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에선 그래도 괜찮아
제주에선 그래도 괜찮아
  • 이은지 기자
  • 승인 2020.04.20 09:0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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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우지해안 선녀탕에 사람들이 드문드문 앉아 여유를 즐긴다
황우지해안 선녀탕에 사람들이 드문드문 앉아 여유를 즐긴다

눈길 닿는 곳마다 다른 빛이 너울거렸다. 끝을 알려주지 않는 바다, 바람에 곁을 내어준 억새. 한 마디로 표현하기 어려운 색을 바라보며 용기를 얻었다. 그래, 애써 분명하게 살지 않아도 괜찮겠다고.

알록달록 해녀 페인팅
알록달록 해녀 페인팅
올레길을 걷다 만난 아늑한 카페
올레길을 걷다 만난 아늑한 카페

●굳이 방향을 알려주지 않아도


꼬닥꼬닥(천천히) 누군가의 발자취를 좇았다. 올레길은 제주 한 바퀴를 직접 걸어 이은 길이다. 이 길이 맞나 싶은 자연 그대로의 흙길, 걷기 쉽게 만들어 놓은 나무 보행로, 돌고 돌아 마을 어귀로 들어가는 시멘트길까지 그 모습도 다양하다. 


그중에서도 해안 절경을 그대로 품어 아름답기로 소문난 올레7코스를 걸었다. 시작은 황우지해안이다. 저 멀리 짙은 푸른색부터 발치의 연한 풀빛까지. 파도가 출렁일 때는 명도를 달리하며 수시로 변신을 거듭한다. 세상의 모든 색을 담을 수 있는 건 어쩌면 물이 아닐까. 이른 봄 한가로이 앉아 바다에 풍덩 몸을 던지는 상상을 해본다.

우뚝 솟은 외돌개
우뚝 솟은 외돌개

우거진 나무 사이로 외돌개를 만났다. 홀로 우뚝 솟았다는 뜻의 외돌개는 다양한 이름을 지녔다. 고려 말기 몽골족이 장군인 줄 알고 놀라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전설에서 비롯된 장군석, 풍랑을 만나 돌아오지 못하는 할아버지를 기다리다 그대로 바위가 되어버렸다는 할망바위. 외돌개는 철썩철썩 몰아치는 파도에 제 몸을 내어주며 무려 150만 년 간 이야기 속 주인공 자리를 지켰다.

방향을 알려주는 이정표
방향을 알려주는 이정표

파란색 혹은 주황색. 화살표를 따라 걷다 보면 이따금씩 갈림길이 나온다. 외돌개와 돔베낭길 사이에 멈춰 주위를 둘러본다. 어느 길이 맞는지 망설이다 한 쪽을 택했다. 한 걸음씩 옮기다 보니 이내 무용한 생각임을 깨달았다. 갈래갈래 흩어진 샘물이 아래로 흘러 큰 강을 이루듯 결국 같은 줄기였음을. 방향이 있는 한 세상의 모든 길은 하나로 통하지 않던가! 굳이 이정표를 찾아 헤매지 않아도 된다.

한낮의 따사로운 햇볕이 서귀포 치유의 숲에 깃든다
한낮의 따사로운 햇볕이 서귀포 치유의 숲에 깃든다
서귀포 치유의 숲
서귀포 치유의 숲

●모든 이에게 치유를


느린 관찰 속에서만 발견되는 것이 있다. 가령 따스한 봄바람에 미세하게 흔들리는 나뭇잎이라던가, 멈춰 서서 두어 번 숨을 마셨다 내쉬길 반복해야만 느껴지는 텁텁하고 구수한 흙냄새라던가. 서귀포 치유의 숲과 거문오름은 모두 사전 예약이 필요하다. 편한 옷차림과 운동화도 필수. 게다가 방문객이라면 지켜야 할 사소한 매너가 있으니, 바로 라디오와 스마트폰의 소리는 잠시 꺼두고 숲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서귀포 치유의 숲 입구에는 가족의 안녕을 기원하는 메시지가 걸려있다
서귀포 치유의 숲 입구에는 가족의 안녕을 기원하는 메시지가 걸려있다

서귀포 치유의 숲은 말 그대로 치유의 공간이다.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무장애숲길인 노고록헌(여유있는)숲이 맞이하는데, 마치 자신을 돌아보고 보듬어 줄 권리는 누구에게나 평등하다고 속삭이는 듯하다. 노고록헌숲을 지나면 제주 고유의 소리를 본 딴 10개의 숲길이 나온다. 총 15km의 넓은 숲길의 끝자락에 위치한 힐링센터에서는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고, 간단하게 스트레스를 측정할 수도 있다. 다양한 프로그램도 놓치지 마시길. 산림 치유 프로그램과 마을힐링해설사와 함께 하는 숲길 힐링 프로그램도 마련돼있다. 

거문오름의 억새가 바람을 따라 한 방향으로 흘러간다
거문오름의 억새가 바람을 따라 한 방향으로 흘러간다

거문오름은 정상 코스, 분화구 코스, 전체 코스 총 3가지 코스로 나뉘어있다. 탐방로는 짧게는 1시간부터 길게는 3시간30분까지 소요된다. 오르막길을 따라 펼쳐진 삼나무 군락지를 지나면 희귀식물인 붓순나무, 식나무들이 반겨준다. 주변을 가득 메우는 초록색에 눈이 맑아지고, 지저귀는 청명한 새소리에 귀가 뻥 뚫린다.

용암동굴의 천장이 무너지면서 생긴 용암협곡, 지층의 변화를 관찰할 수 있는 풍혈, 항아리 모양의 독특한 수직동굴까지 자연의 경이로움을 만끽해본다. 용암함몰구에서는 연중 일정한 온도와 습도가 유지돼 겨울에도 울창한 숲을 유지하고 독특한 식생을 구성한다. 거문오름은 아픈 역사마저 품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군은 제주를 군사기지로 이용하고자 했는데, 탐방로를 걷다 보면 일본군이 만들어 놓은 10곳의 갱도진지를 발견할 수 있다. 

돌문화공원에서는 시대별, 생활사별로 다양한 돌을 만날 수 있다.
돌문화공원에서는 시대별, 생활사별로 다양한 돌을 만날 수 있다.
돌문화공원
돌문화공원

●결코 스쳐 지나갈 수 없는


돌에 대한 편견이 있었다. 돌은 다 똑같지 않을까? 길을 걷다가도 가끔 발에 차이는 게 돌이라서, 투박한 생김새가 어쩐지 지나치게 평범한 것만 같아서였다. 그래서였을까. 1년에 한 번은 꼭 제주를 찾으면서도 돌문화공원은 한 번도 와볼 생각을 않았다. 하지만 돌문화공원은 그저 스쳐 지나가기에는 아까운 곳, 만만히 봤다가 크기에 압도되는 곳이다. 가벼운 마음으로 잠시 들렀다면 각오를 단단히 하시라. 잠깐 둘러봐도 어느새 2시간은 지나있을 테니.

돌문화공원에서 사람의 손길이 깃든 돌은 투박하기도, 정겹기도 하다
돌문화공원에서 사람의 손길이 깃든 돌은 투박하기도, 정겹기도 하다

돌문화공원은 우리 삶에 자리한 돌의 면면에 대해 펼쳐낸 사전이다. 제주의 형성 과정과 제주민의 삶 속에 녹아 있는 돌 문화를 종합적이고 체계적으로 보여주는 박물관이자 생태공원이라고도 할 수 있다. 총 3코스가 100만평 규모로 조성돼있어 모두 둘러보려면 꼬박 3시간은 걸린다. 동굴과 주춧돌 등 주거부터 시작해 무덤 앞에 세우는 동자석,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는 방사탑까지 돌은 우리의 생활과 의식 곳곳에 깃들어있다. 우리 삶 속에 돌이 이렇게 많았던가, 이다지도 중요했던가 돌아보게 된다. 

이 넓은 공원은 ‘설문대할망과 오백장군’ 이라는 한 가지 주제를 관통하고 있다. 세상에서 가장 키가 크고 힘이 센 설문대할망은 바닷속의 흙을 삽으로 떠서 제주도를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지역별로 다른 설화가 전해지는데, 한라산 영실에서는 오백장군에 관한 이야기가 있다. 한라산에 살던 설문대할망은 아들을 위해 죽을 끓이다 가마솥에 빠지게 되고, 그 죽을 먹은 아들들이 그대로 오백장군 바위가 돼 버렸다는 얘기다. 공간이 들려주는 슬프고도, 애절한 스토리텔링에 빠져든다. 

●그 섬에 내가 있었네


슬슬 사람이 그리워진다. 사람 냄새 물씬 풍기는 두 곳을 찾았다. 김영갑갤러리두모악은 사진을 사랑하는 이들의 성지다. 김영갑 작가는 제주의 아름다움에 매료돼 제주에 정착해 평생을 살았다고. 들판의 당근이나 고구마로 허기를 달래며 밥 먹을 돈으로 필름을 샀다고 하니, 그가 담아낸 제주는 오롯이 그의 평생이다. 배고픈 줄도 모르고 사진에 열중하던 그는 어느 날 루게릭 병을 진단받는다. 이후 그는 폐교를 직접 리모델링해 미술관을 만드는 데 열중했다고 한다. 

김영갑 작가가 폐교를 직접 리모델링해서 만든 김영갑갤러리두모악에서는 그의 제주 사랑을 엿볼 수 있다
김영갑 작가가 폐교를 직접 리모델링해서 만든 김영갑갤러리두모악에서는 그의 제주 사랑을 엿볼 수 있다

갤러리는 작은 정원처럼 꾸며져 있다. 직접 현무암을 쌓아올린 담장은 소박하니 정겹다. 딱딱한 입장권 대신 오름 사진이 담긴 엽서를 받았다. 입구에서부터 커다란 선물을 받은 느낌이다. 갤러리에 전시된 사진들을 통해 그의 시각에서 제주를 본다. 제주에 대한 애정을 담아 포착해 낸 순간들은 가히 인상적이다. 잠시 머물렀다 떠나는 관광객들은 보지 못할 순간들을 그는 직접 살면서, 매일 오름을 오르면서 담고 또 담았다. 오름, 안개, 바람, 하늘, 그가 선사하는 제주의 풍경에 평온함과 왠지 모를 쓸쓸함이 동시에 느껴진다. 

서귀포에 위치한 이중섭 미술관과 이중섭 거리는 그가 피난을 왔던 1년여의 시간을 기억하는 장소다. 미술관 입구에는 우리에게도 친숙한 작품 <황소>를 재현해놓은 포토존이 마련돼 있어 인증숏을 남기기에도 좋다. 1층 전시실에서는 궁핍한 환경에서도 끊임없이 작품 활동을 이어나간 그의 열망을 느낄 수 있다. 그는 종이를 구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못이나 송곳으로 은지화를 남긴 것으로도 유명하다. 은지화는 대부분 아이들을 모티브로 그려졌는데, 아이들이 물고기와 어울려 노는 장면이 종종 등장한다. 떨어져 살고 있는 일본인 아내에게 남긴 구구절절한 연서는 또 어찌나 마음을 흔들어 놓던지. 누군가의 애정을 바라보는 일은 때로는 이토록 벅찬 일임을. 

 

●맛으로 힐링 완성


한 지역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시장에 가보는 것이 좋다. 그곳에서 많이 나는 특산물이라든지, 현지인이 좋아하는 음식이라든지. 시장은 생각보다 많은 것을 알려주기 때문이다. 시장을 가득 메우는 다양한 물건과 음식들에는 상인들의 고민이 깃들어 있다. 오랜 역사를 지닌 동문시장을 찾았다.

동문시장은제주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닌 상설 재래시장이다. 기념품을 사기 위한 관광객들로 늘붐빈다
동문시장은제주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닌 상설 재래시장이다. 기념품을 사기 위한 관광객들로 늘붐빈다
동문시장
동문시장

동문시장은 방대한 규모를 자랑한다. 과일, 생선 등의 음식은 물론이고, 제주에서 생산된 의류, 생활용품까지 제주의 모든 것을 담았다. 시장에 들어서자마자 감귤 초콜릿이 맞이한다.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감귤 초콜릿에 대한 추억을 간직하고 있지 않을까. 보고 싶은 이들을 위해 가방 가득 맛별로 초콜릿 박스를 이고 돌아갔던 기억이 떠올랐다.

다음은 오메기떡이다. 우둘투둘 통째로 표면을 장식한 팥들이 특유의 차분한 색감을 자랑한다. 이어 한국인의 대표 간식 떡볶이와 싱싱한 회까지. 시장은 두 손 가득 물건을 구매하며 쇼핑 리스트를 지워나가는 관광객으로 가득하다. 1번 출구 앞에는 시간이 멈춘 듯 500원에 호떡을 판매하는 노점이 늘어서 있으니 쇼핑의 마무리는 달콤한 호떡으로 장식해보자.

제주에서 만난 고양이 가족
제주에서 만난 고양이 가족

두 손 무겁게 밖으로 나서는 순간 고양이 가족을 만났다. 햇빛을 받아 따끈하게 뽀송뽀송한 모습이 꼭 조랭이떡을 닮았다. 마음이 노곤노곤 따스해졌다.


글·사진 이은지 기자 even@traveltim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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