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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수집가의 방구석 세계여행

  • Editor. 채지형
  • 입력 2020.05.01 1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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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처럼 편안했던 치앙마이 버즈네스트 카페.아기자기한 벽화와 낡은 의자가 마음을 끈다
집처럼 편안했던 치앙마이 버즈네스트 카페.아기자기한 벽화와 낡은 의자가 마음을 끈다

15년 전 에콰도르 쿠엔카에서 가방을 통째로 털렸다. 쫓아갔지만 동서남북으로 사라진 그들을 잡을 순 없었다. 가방에는 카메라와 망원렌즈, 지갑과 일기장, 엽서와 사탕이 있었다. 말로만 듣던 ‘사건’이 일어난 것. 그날 밤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생각했다. ‘세상 모든 일이 나에게도 일어날 수 있구나’라고. 광화문 네거리에서 교통사고를 당했을 때도 비슷했다. 빨간 신호등에 멈춰 있는데, 옆에서 차가 달려들었다. 차는 종잇장처럼 구겨졌고 결국 폐차장에서 짧은 생을 마감했다.  


2020년 봄, 악몽 같던 기억이 자꾸 떠올랐다. 무기력한 마음에, 우울도 스멀스멀 잠식하기 시작했다. 안타까운 뉴스는 놀라움을 넘어 경악, 두려움으로 변했다. 끝도 보이지 않았다. 앞산만 멍하니 바라보며 며칠을 흘렸다. 치사하게도 자연은 한껏 뽐내며 봄옷을 입고 있었다. 팝콘 같은 벚꽃과 푸른 하늘이 야속했다. 


원망하는 마음에 브레이크를 걸어 준 건, 거실 테이블 위에 빛나는 햇살이었다. 따스한 빛이, 강하게 내려오고 있었다. 내가 왔는데, 뭐하고 있냐고 묻는 것 같았다. 주저앉은 마음을 일으켜 세우고, 주변을 찬찬히 둘러봤다. 예쁜 쓰레기더미가 눈에 들어왔다. 아무렇게나 쌓여 있는 일기장, 먼지 가득한 인형, 베트남 시골마을에서 선물 받은 풀잎 메뚜기, 기린 모양의 책갈피. 고물상이 따로 없었다. 26년간 모으기만 했으니, 무리도 아니다. 무용하지만 소중한 여행의 흔적. 잊고 지내던 여행의 순간을 하나씩 호출하면서, 방구석 세계여행을 시작했다. 

사회적 거리두기가 힘들 정도로 촘촘하게 붙어 있는 인형들
사회적 거리두기가 힘들 정도로 촘촘하게 붙어 있는 인형들

첫 번째 도착지는 인형이다.

방 하나를 차지하고 있는 인형을 슥 훑어보기만 해도 어느 곳을 여행했는지 한눈에 알 수 있다. 인도에서 온 하누만 인형부터 터키의 수피댄스를 추는 인형, 러시아 백작부인 인형, 루마니아의 드라큘라 인형, 케냐의 마사이 부족 인형까지 크기도, 종류도 가지각색이다. 인형을 모으기 시작한 이유는 인형이 여행하며 만났던 이들을 닮았기 때문이다. 인형이 입고 있는 옷은 내가 식당에서 만난 그녀가 입는 옷이었고, 인형이 쓴 모자는 시장에서 본 멋쟁이 아저씨가 쓴 모자였다. 아프리카 인형을 손에 드니, 건조한 땅과 뜨거운 바람이 훅 다가왔다. 레게 머리를 한 엄마인형 등에 아기가 업혀 있는데, 아프리카에서 일상적으로 만나는 모습이다. 옷에는 원색의 아프리카 패턴이 그려져 있다. 일 하느라 바쁜 엄마와 등에 대롱대롱 매달린 아이. 인형을 볼 때마다 아프리카와 여인들이 떠오른다.  

루마니아에서 온 목각인형
루마니아에서 온 목각인형

미국 필라델피아 여행에서 데려온 프랭클린과 로키 인형을 보며, 취소된 미국 출장의 아쉬움을 달랜다. 100달러 지폐 모델이자 미국의 국부인 벤자민 프랭클린. 그가 성장한 도시가 필라델피아였다. 프랭클린 인형을 보니, 필라델피아의 프랭클린 파크웨이를 산책하던 시간으로 공간이동을 한다. 프랭클린 파크웨이에는 미술관이 줄줄이 모여 있는데, 그중 가장 유명한 곳이 필라델피아 미술관이다. 미술관 앞 계단은 영화 <로키>에 나온 인기 스폿이다. 계단 옆에는 로키 형상의 조형물이 손을 번쩍 올리고 있다. 마곡동 책상 위에 있는 로키의 식스팩은 볼펜으로 선을 그려 놓은 봉제인형일 뿐이지만, 즐거웠던 그날을 호출하기에 충분하다. 


탱고를 추는 아르헨티나 커플, 카리스마 넘치는 표정으로 풍성한 드레스를 펼치며 플라멩코를 추는 여인, 볼리비아 제1 수출품인 코카 잎을 따는 청년, 까만 천으로 얼굴을 가린 멕시코 사파티스타 민족해방군까지, 인형과 눈을 마주치는 것만으로 세계 구석구석을 어슬렁거리는 기분이 든다. 

여행의 순간을 기억하고 있는 일기장
여행의 순간을 기억하고 있는 일기장

두 번째 정거장은 일기장.

여행의 순간을 메모 앱에 기록할 때도 있지만, 보통은 종이에 볼펜으로 쓴다. PDA에 시시콜콜 타이핑한 시베리아 횡단열차 일기를 날려 버린 이후, 더 아날로그에 집착한다. 일기장이 모두 몇 권인지는 알 수가 없다. 26년 여행이 종이 위에 빼곡하게 붙어 있을 뿐이다. 좋아서 쓰는 일기지만, 고마운 마음도 든다. 일기는 여행작가를 만들어 준 일등공신이니까. 첫 책도 일기장을 옮긴 <유럽 일기>였으니까. 


일기는 시간여행을 시작하는 통로다. 마스크와 장갑을 장착하고 먼지로 가려진 일기장 여행에 빠져든다. 여행하면서 쓴 글은 대부분 거칠다. 하얀 종이 위에는 기쁨과 놀라움과 피곤과 불안이 생생하게 남아 있다. 에버노트의 슬로건처럼 ‘코끼리는 모든 걸 기억한다’면, 나에게 코끼리는 일기장이다. 일기장에서 발견한 재미있는 아이템 중 하나는 영수증이다. 일기 한 쪽에 붙어 있는 영수증은 무엇을 타고 먹고 샀는지 보여 준다. 매콤한 타코와 솔 맥주를 곁들인 점심 영수증은 짧았지만 설렘 가득했던 순간을 불렀고, 우붓의 로카보어 영수증은 엄마와의 특별한 여행을 호출했다. 빨간색 영수증은 네팔 포카라에서 버터 치킨과 버터 난, 플레인 난을 먹은 후 블랙커피를 마시고 580루피를 냈다고 알려 줬다. 손 글씨로 쓴 영수증을 훑어보니, 한 상 차려진 테이블과 주인장의 미소가 그려졌다. 빛이 가득 들어오는 테라스에 앉아 페와 호수를 보던 평화로운 순간으로 돌아간 듯했다. 지니가 요술램프로 마법을 부린 듯 묘한 기분이랄까. 일기장을 야금야금 파먹으며 다시 한 번 다짐한다. 다음 여행 때는 더 세밀하게 기록해야지라고. 


팁 하나. 여행지마다 특색 있는 일기장을 이용하다 보니, 크기가 천차만별이라 정리하기가 쉽지 않다. 마음에 드는 크기의 노트를 정해서 사용해 보자. 시간 순으로 모아 놓기만 해도 작품이 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올해부터는 나도!

세상을 압축적으로 보여 주는 마그네틱
세상을 압축적으로 보여 주는 마그네틱

세 번째 아이템은 앙증맞은 마그네틱이다.

기념품계 만인의 연인, 마그네틱. ‘산다’와 ‘붙인다’ 두 가지 작업이면, 집에서 마그네틱 세계여행이 가능하다. 아담한 마그네틱은 선물용이나 소장용으로 안성맞춤이다. 크기는 작지만, 마그네틱을 보면 그 나라 관광산업이 보인다. 마그네틱은 여행지의 랜드마크나 존경할 만한 인물, 특산물을 담고 있다. 예를 들어 라스베이거스라면 잭팟 슬롯을, 뉴욕이라면 자유의 여신상 모양을 하고 있다. 여행 산업이 발달한 도시일수록 종류가 다양하고, 허를 찌르는 마그네틱을 발견할 확률도 높다. 


아끼는 마그네틱 중 하나는 과테말라에서 산 ‘치킨버스’ 마그네틱이다. 과테말라의 버스는 항상 북적거려 치킨버스라고 부르는데, 이 마그네틱은 치킨버스 분위기를 그대로 살려 냈다. 버스 지붕 위에 과일이 넘치도록 쌓여 있고, 뒤에는 커피 포대가 대롱대롱 매달려 있다. 말레이시아에서 산 마그네틱은 국민음료인 떼따릭을 만드는 레시피를 담고 있고, 마카오 마그네틱은 거리 표지판 모양을 보여 주고, 남아프리카 공화국 마그네틱에는 얼룩말이 뛰놀고 있다. 지구본처럼 세상을 품고 있는 냉장고. 마그네틱의 먼지를 하나씩 털어내며, ‘그땐 그랬지’를 연발한다. 

팁 둘. 마그네틱을 냉장고에 붙여 놓기 부담스럽다면, 아담한 철판을 구입해 수집하는 방법도 추천. 별다른 인테리어가 필요 없다. 

따스한 햇살 아래서 즐거운 투정 중.태국 코사무이 라이브러리 호텔 앞 해변
따스한 햇살 아래서 즐거운 투정 중.태국 코사무이 라이브러리 호텔 앞 해변

네 번째는 따스함 가득 담긴 엽서다.

여행 때마다 부모님께 엽서를 보내곤 했다. 3박 4일 정도의 짧은 여행이나 정신없이 돌아가는 출장 때는 빼고. 세월은 부모님의 엽서 컬렉션을 도톰하게 만들었다. 궁금했다. 20대 첫 여행 때 뭐라고 부모님께 엽서를 썼는지. 얼마 전 친정 간 길에, 엽서 컬렉션을 잠시 빌려 왔다. 엽서는 일기와 사뭇 달랐다. 일기에 비장함이 묻어 있다면, 엽서에는 애틋함이 어려 있었다. ‘사랑하는 엄마, 아빠’로 시작한 엽서는 터미널 구석자리에서, 허름한 카페에서, 어두운 숙소에서 한 자 한 자 써 내려가던 길 위의 모습을 생각나게 해 줬다. 날씨가 더운지 추운지, 우리나라와 음식이 뭐가 다른지, 사람들은 잘해 주는지 좁은 엽서에 시시콜콜 적혀 있었다. 여행하면서 엽서 쓰는 일은 꽤나 신경 쓰이는 일이다. 우표도 사야 하고 우체통도 찾아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엽서를 쓰는 이유는 엽서보다 좋은 선물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거창한 내용이 아니라도 좋다. 엽서는 내용보다 마음을 전하는 방법이니까. 

이스터 섬 모아이 석상 앞에서 한 컷 ©황소연
이스터 섬 모아이 석상 앞에서 한 컷 ©황소연

1994년 첫 해외 배낭여행 때를 돌아보면, 엽서는 카톡이었다. 아버지가 간직하시던 1994년 여름 영수증을 보니, 국제전화 001 전화비로 한 통에 약 1만5,000원을 냈다. 3분이 찍혀 있었으니, 1분에 5,000원 꼴이라고나 할까. 꼭 필요할 때 아니고는 전화 대신 엽서를 썼다. 그래서 20여 년 전 쓴 엽서에는 부모님을 향한 그리움이 유난히 꾹꾹 박혀 있다. 엽서를 쓰다 보면, 따라오는 장점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우표다. 의도하지 않게, 각 나라의 특별한 우표까지 모으게 된다. 몇 년 전 인도에서 엽서를 부치다 나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우표 안에는 요가하는 여인이 그려져 있었다. 따라해 볼까 하는 생각이 살짝 스쳤다. 두 번째는 우체통이다. 세상 우체통은 모두 빨간색인 줄만 알았는데, 노란색, 하늘색, 초록색 등 색도 모양도 다양했다. 무심결에 찍어 놓은 우체통 사진으로 ‘세계우체통 사진전’을 열기도 했으니, 엽서 하나만으로도 여러 결의 세계여행을 한 셈이다. 

MBC 롯지에서 산을 오르며 떠오른 생각을 기록하고 있다 ©bruce
MBC 롯지에서 산을 오르며 떠오른 생각을 기록하고 있다 ©bruce

엽서와 관련된 팁 하나. 여행 떠나기 전 우리나라 엽서도 꼭 챙긴다. 길에서 만난 친구에게 우리 문화를 알려줄 때 유용하다. 헤어질 때 감사의 마음을 전할 때도 효과만점이다. 

그리움 가득 담아 띄우는 엽서.쿠바의 생생한 모습을 담고 있다
그리움 가득 담아 띄우는 엽서.쿠바의 생생한 모습을 담고 있다

 

마지막 주인공은 돈.

아프리카와 남아메리카, 피지나 세이셸 등 외환은행에서 환전해 주지 않는 나라를 다니다 보니, 지폐가 돈이라기보다 기념품처럼 느껴졌다. 대부분 나라의 화폐는 나라를 대표하는 인물의 초상을 사용해, 역사에 대한 호기심도 불러일으킨다. 특별한 모델을 담은 지폐는 재미를 더한다. 남아프리카공화국 지폐 모델은 야생 동물이고, 쿠바 지폐에는 체 게베라가 모델이다. 한 나라의 문화를 보여 주는 상징 같다고나 할까. 한 장, 두 장 모으다 보니 방 안에 자그마한 월드뱅크가 들어섰다. 1994년 첫 여행 때는 유로를 사용하기 전이라, 네덜란드, 벨기에, 스위스 국경을 넘을 때마다 환전을 해야 했다. 그때를 생각하면, 매일 밤 일기를 쓰면서 계산기를 두드리던 잠 못 들던 밤이 떠오른다. 

인도 코친에서 만난 동네 개구장이들과 찍은 기념사진 ©bruce
인도 코친에서 만난 동네 개구장이들과 찍은 기념사진 ©bruce

짐바브웨 지폐는 불안한 정국에 매일 돈 가치가 출렁여, 몇 백 달러가 사라진 아픈 추억을 소환해 줬다. 쿠바의 3페소 지폐는 더운 여름 아이스크림과 바꿔 먹으며 행복해하던 순간을 기억하게 해 줬다. 지난해 태국여행 때도 지폐가 인상적이었다. 오랫동안 지폐 모델을 하시던 ‘태국 역사상 최고의 국왕’ 푸미폰 국왕 서거 이후, 새 지폐가 나와 있었다. 마하와치랄롱껀 라마 10세 얼굴이 들어간 지폐였다. 푸미폰 국왕이 그려진 지폐가 서서히 사라지고, 라마 10세가 들어간 지폐가 눈에 많이 보였다. 두 지폐를 양손에 나란히 올려놓고 보니, 역사가 이렇게 흐르는구나 싶었다.  

기념품으로 모은 지폐. 엉겁결에 월드뱅크가 되었다
기념품으로 모은 지폐. 엉겁결에 월드뱅크가 되었다

 

글·사진  채지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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