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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마리아주, 독일 소시지와 리슬링

  • Editor. 김예지 기자
  • 입력 2021.02.01 08: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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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 낮, 꽃처럼 온화했던 코부르크 중앙광장
토요일 낮, 꽃처럼 온화했던 코부르크 중앙광장

지난 여행을 안주 삼아 기어이 한 병을 비우고야 말았다.

 

●코부르크로 수렴하는 
뇌의 레퍼토리 


‘르크’와 소시지의 날들이 이어지고 있었다. 아우구스부르크, 뉘른베르크, 로텐베르크, 하이델베르크, 밤베르크의 소시지를 줄줄이 맛본 것이다. 그리고 코부르크, 토요일 낮. 꽃시장이 들어선 광장은 느지막이 하루를 시작한 사람들로 슬렁슬렁 채워지기 시작했다. 튤립 한 다발에 앤티크 포스터 하나, 빵에 든 소시지. 5유로는 반나절의 행복을 사기에 충분했다. 그날은 정말 그걸로 충분했다. 여느 연애의 수순처럼 여행도 가끔은 느슨해지기 마련이다. 마틴 루터가 성경을 번역했다는 궁전에도, 그가 설교를 했다는 교회에도 구미가 당기지 않았다. 돌아온 숙소에서 핫도그와 맥주로 어중간한 끼니를 때웠다. 낮과 밤이 무색한 잠을 잤다.


코부르크의 기억이 여전히 실한 것이 유독 통통했던 부어스트(Wurst, 독일식 소시지) 때문만은 아니다(어쩜 그렇게 간도 딱 맞는지). 작지만 고풍스러운, 아무 일도 일어날 것 같지 않던 그 도시가 나는 어딘가 맘에 들었다. 그래도 근거를 하나 들자면 이렇다. 핫도그의 원조는 흔히 프랑크푸르트로 알려져 있지만, 국제 핫도그 소시지 협회(란 게 존재한다, National Hot Dog and Sausage Council)는 17세기 후반 코부르크에서 정육점을 운영하던 요한 게오르크헤너(Johann Georghehner)가 처음 핫도그를 만들었다는 주장을 제기한 바 있다. 지금까지도 후자를 굳게 믿고 있다.

두 손을 꼭 잡고 장을 보던 노부부는 사이좋게 핫도그를 나눠 먹었다
두 손을 꼭 잡고 장을 보던 노부부는 사이좋게 핫도그를 나눠 먹었다

빛과 허기에 잠을 깬 다음날 아침. 전날보다 몇 결은 개운해진 몸으로 어렵지 않게 짐을 꾸렸다. 또 한 번 코부르크 광장을 지나 역으로 향하는 길. 1.5유로짜리 핫도그 하나를 손에 쥐었다. 짐을 풀고 장을 보고 핫도그를 먹고 잠을 자고 짐을 싸고 핫도그를 먹은 것. 그러니까 코부르크에선 그게 전부다. 그런데 그 사소한 장면들이 살면서 꽤 주기적으로 떠오르는 뇌의 레퍼토리가 되어 버린 거다. 인생 어떤 역경에도 맞서 싸울 수 있을 것만 같은 뭐 그런, 나름 비장한 마음들이 소시지 육즙과 함께 샘솟던 순간. 뒤이어 내 의식은 거의 반자동적으로 한곳으로 흐르는데, 그곳엔 늘 두 손을 꼭 잡고 장을 보던 백발의 노부부가 서 있다. 


요즘 들어 부쩍 코부르크가 생각이 난다. 무언가에 또 시큰둥해진 모양이다. 

입호펜의 한 와이너리. 이윽고 리슬링이 잔에 채워졌다
입호펜의 한 와이너리. 이윽고 리슬링이 잔에 채워졌다

●독일 술상의 근거 


환기가 필요해서. 퇴근 후 동네 와인 숍에 들렀다. 날씨로 본다면 레드겠지만 기분은 가볍고 상큼한 게 당긴다. 모처럼 화이트와인 코너를 기웃거렸다. 소비뇽 블랑, 샤도네이…. 보편적인 품종들 사이에 확실한 해답이 숨어 있었다. ‘Riesling, Germany’. 

싱그러운 포도밭 풍경
싱그러운 포도밭 풍경

잔에 와인이 담기고 나는 금세 초록한 언덕 위에 있다. 한 모금 입에 머금자마자 등 뒤로 포도밭이 펼쳐지는 <신의 물방울>의 드라마틱한 설정까지는 아니지만, 와인이 내게 마법을 부린 것만은 분명하다. 입호펜(Iphofen)이라는, 지명도 생소한 독일의 어느 소도시에서였다. 포도밭이 내다보이는 와이너리의 테이블에서 리슬링이란 품종을 난생 처음 맛봤다. 때는 초가을. 지대가 높아서인지 낮술에도 취하지 않았다(그렇게 기억한다). 꽃, 사과, 복숭아, 시트러스 등등 온갖 향긋한 단어가 쏟아지는 와중에 호기롭게 내뱉지 못했다만 내 혀는 약간의 기름 향을 감지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어릴 적 타고 다니던 유치원 버스의 엉덩이에서 나던 냄새. 어쩐지 싫지 않던 그 냄새가 20년의 세월을 넘어 음주의 근거가 될 줄이야. 나중에야 안 사실이지만, 잘 숙성된 독일 리슬링에서는 석유와 같은 향이 나기도 한다. 

독일 바이에른주의 소도시, 입호펜의 골목길
독일 바이에른주의 소도시, 입호펜의 골목길

딱 반 병만 비우자던 것을. 지난 여행을 곱씹느라 어쩔 수 없었다는 핑계로 한 병을 다 비우고야 말았다. 확진자가 와락 쏟아지는 요즘 같은 때면 이런 상상을 한다. 여행과 회상의 사전적 정의가 점점 비등비등해지는. 여행이라는 단어는 이제 행성간의 이동에서나 통할 법한. 고기엔 레드, 해산물엔 화이트가 대수냐. 어차피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세상에서 마리아주는 제 멋대로다. 테이블에는 독일 소시지와 리슬링이 나란히 올랐다. 

 

글·사진 김예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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