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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길을 따라 걷다, 크라쿠프

연한 밤들의 축제, 폴란드 POLAND

  • Editor. 김예지 기자
  • 입력 2020.02.03 09:46
  • 수정 2020.02.03 15:5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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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벨성에 올랐을 땐 이미 해가 지고 있었다
바벨성에 올랐을 땐 이미 해가 지고 있었다

●중세에서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것


오후 1시57분, 중앙시장 광장(Plac Mariacki). 성모 승천 성당(Bazylika Mariacka) 앞에 모인 사람들은 모두 고개를 든 채로 한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셋, 둘, 하나, 땡. 초침이 정확히 2시를 가리키자 첨탑에서 등장한 나팔수가 힘껏 나팔을 불기 시작했다. 그런데 뚝. 웬일인지 나팔수는 곡을 다 마치기도 전에 쏙 들어가 버렸다. 

크라쿠프 중앙시장 광장으로 향하는 길
크라쿠프 중앙시장 광장으로 향하는 길
중앙시장 광장 주변. 성모 승천 성당이 보인다
중앙시장 광장 주변. 성모 승천 성당이 보인다

끊어진 나팔 소리의 사연이 슬프다. 1241년 몽골군이 크라쿠프에 침입했을 때, 이를 목격한 나팔수가 나팔을 불어 사람들에게 알리다가 몽골군의 화살에 맞아 죽었다. 목숨을 걸고 위급함을 전했던 그를 추모하고자 크라쿠프 사람들은 끊어진 나팔소리를 재현했고, 지금까지도 크라쿠프 광장에서 매시간 미완의 곡이 울리고 있다. 1596년 바르샤바가 수도가 되기 전까지 크라쿠프는 폴란드의 수도였다. 왕정과 경제의 중심지, 즉 몽골은 폴란드의 심장을 저격했던 것이다.

크라쿠프 구시가에는 중세 분위기가 그대로 배어 있다
크라쿠프 구시가에는 중세 분위기가 그대로 배어 있다
연말을 맞아 특히나 활기찬 중앙시장. 장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연말을 맞아 특히나 활기찬 중앙시장. 장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500년 넘게 이어진 왕의 품격은 크라쿠프 구시가에 짙게 배어 있었다. 중세식 건물과 성당, 조각상, 보이는 대부분의 것들이 옛 모습 그대로라는 점이 바르샤바와의 가장 큰 차이점이다. 2차 세계대전으로 바르샤바가 무너진 것과는 달리 크라쿠프가 상대적으로 온전할 수 있었던 이유는 다름 아닌 독일 나치군의 주둔지였기 때문이다. 역설적이지만, 결과적으로 크라쿠프에는 중세 도시에서 상상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요소들이 존재한다. 고풍스러운 가로등이 거리를 점거하고, 자전거와 트램이 다니는 도로를 마차 또한 활보한다. 주름 때가 깊게 낀 동상 앞은 여전히 크라쿠프 사람들의 만남의 장소다. 흐트러진 시간 감각이 조금씩 되돌아온 건 두 번의 나팔 소리가 더 끊기고 난 뒤. 완전히 광장을 벗어나고 있었다.

성모 승천 성당
주소: plac Mariacki 5, 31-042 Krakow

 

●성의 결말은 성스러웠으니


한동안 왕의 길을 따라 걸었다. 옛 왕족들이 다녔다고 해서 로열 루트(Royal Route)라고 불리는 길은 중앙시장 광장에서 시작해 그로츠카 거리(Ulica Grodzka)를 따라 꽤 높은 언덕으로 이어졌다. 비스와강이 훤히 내다보이는 그곳에 바벨성(Zamek Krolewski na Wawelu)이 있었다. 웅장하다기보다는 정답고 포근한 인상이 강했다. 

폴란드 왕정 문화와 종교의 중심이 됐던 바벨 대성당
폴란드 왕정 문화와 종교의 중심이 됐던 바벨 대성당

바벨성은 1596년 지그문트 3세 바자가 수도를 바르샤바로 옮기기 전까지 폴란드의 왕이 지냈던 곳이다. 처음에 로마네스크와 고딕 양식으로 지어졌지만 1504년 이탈리아와 독일 건축가들의 손에 르네상스 양식이 주를 이뤘다가, 1595년 화재 발생 후 또다시 이탈리아 건축가들에 의해 바로크 양식으로 증축됐다는 게 지금 성의 모습을 갖추게 된 과정이다. 외관뿐만 아니라 주인도 여러 번 바뀌었다. 왕실이 떠나고 남겨진 성은 1795년 오스트리아의 손에 넘어가 군사병원으로, 2차 세계대전 때는 나치 총독의 거처로 쓰이기도 했다. 지금은 폴란드 역사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어느새 날이 어둑해지고 있었다. 박물관을 둘러보는 대신 왕궁 옆에 맞닿은 바벨 대성당(Katedra Wawelska)으로 향했다. 바벨 대성당은 단순한 종교적 장소 그 이상의 위엄을 가지고 있다. 왕의 대관식과 장례식이 열렸던 장소, 비(非)이탈리아인으로서는 첫 교황이 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미사를 올린 성당, 폴란드 건국의 아버지로 불리는 유제프 피우스트스키(Jozef Piłsudski)를 비롯한 수많은 영웅과 문학가들이 묻힌 곳. 들으면 들을수록 폴란드 사람들에게 ‘지극히 성스러운 장소’로 여겨진다는 말이 자명해졌다. 폴란드 사람들처럼 바벨성을 기억하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대단한 역사도 역사거니와, 이날 성에서 바라보는 어스름마저 성스러웠으니. 대성당 앞 잔디를 건너 성곽의 끝에 닿았을 때는 붉은 노을이 한창이었다. 이내 강물 위로 해가 닿자 하늘은 보랏빛에 가까워졌다. 밤이 찾아온다는 뜻이다.

▶HOTEL
퓨로 크라쿠프 카지미에시 PURO Krakow Kazimierz

감각적인 인테리어가 돋보이는 디자인 호텔. 크라쿠프 중앙시장 광장 및 레스토랑, 카페, 편의점 등 편의시설들이 걸어갈 수 있는 거리에 있다. 1층에 있는 카페 겸 베이커리 ‘MAK’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으면 크라쿠프 로컬이 된 것 같은 기분이다.
주소: Halicka 14A, 31-036 Krakow
홈페이지: purohotel.pl/en/krakow-kazimierz

▶SPOT
비엘리치카 소금광산 Wieliczka Salt Mine

크라쿠프를 여행할 때 꼭 한 번은 들르는 명소. 13세기부터 소금을 채취했던 흔적을 탐험할 수 있다. 단순히 소금을 캐는 작업장으로서가 아니라 성당과 결혼식장 등 이곳에서 생활한 광부들의 삶을 엿볼 수 있다는 데 더 큰 재미가 있다. 가이드 투어로만 진행되기 때문에 사전 예약이 필수다(한국어 가이드 없음). 소금 기념품 숍도 그냥 지나칠 수 없다. 
주소: Daniłowicza 10, 32-020 Wieliczka
홈페이지: www.wieliczka-saltmine.com

 

글·사진 김예지 기자
취재협조 LOT 폴란드항공 www.lot.com
폴란드관광청 www.poland.trav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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