도 일행이 딱 맞는 우리말 하나를 일러 주었다. 지금 죽서루를 생각하면, 윤슬. 이 예쁘장한 단어 외에 그 어떤 좋은 말도 잘 떠오르지 않는다.

예나 지금이나 죽서루는 더없는 휴식처다
예나 지금이나 죽서루는 더없는 휴식처다

*관동팔경 | 관동, 즉 동해안을 낀 강원 지방에 있는 8개소의 명승지. 고성의 청간정, 강릉의 경포대, 고성의 삼일포, 삼척의 죽서루, 양양의 낙산사, 울진의 망양정, 통천의 총석정, 평해의 월송정을 말한다. 월송정 대신 흡곡의 시중대를 포함하기도 한다.

*죽서루가 처음 만들어진 시기는 정확하지 않지만 고려 명종 때 문인 김극기의 시에 등장한 걸로 보아 12세기로 추정되고 있다.      

죽서루
주소: 강원 삼척시 죽서루길 37

바다를 옆에 끼고 달리는 이사부길. 결국은 차를 세웠다
바다를 옆에 끼고 달리는 이사부길. 결국은 차를 세웠다

●소망과 열정 사이 어딘가 


동해안을 타고 달리다 보면 한 번쯤은 그를 만나게 될 것이다. 신라시대 장군이자 옛 삼척, 즉 실질국의 군주였던 이사부(異斯夫)*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지금의 울릉도에 있었던 우산국을 정벌한 인물로 기록돼 있다. 우산국 사람들을 굴하게 만든 이사부의 전략이 지금으로선 믿기 힘든데, 나무로 만든 사자를 배에 싣고 가서 항복하지 않으면 사자를 풀겠다고 위협해 항복을 받아 냈다고. 울릉도와 독도를 우리 영토에 편입시킨 그의 공을 기리며 만들어진 공원이 이사부사자공원인 까닭이다. 나무 사자들이 문지기처럼 지키고 서 있다.

이사부의 개척정신을 기리는 이사부사자공원
이사부의 개척정신을 기리는 이사부사자공원

삼척해변을 지나 삼척항으로 가는 해안도로에도 그의 이름이 붙었다. 이사부길은 2000년 밀레니엄을 기념해 만들어졌다고 해서 ‘새천년도로’라고도 불린다. 4.7km의 짧은 드라이브 코스지만 머무르는 시간이 결코 짧지 않다. 그냥 지나치긴 아무래도 아쉬운 바다가, 파도 소리가 이렇게 자꾸만 브레이크를 붙드는데. 기도하는 두 손을 닮은 ‘소망의 탑’에서 결국 차를 세웠다.  

이사부사자공원 옆으로 난 작은 대나무 숲
이사부사자공원 옆으로 난 작은 대나무 숲

둥, 둥, 두웅. 식상하다 여겨도 꼭 해 보고 마는 일 중 하나. 소망의 종을 3번 울리며 소원을 빌었다. 동그란 조형물 안으로 해가 쏙 들어올 때 종을 울려야 효력이 있다지만 뭐, 어쩔 수 있나. 일 년의 딱 반을 살았고, 삼척에 왔다. 남은 해를 무탈하게 나기를, 좋은 사람들과 함께이기를. 거시적인 소망들 사이에 작은 마음도 슬쩍 끼어 넣어 보자면 맑은 날, 새빨간 해를 볼 수 있기를. 반은 순전히 운, 반은 게으름이나 열정에 관한 것이다.  

*이사부 | 이사부라는 이름은 본명이 아닌 것으로 추정된다. 역사서마다 차이를 보이는데, <삼국사기>에는 김태종(苔宗), <삼국유사>에는 박이종(朴伊宗)이라는 인물로 등장한다. 삼척 이사부길 이외에도 울릉군에 독도이사부길이 있다.

이사부사자공원
주소: 강원 삼척시 수로부인길 333
운영시간: 매일 00:00~24:00
전화: 033 570 4616

삼척의 새해맞이 명소인 ‘소망의 탑’
삼척의 새해맞이 명소인 ‘소망의 탑’

▶ACTIVITY
장호항은 여름 액티비티를 즐기기에 제격이다. 매년 여름 투명카누, 스노클링 등을 운영한다. 홈페이지를 통해 시즌별 운영 여부를 미리 알아 볼 것.
투명카누, 스노클링 | 7~8월 매일 08:00~18:00(5·6·9월 주말 및 공휴일 운영)
홈페이지: jangho.seantour.com  
장호어촌체험마을 070 4132 1601


▶FOOD
물닭갈비는 과거 탄광촌에서 광부들이 즐겨 먹었던 데서 유래된 음식이다. 춘천식 닭갈비와는 달리 국물이 자작한 이유는 온종일 석탄으로 칼칼한 목을 달래기 위해서였다고. 닭갈비에 떡, 고구마, 우동, 쫄면 사리 등을 넣고 쑥갓이나 깻잎, 파 등 야채를 수북하게 올려 나오는 게 특징이다.


글 김예지 기자  사진 김정흠
취재협조 삼척시 www.samcheok.go.kr/tour.web  에어비앤비 www.airbnb.co.kr

저작권자 © 트래비 매거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최신기사
트래비 레터 요즘 여행을 알아서 쏙쏙
구독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