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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사도 순례길, 물때도 사람을 머물게 한다

기점·소악도

  • Editor. 김민수
  • 입력 2020.04.01 10:00
  • 수정 2020.04.21 09:3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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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두길로 이어진 섬과 섬. 
걸음은 들물에 사라진 노두길 앞에서 멈추어 선다. 
바닥에 주저앉아 건너편 섬을 보니 웃음이 절로 난다.
그토록 바라던 여유로운 시간. 
이제부터 계획에 없던 진짜 여정이 시작된다. 

노두길에 물이 빠지기만을 기다리는 차량들
노두길에 물이 빠지기만을 기다리는 차량들

●“뭣이 그렇게 바쁘당가요?”


여객선 객실 안, 여객선이 소악도에 가까워질수록 남자들은 불안해 보였다. 이윽고 섬 주민으로 보이는 아주머니 한 분을 붙잡고 질문 공세가 이어졌다. “지금 도착하면 오늘 다 돌아보고 나올 수 있지요? 저희는 차를 가지고 왔거든요.” 어이없는 표정을 앞세운 아주머니의 한 말씀. “택도 없는 소리 하질 마소. 아무리 차가 좋아도 물에 잠긴 노두길을 워찌 건넌다요?” 매화도에 기항했던 여객선은 작은 섬 소악도와 소기점도를 지나 잠시 후 대기점도에 멈춰 섰고 차량 몇 대가 함께 내렸다. 바다를 향해 길게 뻗어난 선착장 끝점의 작은 예배당, 산토리니 성당을 연상케 하는 파란색 돔형 지붕과 순백의 몸체를 가진 ‘베드로의 집’은 12사도 순례길의 시작점이다. 남자들을 포함한 차량의 주인들은 마음이 급한 듯했다. 휴대폰에 사진 몇 장을 담고는 다음 예배당을 향해 휭하니 사라져 갔다.

순례길은 느릿느릿 싸목싸목(천천히) 걷는 길이다
순례길은 느릿느릿 싸목싸목(천천히) 걷는 길이다
바닷물이 물러간 갯벌에 드리워진 저녁노을
바닷물이 물러간 갯벌에 드리워진 저녁노을

●12사도 순례길 


대기점도, 소기점도와 소악도는 전라남도의 2017년 ‘가고 싶은 섬’에 선정되었고 ‘12사도 순례길’이 그 사업의 하나로 조성되었다. 대기점도에서 시작해 마지막 딴섬까지 이어지는 12km의 탐방로에는 12사도의 이름을 딴 작은 예배당이 세워졌다. 다양하고 각기 독특한 모습을 자랑하는 예배당은 국내외 11명의 설치미술 작가들이 참여해 지은 것이다. 각각 건축미술 작품에는 갯벌 등에서 채취한 자연물과 주민들의 오랜 생활 도구들이 재료로 사용됐다. 순례길은 기독교적 색채를 가지고 있지만, 궁극적 의미를 단일 종교에 두고 있지는 않다. 예배당은 불자에게는 암자, 가톨릭 신자에겐 공소, 이슬람 신자에게는 기도소, 종교가 없는 이들에겐 쉼터가 되기도 한다. 순례길은 섬 주민들의 생활도로와 거의 일치한다. 이 때문에 섬의 문화와 삶이 걷는 자의 정서를 파고든다. 그 길은 걸어도 되고 자전거를 이용해도 좋다. 특히 병풍도와 이어진 17km의 노두길 라이딩은 생각만으로도 근사하다.

지금은 폐교가된 소악분교
지금은 폐교가된 소악분교

●노두길이 잠기면? 


대기점도와 소기점도를 잇는 노두길이 물에 잠겼다. 다섯 번째 예배당 ‘필립의 집’ 앞에서 걸음과 함께 갈등도 멈춰 섰다. 예배당 벽에 기대앉았다. 미세먼지 하나 없는 하늘과 하루의 끝을 향해 치닫는 태양을 보았다. 마을부터 따라온 개 한 마리는 꼬리를 치며 여전히 곁을 맴돌고 있다(섬 개들이 나를 좋아하는 이유가 뭘까?). 꼭 무언가를 하지 않아도 괜찮은 시간, 건널 수 없으니 괜한 조바심도 놓아 버렸다. 함께 들어온 남자들은 결국 순례길 전체를 돌아보지 못하고 마지막 배로 섬을 떠난다고 했다. 다음번에는 차를 두고 여유롭게 오겠노라며. 얼마나 지났을까? 물이 빠진 갯벌에 노을이 드리워졌다. 12사도 순례길에는 민박과 게스트하우스가 잘 갖춰져 있어 잠자리 걱정은 없다. 하지만 이번에는 가지고 다니던 침낭과 비비색으로 잠자리를 만들고 섬 밤을 보내기로 한다. 다시 첫 번째 ‘베드로의 집’, 창틈으로 새어 나오는 예배당 불빛이 따뜻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가만히 누워 바라본 하늘에는 별이 가득하고 밤새 바다는 다가오고 멀어졌다.

바르톨로메오의 집, 소기점도
바르톨로메오의 집, 소기점도
토마스의 집, 소기점도
토마스의 집, 소기점도
시몬의 집, 진섬
시몬의 집, 진섬
갸롯유다의 집, 딴섬
갸롯유다의 집, 딴섬

●자연 위에 놓인 길


지난밤 발갛고 커다란 달이 올랐던 그 자리에서 또 다른 하루가 시작되었다. 물에 잠겼던 노두길이 다시 모습을 드러내었다. 농사를 주업으로 하는 섬에는 작은 저수지가 많다. 일곱 번째 예배당 ‘토마스의 집’은 한편에는 바다를, 또 다른 편에는 저수지를 품고 있어 어느 곳에서 바라보든지 매우 아름다운 정취를 자아낸다. 또한, 저수지에 반영된 예배당의 모습은 목가적이다. 여덟 번째 ‘마태오의 집’은 노두길 옆 갯벌 위에 놓였으며 열두 번째 ‘가롯유다의 집’은 모래톱으로 연결되었다가 물이 들면 그 자체가 고립된 섬이 된다. “예배당은 인공적인 조형물이지만 자연 위에 그대로 놓였지요. 그래서 바라보는 방향과 물때에 따라서 모습이 달라요. 그런데 순례길을 한 번 걷고 어찌 다 보았다고 하겠어요? 다른 계절도 있잖아요.” 빙그레 미소 짓는 마을 주민의 얼굴에서 가을 순례길을 떠올려 본다.  

베드로의 집, 대기점도
베드로의 집, 대기점도
작은야고보의 집, 소악도
작은야고보의 집, 소악도
유다타대오의 집, 진섬
유다타대오의 집, 진섬
안드레아의 집, 대기점도
안드레아의 집, 대기점도
야고보의 집, 대기점도
야고보의 집, 대기점도
요한의 집, 대기점도
요한의 집, 대기점도
마테오의 집, 소기점도와 소악도 사이 노두길
마테오의 집, 소기점도와 소악도 사이 노두길
필립의 집, 대기점도
필립의 집, 대기점도

 

대기점도에 머무는 동안 벗이 되어 주었던 웰시코기
대기점도에 머무는 동안 벗이 되어 주었던 웰시코기

▶기점·소악도

순례길
12km의 순례길에 걸쳐 12개의 작은 예배당이 자리한다. 대기점-소기점-소악-진섬-딴섬까지 천천히 걸으면 4시간 정도가 소요된다.

숙박
소기점도에 마을법인에서 운영하는 게스트하우스가 있다. 남녀가 구별된 도미토리룸으로 1인당 2만원. 마을 민박은 2인 1실에 5만원이다. 카페는 마을 식당으로 운영되어 예약 없이 식사할 수 있다.

자전거 대여
물이 빠지면 병풍도에서 대기점도, 소기점도, 소악도, 진섬까지 17km의 노두길이 열린다. 대기점도 북촌마을에서 자전거를 빌릴 수 있다. 아침 8시부터 저녁 6시까지 운영되며 비용은 반나절 5,000원, 종일 1만원이다. 

숙소예약
홈페이지: 기점소악도.com
전화: 010 9089 5324(윤희찬 사무장)

찾아가기 | 대부분 압해도 송공선착장(해진해운 061 244 0803)에서 대기점도로 들어간다. 1일 4회 운항. 병풍도를 거쳐 입도할 경우 지도 송도선착장, 증도 버지선착장(정우해운 061 247 2331), 무안 신월선착장에서도 배를 탈 수 있다. 1일 2~4회 운항. 

 

글·사진 김민수(아볼타) 에디터 천소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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