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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쪽 바다가 내어준 하루

  • Editor. 곽서희 기자
  • 입력 2020.04.20 10:05
  • 수정 2020.04.21 20:5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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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짓점에 모인 그들의 대화 주제는 분명 이 바다였을 것이다
꼭짓점에 모인 그들의 대화 주제는 분명 이 바다였을 것이다

봄의 입구에서 정동진은 탁월한 선택이었다.

●8톤 어치의 시간


꼭 박하사탕이 부서진 듯한 바람이었다. 청량하고 맑고, 또 화했다. 이토록 시원한 바닷바람은 간만이었다. 성큼 가까워진 동해였기에, 뜻밖의 설렘은 남다르게 느껴졌다. 올해 3월2일부터 강릉선 KTX는 동해역까지 발을 뻗었다. 서울역에서 2시간. 환승도 필요 없다. KTX를 타고 무궁화호 열차나 버스로 꾸역꾸역 갈아타던 시대는 2019년 겨울과 함께 막을 내렸다. 정동진은 바야흐로 ‘만만한’ 여행지가 됐다.

바다 곁 열차, 역에 가까워질수록 설렘은 배가 된다
바다 곁 열차, 역에 가까워질수록 설렘은 배가 된다
서울에서 훌쩍 가까워졌다는, 종종 만나자는 메시지
서울에서 훌쩍 가까워졌다는, 종종 만나자는 메시지

지난 20년간 정동진은 수많은 이들의 새해를 함께 했다. 매일 똑같이 뜨고 지는 해는 1월1일이면 남다른 의미를 부여받았다. 그리고 조금은 더 특별했던 새해, 밀레니엄을 알리는 2000년의 시작을 앞두고 정동진 앞바다에는 세계에서 가장 큰 모래시계가 세워졌다. 드라마의 인기 덕분이었다. <모래시계>는 이제는 내가 말도 채 떼지 못했을 시절의 드라마가 됐지만, 아직까지도 그 여운이 정동진 모래시계 공원에 짙게 남아있다.

모래가 아직 반도 채 떨어지지 않았다. 다음번 방문때는 얼만큼 떨어져 있을까
모래가 아직 반도 채 떨어지지 않았다. 다음번 방문때는 얼만큼 떨어져 있을까

공원 한가운데를 차지하고 있는 거대한 모래시계는 40톤의 무게를 자랑한다. 모래의 무게만 해도 8톤이다. 이 8톤 어치의 모래가 다 떨어지려면 꼭 1년이 걸린다. 매년 1월1일, 시계가 반 바퀴를 돌면 또 다시 모래가 흐르고 모든 것이 새롭게 시작될 터였다. 

시간의 역사는 기차 한 칸 한 칸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시간의 역사는 기차 한 칸 한 칸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시간박물관의 마지막 칸을 가득 채운 빼곡한 기록들. 글은 추억을 기억할 수있는 가장 진실되고 간편한 수단 같다
시간박물관의 마지막 칸을 가득 채운 빼곡한 기록들. 글은 추억을 기억할 수있는 가장 진실되고 간편한 수단 같다

모래시계 옆에는 낡은 기관차가 서있었다. 시간에 관한 모든 것을 전시해놓은 시간박물관이다. 국내 최초의 증기기관차와 7량의 객차를 활용해 만든 박물관에는 시계들로 가득했다. 시계들은 세상을 품고 있었다. 특히 프랑스 혁명 시대의 회중시계가 그랬다. 내가 보지 못했던 과거의 무수한 역사를 이 중후한 시계는 전부 보았을 터였다. 시간 앞에서 난 고작 100년 남짓 살아갈 뿐인 미생이 됐다. 한없이 겸손해졌다. 박물관의 마지막 칸은 방명록을 남기는 공간으로 꾸며져 있었다. 잠시 망설이다 이내 펜을 들었다. 속절없는 시간 앞에 내가 할 수 있는 건 어쩌면 기록밖에 없겠다는 생각과 함께. 

 

●퇴적된 시간의 흔적


무려 2,300만년 전이다. ‘만’ 자가 빠져도 까마득한 세월인데, 그 오래 전 지각 변동의 여파로 정동진에는 국내 최장 길이의 해안 단구가 만들어졌다. 그리고 이 비경 지대를 따라 2017년, 정동진 바다부채길이 개통됐다. 이름대로 탐방로의 지형 모양은 바다를 향해 부채모양으로 펼쳐져있다. 총 4코스로 이뤄져있는 바다부채길은 편도 2.86㎞, 걸어서는 약 70분이 걸린다. 천천히 1코스만 산책하든, 바지런히 4코스까지 정복하든, 선택은 자유다. 선택지가 훌륭하니 어떤 길을 택하든 후회는 없겠다. 

가파른 계단을 조심스레 내려오면동해가 꽁꽁 숨겨뒀던 보물 같은 광경이 펼쳐진다
가파른 계단을 조심스레 내려오면동해가 꽁꽁 숨겨뒀던 보물 같은 광경이 펼쳐진다

동쪽 바다는 봄이 한창이었다. 바다부채길 탐방로를 따라 계단을 내려가니 한순간에 시야가 푸른색으로 도배됐다. 바다, 그 넓은 바다는 눈치가 빨랐다. 누군가 귀띔해주지도 않았을 텐데 벌써부터 계절의 변화를 알아차리고 색을 바꿨다. 바닷물은 이 세상 물 중 가장 맑았다. 파도가 한 번 바위에 부딪혀 수 만개의 물방울로 부서질 때마다 덧없던 근심들도 조각나는 듯 했다. 퇴적된 시간은 흔적을 남겼다. 그 흔적은 기암괴석과 석화에 고스란히 담겼다. 


수많은 이들의 땀방울이 녹아있는 길이라서. 그 소중함은 배가 됐다. 바다부채길 조성은 까다로운 작업을 요구했다. 육로로 접근하기 힘든 해안 단구 지형 탓에 공사에 필요한 모든 장비와 물자는 해상 바지선으로 공급됐다. 인부들은 등짐을 나르는 수고를 감수해야했다. 1년 9개월의 시간, 그리고 총 70억원의 비용이 들고서야 비로소 바다부채길은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됐다. 


힘들여 만들었기에 가꾸는 데도 정성이 들어갈 수밖에 없다. 바다부채길은 4월4일부터 약 한 달간 보수공사에 들어갔다. 탐방로의 협소구간을 확장하고 가파른 계단로에 노약자 및 장애인의 편의를 위한 핸드레일이 설치된다나. 바람이 좀 더 따뜻해질 무렵, 바다부채길은 한층 편리해진 모습으로 관광객들을 맞이할 것이다. 기꺼이 모시고 오고 싶은 분들이 한 분 두 분 떠오른다. 

하슬라 아트월드의 최고 인기 포토존
하슬라 아트월드의 최고 인기 포토존

●언덕 위의 알찬 세계


굽이굽이 많이도 올랐다. 택시기사가 멈춰선 언덕에는 거대한 직사각형 두 개를 겹쳐놓은 듯한 건물이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복합예술공간인 하슬라 아트월드다. 버거로 따지면 패티 두 장이 깔린 버거와 치즈가 솔솔 뿌려진 감자튀김에 시원한 콜라까지 완벽하게 갖춰져 있는 세트 메뉴라고나 할까. 현대미술관, 피노키오미술관, 야외조각공원에 레스토랑과 카페, 그리고 호텔까지 풀 세트로 부족함 없는 구성이다. 여긴 정말 ‘월드’가 맞다. 

화려한 미술품덕에 눈이 호강한다
화려한 미술품덕에 눈이 호강한다

입구부터 독특한 조형물이 눈길을 빼앗더니 내부로 들어서자마자 웅장한 조각품과 설치미술품이 화려하게 맞이한다. 심오한 미적 해설은 둘째 치고, 우선 알록달록한 색감에 정신이 팔린다. 꽃과 정원을 주제로 한 전시관에서는 손이 바빠진다. 곳곳이 포토존 투성이다. 미술에 관심이 없다고 하더라도 사진 찍는 걸 좋아하는 여행자라면 그냥 지나치기 어려운 곳이다. 한 발짝 움직이고 찰칵. 또 한 걸음 가서 찰칵. 셔터를 누르느라 도무지 진도가 나가질 않는다. 피노키오 미술관에는 코가 길쭉한 거인 피노키오를 비롯해 크고 작은 인형들이 전시돼있다. 마리오네트 미술관의 인형들은 보다 적극적이다. 발자국 모양이 찍힌 바닥에 가만히 서있으면 마리오네트 로봇인형이 춤을 추고 말을 건넨다. 젠틀한 그의 인사에 마음을 빼앗긴다. 

군데군데 조각품 찾는 재미가 쏠쏠한 조각공원
군데군데 조각품 찾는 재미가 쏠쏠한 조각공원

3만3,000평의 조각공원까지 월드 구석구석을 남김없이 골고루 관람하고 내려오는 길이었다. 소화가 되지 않았다. 체하는 느낌이었다. 물리적인 소화가 아닌, 여행지를 소화하는 방식에 있어 그랬다. 너무 많은 것들을 보아서였다. 강력한 소화제가 필요했다. 역설적이게도 먹거리가 여행을 소화하는 데 도움을 줬다. 정동진역 바로 부근에 위치한 초당순두부는 수많은 아류들 중에서도 진짜 ‘원조’다. 찌개 안 보슬보슬한 두부만 봐도 느낌이 온다. 이 집은 제대로다. 혀로 두부를 지그시 누르면 부드럽게 으깨지면서 고소한 향을 풍긴다. 곁들인 반찬에는 감칠맛이 녹아있다. 돌아서는 발걸음이 아쉬워 모두부 한 개를 더 주문했다. 어쩌면 이 작은 두부 한 모가 정동진에 다시 와야 할 이유일지도 모르겠다.

포슬포슬 순두부에 여독이 녹는다
포슬포슬 순두부에 여독이 녹는다

 

글·사진 곽서희 기자 seohee@traveltim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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