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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리분지의 기나긴 겨울

  • Editor. 김민수
  • 입력 2020.01.01 15:2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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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릉도 천부마을에서 나리분지까지는 4km. 
많은 눈이 내리고 그대로 얼어붙은 탓에 버스 운행이 중지되었다. 
할 수 없었다. 걸어야 했다! 

나리전망대는 나리설국의 모습을 오롯이 감상할 수 있는 최고의 조망 포인트다
나리전망대는 나리설국의 모습을 오롯이 감상할 수 있는 최고의 조망 포인트다

걸어서 1시간 30분이면 닿을 수 있다는 마을 사람들의 걱정 섞인 격려를 믿기로 했다. 오래지 않아 배낭과 겹겹이 껴입은 옷 사이로는 땀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햇볕이 닿지 않아 빙판이 되어 버린 구간은 미끄러워 걸음을 옮기는 것조차 버거웠다. 입을 벌린 채 가쁜 숨을 토해내며 얼마나 걸었을까? 

알봉은 어머니의 가슴처럼 보드랍게 나리분지를 감싸 안는다
알봉은 어머니의 가슴처럼 보드랍게 나리분지를 감싸 안는다
맑고 눈부신 겨울 감성이 고스란히 이어지는 알봉둘레길
맑고 눈부신 겨울 감성이 고스란히 이어지는 알봉둘레길

겨울 복판에 선 나리분지는 적막하기 이를 데가 없었다. 고갯마루 전망대에 오르니 순백의 평원이 꿈처럼 펼쳐졌다. 경이로움에 빠져 있던 순간, 흐르던 구름은 분지를 둘러싼 높은 산봉우리들에 걸려 뒤뚱거리다 또다시 한 뭉치의 눈을 쏟아 냈다. 울릉도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눈이 많이 내리는 곳이다. 눈은 해안가 마을에서는 쉽게 녹아내리지만, 해발 500m 전후의 높은 봉우리들이 병풍처럼 둘려진 나리분지에서는 고스란히 쌓여 사람의 키를 훌쩍 넘기기도 한다. 오래전 정착민들은 이곳에 산재해 있던 섬말나리의 뿌리를 캐어 먹으며 생활했다. ‘나리촌’이란 이름으로 불리게 된 것도 그 때문이다. 현재 나리분지에 살고 있는 총 16가구의 주민들은 대부분 식당을 운영하면서 옥수수, 더덕, 취, 고비, 산나물 등을 재배하는데, 11월 말이면 대부분 철시해 버린다. 분지를 떠난 주민들은 읍내나 뭍에서 겨울을 보내다 봄이 돌아올 즈음 나리분지로 돌아온다.  

나리분지에서의 야영은 농작물에 피해가 가지 않도록 주민의 허락과 안내를 받아야 한다
나리분지에서의 야영은 농작물에 피해가 가지 않도록 주민의 허락과 안내를 받아야 한다
끝없이 내리고 쌓이는 눈, 나리분지의 겨울은 꿈처럼 흘러간다
끝없이 내리고 쌓이는 눈, 나리분지의 겨울은 꿈처럼 흘러간다

마그마가 분출되고 제자리를 맴돌다 형성되었다는 알봉은 분지의 한편에 봉긋하게 솟아 있다. 그래서 마을을 기점으로 알봉의 주위를 돌아오는 6km의 순환코스인 알봉둘레길이 조성됐다. 걸어 보자! 눈발이 굵어지니 관람용으로 세워 놓은 너와집은 한층 더 운치가 느껴진다. 꿩 몇 마리가 눈을 헤치고 먹이를 찾다 인기척을 느끼고는 세찬 바람에 너덜해진 비닐하우스 뒤편으로 날아갔다. 숲에 갇혀 끝없이 이어질 것만 같았던 탐방 길은 투막집 삼거리에 이르러 미륵산, 형제봉, 송곳산의 자태를 내어 놓고 생채기 없는 하얀 들녘을 펼쳐 놓았다. 시원한 경관에 가슴마저 절로 트이는 느낌이다. 눈밭에 앙증스레 세워 놓은 솟대들과 나란히 구름다리가 이어지더니 산자락과 만나는 계곡에선 아찔한 오솔길도 나타난다. 주민들이 추산과 나리분지를 오가던 옛길을 따라 다시 마을로 접어들었을 때 나리분지의 짧은 오후는 이미 저물어 가고 있었다. 다시금 눈발이 휘날리고, 빈 옥수수밭 사이 세워 놓은 텐트를 향해 가는 느린 발걸음에도 나리분지의 기나긴 겨울은 흐르고 있었다. 

 

*김민수 작가는 육지와 섬 사이에 글과 사진으로 다리를 놓는 섬여행전문가다. 눈이 내리면 바로 달려 나갈 준비가 되어 있는 그에게 울릉도는 설국의 다른 이름이다. 인스타그램 avoltath

글·사진 김민수  에디터 천소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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