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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워와 COVID-19에 대한 단상

  • Editor. 정기영
  • 입력 2020.11.01 16:5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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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워기 물소리가 나뭇잎에 경쾌하게 부딪히는 소리가 울렸다.
바다 냄새, 나무 내음을 비누 삼은 샤워 시간. 아직 샤워 중.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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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끝나지 않은 샤워


담장 없이 우거진 수풀이 섬 안에서의 프라이버시를 온전히 보호해 준다. 최신식 음향 시스템이 잘 갖추어진 곳에서 맘에 드는 음악을 틀어 놓곤 수건을 챙겼다. 이른 아침 바닷가를 산책하느라 입었던 붉은 옷을 줄에 아무렇게나 걸어 놓고서 자갈길을 걸었다. 맨발로 걸으니 자갈에 남은 까슬한 모래알이 그대로 밟혔다. 감촉이 나쁘지 않았다.

야외에 설치된 샤워기를 틀었다. 쏴. 시원하게 쏟아지는 물줄기 아래 나무 내음을 비누 삼아서 샤워를 시작했다. 이따금 어느 작은 곤충이나 동물이 수풀 사이로 움직이는지 바스락대는 소리가 들렸다. 짐짓 주변에 아무도 없단 걸 확인하려 이마에서 속눈썹으로, 속눈썹에서 눈으로 스며드는 물을 몇 번이고 닦으며 주변을 살피게 됐다. 첫날엔, 그랬다.

이튿날부턴 경계심이 풀려 대범해졌다. 자연주의(?) 샤워 모습을 훔쳐볼 만한 이라곤 하늘을 날아다니는 박쥐(몰디브에서 박쥐를 보는 건 흔한 일이다)와 도마뱀 정도뿐인 걸 충분히 알았으니까. 야외 샤워기의 물줄기가 부드럽게 온몸을 쓰다듬어 준다. 차갑지도, 따뜻하지도 않은 물 온도다. 오디오에서는 크게 틀어 놓은 K-POP 가요, 팝송이 귓가에 쟁쟁하다. 아는 노래가 나올 때는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수도꼭지를 잠글 때 나는 끼익 하는 마찰음이 듣기 좋다. 둥그렇고 부드러운 자갈들로 빼곡한 바닥은 물기 때문인지, 샤워를 하기 전보다 색깔이 한층 진해진 것 같다. 


수건으로 물기를 닦으며 주변을 둘러봤다. 꽃도, 나무도, 어느 생물도 실오라기라곤 걸치지 않았다. 대관절 왜 홀로 부끄러움을 느꼈을까. 주위 시선 신경 쓸 필요 없이 순수한 상태로 돌아가 몸을 씻고 나니 해방감이 차올랐다. 꼭 섬에서, 야외에서 몸을 씻기 때문은 아니었다. 사람이든, 공기든, 바쁘게 돌아가는 대도시 생활에서도 샤워나 반신욕의 시간에는 특별한 구석이 있다. 적당히 따스한 물줄기에 온몸을 맡기노라면 하루 동안의 긴장이 풀리고, 흐트러졌던 마음도 잃었던 흐름을 되찾는다.

빗방울이라곤 한 방울도 내리지 않을 거 같은 적도의 새파란 하늘도 잠시 올려다본다.?가만히 귀를 기울여 본들, 수풀 너머 바닷가에는 투명한 게들이 소리 없이 아우성이다. 좀 있다가?적도의 해가 중천에 떠오르면 돌바닥의 물기는 순식간에 공기 중으로 증발할 것이다. 세계에서 가장 낮은 국가, 언제 종적을 감출지 모르는 어느 섬에서 허락된 어쩌면 최후의 샤워. 


●‘씻다’의 의미를 생각하다


지난여름에는 비가 유독 많이 내렸다. 그로부터 몇 달 전 COVID-19가 세상을 강타했다. (겁을 먹었지만) 한편으로 안도했었다. 이 말에는 전제가 필요하다. 한 여자 인간으로서, 급여생활자로서, 육아노동자로서 피로가 누적된 상태였다. 이를 부인하기 위해 꽤 안간힘을 쓰던 시기였다.

아이가 생기면 몇 년간은 여행을 가지 못하리라는 주변의 말에 반기라도 든 레지스탕스처럼, 여행을 감행했다. 팬데믹으로 여행길이 막혔을 때, 발리행 비행기와 숙소를 취소하는 일련의 과정에서도 내심 안도했다. 한동안 여행을 내려놓을 수 있게 됐으므로. 그리스행 비행기를 예약하려던 손은 이제 KF94 마스크를 검색하기에 바빴다.

한때 뜨겁게 사랑한다고 외치던 연인, 아니 여행에 대한 갈증이 이렇게 얄팍한 거였을까.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진심으로 여행을 좋아하긴 한 걸까, 헷갈리기까지 했다. 실은, 퍽 지친 상태였기 때문인데 말이다. 그 후로 집 안에서 지내는 시간이 길어지며 창밖에 내리는 소나기(Shower)가 바이러스를 씻어 주길 바랐고, 외출하고 돌아오면 온수로 깨끗이 몸을 씻어야 안심이 됐다. 


<사피엔스>를 집필한 세계적인 석학 유발 하라리에 의하면 손 씻기의 중요성이 세상에 알려진 건 불과 19세기부터였다고 한다. 그는 ‘이 간단한 행동은 매년 수백만 명의 생명을 구한다’라고 했다. 이탈리아어로 ‘씻는다, 세탁하다, 정화하다’는 Lavare(라바레)다. 라벤더(Lavender)의 이름이 여기에서 나왔는데, 고대 로마 사람들은 라벤더 꽃을 입욕제로 사용하거나 세탁을 할 때 넣는 것을 좋아했다고 한다.

우리말 중에 ‘씻은 듯이’라는 말은 ‘아주 깨끗하게’라는 의미로 쓰인다. 여전히 우리를 괴롭히고 있는, COVID-19가 곧 ‘씻은 듯이’  사라지면 좋겠다. 그렇기에 세상은 샤워 중.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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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워나 반신욕의 
시간에는 
특별한 구석이 있다. 
적당히 
따스한 물줄기에 
온몸을 맡기노라면 
하루 동안의 
긴장이 풀리고, 
흐트러졌던 마음도 
잃었던 흐름을 
되찾는다.

 

글·사진 정기영  에디터 김예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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