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지금 무주는 빨강

  • Editor. 이우석
  • 입력 2020.06.01 10:0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무르익은 봄을 이고 선 저 산은 또 왜 이리 높고, 공기는 어찌 그리 맑은가. 푸른 만춘의 하늘에 붉은 이파리 홍단풍이 한가득 피어나, 신록의 계절에 화색을 더한다. 주(朱)에서 적(赤)으로, 홍(紅)에서 단(丹)으로 간다. 죄다 빨갛다는 의미다. 

무(武)의 기운이 흐르는 적상산 안국사
무(武)의 기운이 흐르는 적상산 안국사

호남 땅 무주(茂朱)는 고을 주(州)가 아닌 붉을 주(朱)를 지명에 쓰는 고을이다. 전주(全州)나 진주(晉州), 경주(慶州)와는 다르다. 홍(紅)이 아니라 주(朱)다. 귀신 쫓고 역마를 피할 수 있는 이름이니 어찌 청정하지 않을까. 조선조 민간 예언서 <정감록(鄭鑑錄)>에 등장하는 십승지지(十勝之地, 환란을 피할 수 있다는 곳)에도 무주 무봉산 북동방상동(현재 무풍면)의 이름을 ‘떠억’하니 올렸다. 왜란을 겪고 난 후 선조는 적상산에 사고(史庫)를 짓고 중요한 조선왕조실록을 감춰 뒀다. 십승지의 기세까지 생각하진 않았겠지만, 이곳에 보관하면 침략으로부터 자유로울 듯했다. 참! 적상산(赤裳山)은 ‘빨간 치마’다. 이 산의 녹음 속, 자줏빛 붉은 단풍이 숨어 있다.

거친 산자락 속에 계곡물 흐르듯 마을이 위치한다
거친 산자락 속에 계곡물 흐르듯 마을이 위치한다

●말과 길이 통하였도다


무주는 특이한 지형이다. 덕유산 자락 위에 금강을 끼고 들어앉았다. 말씨도 그렇다. 충청남북도와 경상북도에 딱 붙어 있어 여러 가지 어투가 섞였다. 삼도 사람이 내왕한다. 내도리 옆 방우리는 금산 땅(부리면)이다. 하지만 방우리 마을은 크게 S자로 휘도는 금강 줄기에 가로막힌 곳이다. 전북 무주를 거쳐야 충남 금산군청으로 일 보러 갈 수 있다. 반대로 충남 소속 우체부는 방우리 주민들에게 편지를 전하기 위해 전북 무주에 와서 점심을 먹고 방우리로 들어간다. 전화번호도 전북 번호를 쓴다. 실제 지형과 행정구역 간의 간극이 만든 ‘행정 섬’이다.

신라 백제가 맞닿은 요충지 라제통문
신라 백제가 맞닿은 요충지 라제통문

요즘뿐 아니다. 옛날에도 그랬다. 신라와 백제가 접경을 이뤘던 곳이 무주 무풍면이다. 이곳에 라제통문(羅濟通門)이 있다. 신라에서 백제로 통하는 문이다. 백제 땅 설천에서 산 하나, 내 하나 건너면 무풍. 백제 달솔과 신라 화랑이 JSA처럼 양측을 지켜 선 곳이다. 이 영향일까. 지금도 설천장이 서면 경상도 사투리를 심심찮게 들을 수 있다.


땅의 경계를 이루는 요충지라 외침이 잦았다. 덕택에, 아니 그 탓에 자연스레 무(武)의 기운이 발달했다. 적상산 안국사(安國寺)는 승병을 양성하던 호국사찰이다. 산정에서 바라보자면 안국사는 절집이 아니라 거의 요새에 가깝다. 지금이야 구곡양장의 도로를 따라 올라가야 닿을 수 있다지만 예전에는 가히 험준한 산성으로서 보물을, 백성을, 국가를 지켜 온 곳이다. 안전한 나라(安國)에 대한 믿음이 되살아난 요즘 안국사에 오르면 더욱 그 가치를 되새길 수 있다.

초여름 적상산에는 피나물이 군락을 이룬다
초여름 적상산에는 피나물이 군락을 이룬다

안국사에서 향로봉 쪽으로 오르자면 비탈 아래로 피나물 군락지가 있다. 어두운 숲속 한가득 노란색 꽃밭을 펼친 피나물. 녹음이 더욱 짙은 터라 노란 꽃은 더욱 빛난다. 피나물은 줄기를 꺾으면 새빨간 피를 흘린대서 붙은 이름이다. 무주가 가진 붉은색 중 또 다른 하나는 바로 피나무의 핏빛일 테다.

무주 태권도원이 위치한 백운산 전망대로 오르는 모노레일
무주 태권도원이 위치한 백운산 전망대로 오르는 모노레일

●‘진짜’ 원조 한류 태권도

 
무(武)의 기가 살아 있는 무주에 태권도원이 들어선 것은 우연이 아닌 듯하다. 산 좋고 공기 맑은 무주는 무예와 수련을 하기에 좋다. 세계 200여 개국에서 무려 8,000만명이 수련한다는 태권도는 ‘원조 한류’라 부를 만하다. 태권도를 배우는 외국인들은 종주국 한국에 가 보는 것이 일생일대의 로망이다. 

세계 태권도인의 성지, 태권도원
세계 태권도인의 성지, 태권도원

태권도원은 규모도 어마어마하다. 무주군 설천면 231만4,000㎡ 부지에 체험, 교육수련, 상징 등 3개 지구로 조성된 태권도원은 수양, 훈련, 생활체육과 체험, 국제경기 진행, 명예의 전당 등 여러 복합 기능을 한꺼번에 갖춘 세계 최초의 단일 종목 종합센터다. 테마파크형 체험시설들도 제법 많다. 모노레일을 타고 백운산 정상 전망대(560m)에 올라 360도 펼쳐지는 충남북과 경남북, 전북의 우렁찬 산세를 온몸으로 받고 내려와 태권도의 참맛을 즐길 수 있다. 박물관에선 우리가 그동안 잘못 알고 있던 태권도에 대해 정확하게 배울 수 있다. 여태껏 태권도가 태껸에서 나온 것으로 알고 있는 사람도 수두룩하다. 수박, 수벽타, 각저, 상박, 수박희, 병수 등이 태권도의 뿌리이며 이를 고증하는 여러 자료를 만날 수 있다.

태권도원  
주소: 전북 무주군 설천면 무설로 1482

   

시인묵객들이 남도제1경으로 꼽았던 구천동 계곡
시인묵객들이 남도제1경으로 꼽았던 구천동 계곡

●아주 녹록한 덕유산행 


무주를 간다면 덕유산을 간다는 의미도 된다. 향적봉을 오를 때 곤돌라를 타면 쉽다. 덕유산 리조트에서 타는 관광곤돌라는 불과 25분 정도 만에 설천봉(1,520m)에 데려다주고, 그곳에서 600m만 가면 향적봉(1,614m)에 설 수 있다. 누군들 수려한 산정에 서는 것을 마다하겠냐마는 실제 초여름 걷기는 녹록지 않다. 몸이 불편한 이도, 시간이 없는 이도 있고 노인과 아이에게도 여름 산행은 버겁다. 향적봉에 오르면 가까운 적상산부터 멀리 지리산, 민주지산까지 360도 파노라마로 펼쳐진다. 차가운 계곡에서 땀을 식히고 하늘 아래 파도처럼 굽이치는 산하를 내려다보는 즐거움, 여름날의 호사다.

구천동 계곡
구천동 계곡

20여 년 전까지 무주는 오지였다. 함경도 삼수갑산까지는 그렇다 치더라도, 남한에서 경상북도 BYC(봉화·영양·청송) 등과 함께 내륙 대표 오지로 꼽혔다. 사람들은 전라북도 무진장(무주·진안·장수)이라 불렀다. 라제통문이 중요하던 삼국시대 이후 근대까지 중앙의 관심에서 멀어진 탓에, 아니 덕택에 무주는 지금껏 청정 지역의 대명사로 남았다. 2001년 대전~통영 간 고속도로가 개통하면서 비로소 무주는 오지의 오명을 벗을 수 있었다.


이처럼 발길 디디기 어려운 땅이었음에도 덕유산 무주구천동은 명품계곡을 논할 때 누구든 고개를 끄덕이는 곳이다. 많은 시인 묵객들이 칭송했고, 현대에 와서도 어려운 길을 주저하지 않을 만큼 좋은 풍광을 품은 까닭이다. 녹음 짙은 구천동 계곡에는 딱딱히 말라붙은 도시 찌꺼기를 당장 씻어 낼 물이 콸콸 흐르고 있다. 이 명경 같은 물은 덕유산에서 내리는 것이다. 전북 장수와 경남 거창, 함양이 덕유산을 나눠 품었어도 역시 덕유산 산주는 무주로 꼽을 만하다. 주봉 향적봉을 오르는 설천면이 무주에 있고 거기서 내려오는 구천동 계곡까지 껴안은 덕이다. 구천동(九千洞). 명칭이 어색하다. 보통 무슨 산, 무슨 계곡으로 칭하는데 따로 거창한 이름을 뒀다. 훗날 붙인 행정구역도 아니다. 구곡양장으로 고불고불 흐르는 깊은 계곡에는 한때 절집이 14곳이나 있었는데, 수행하는 불자가 9,000명이나 된다 해서 그 이름이 유래했다고 한다.


무려 28km에 이르는 구천동과 인근에는 33경(景) 포인트가 있다. 33경이라니, 보통은 8경(八景)이 아닌가. 관동팔경이니 단양팔경이라는데 무려 33경이 내려오는 블록버스터급 명승지다. 제1경 라제통문부터 제33경 향적봉까지 둘러보는 데 꼬박 사나흘은 걸린다. 이 둘은 나눠 보는 것이 좋다. 15경 월하탄으로부터 향적봉까지 이어지는 계곡은 따로 내구천동으로, 설천의 끝자락 라제통문부터 14경 수경대까지 외구천동으로 구분한다.


길은 그리 가파르지 않아 하나씩 유람하듯 둘러보면 선현의 예찬이 헛된 것이 아님을 깨닫는다. 인기 좋은 드라마 시리즈처럼 지루할 틈을 주지 않는다. 길이 굽이칠 때마다 소(沼)와 폭(瀑)이 이어지며 점점 절정을 이루며 이어진다. 계곡을 따라 걷고 숨쉬는 것만으로도 보약 한첩이다. 이삼일 여행 중 33경을 모두 보지 않아도 된다. 아직 개발 계획이 없으니 평생을 두고 아껴서 볼 일이다.  

도리뱅뱅이
도리뱅뱅이

●맛있는 무주 


무주는 맑은 금강에서 잡은 민물고기를 이용한 어죽이 맛있기로 소문난 고장이다. ‘큰손어죽(무주읍 내도로)’은 도리뱅뱅이와 어죽, 민물매운탕을 잘 한다고 소문난 집이다. 신선한 고기를 매콤한 양념에 오래 끓여 내 부드럽고 감칠맛이 난다.

무주구천동 주차장 앞에도 여느 명산 입구처럼 산채정식집들이 즐비하다. 전주한식당은 직접 담근 장과 신선한 나물로 한 상 가득 차려 내는 밥이 맛있다. ‘소간’과 모양도 맛도 꼭 빼닮은 소간버섯에 취나물, 참나물, 더덕 등 반찬 가짓수도 많지만 하나하나 손 안 가는 것이 없을 정도의 상차림을 자랑한다. 맑은 물에서 채취한 올갱이(다슬기)에 집 된장을 넣고 끓여 낸 올갱이국도 있다.

어죽
어죽

무주읍 앞섬 마을에는 평생 금강 줄기에서 내수면 어업을 해온 어부가 운영하는 앞섬 어부의 집이 있다. 직접 잡은 쏘가리, 빠가사리, 마지 등으로 칼칼하게 끓인 민물매운탕 맛이 일품이다. 부각과 잡어조림, 김치 등 반찬도 좋다. ‘산아래가든’은 주민들이 ‘식 때’를 가리지 않고 찾아 만원을 이루는 집. 정식을 주문하면 민물장어와 조기, 더덕구이, 간장게장, 불고기, 잡채, 수육, 꼬막 등 남녀노소 모두 좋아하는 요리가 ‘반찬’이란 이름으로 한가득 상에 오른다.

 

이우석의 놀고먹기 
‘저세상’ 유머 코드와 황당한 상황극에 있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이우석 소장은 지난 연말 오랜 신문사 기자 생활을 마치고 ‘이우석놀고먹기연구소’를 열었다. 신나게 연구 중이다. 

글·사진 이우석  에디터 트래비 

저작권자 © 트래비 매거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최신기사
트래비 레터 요즘 여행을 알아서 쏙쏙
구독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