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홍콩의 낮과 밤

  • Editor. 곽서희 기자
  • 입력 2021.07.01 07:36
  • 수정 2021.07.06 09:4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양념이 좋아, 후라이드가 좋아?’ 
이후 최대의 난제, 홍콩의 낮 vs 밤.
뻔한 답이지만 어쩔 수 없다. 둘 다 좋은걸.

●Midday in Hong Kong
한낮을 보내는 방법  


꾸무적꾸무적 일어나 어슬렁어슬렁 산책하기.
두 가지만 제대로 지킨다면, 
홍콩에서 최고의 낮을 보낼 수 있다.

 

"완탕면 한 그릇과 한낮의 산책. 
걸을수록 홍콩과 가까워졌다. 
열렬한 햇빛은 늘 함께였다.”

 

겹겹의 낮


홍콩의 낮을 떠올리면 팝업창처럼 튀어나오는 몇 장면들이 있다. 
홍콩에선 아침마다 완탕면을 먹었다. 소고기 완자 반, 새우 완자 반. 첫 끼에 둘 다 넣는 건 역시 무리지 싶었는데, 식욕이 이성을 이겼다. 묵직한 조식, 그득한 배. 걸으려면 넉넉히 먹어 둬야 한다. 그리곤 산책을 했다. 말이 좋아 산책이지, 사실 정처 없이 홍콩 시내를 어슬렁거린 거나 다름없다.

내 굼뜬 걸음과 달리 소호 거리는 늘 바빴다. 빙빙 굴러가는 미드레벨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층수가 몇 개나 되는지 가늠조차 안 되는 빌딩 사이를 누볐다. 손끝으로 툭 치면 와르르 무너져 내릴 것만 같은 건물들도 지났다. 디지털 카메라 대신 오래된 필름 카메라로 찍어야 제맛이 날 것 같은 풍경. 낯설고 신선했다. 반면 페인트도 채 안 마른 새 건물들은 신사동 가로수길 어딘가에서 본 듯 익숙했고. 홍콩에선 낡은 것이 새로운 것이고, 새로운 것이 낡은 것이다. 홍콩을 알고 싶다면 걸어야 한다. 걸을수록 홍콩과 가까워진다. 완차이(Wan Chai) 지역에선 의도적으로 길을 잃었다. 그러는 동안 꽤 많은 양의 땀을 흘렸는데, 아주 세세하고 구체적이었던 더위는 지금에 와서야 다 흐릿해지고, 다만 흥분으로 뜨겁게 달아오르던 두 볼의 느낌만 어렴풋하게 남아 있다. 

햇빛에 눈이 부셔 따끔따끔해지면 정오가 됐다는 뜻이었다. 그럴 때면 익청빌딩에 갔다. 영화 <트랜스포머>의 촬영지여서도, 사진 애호가들의 필수 코스여서도 아니었다. 그저 편안해서다. 네모나게 뚫린 공간 한가운데에 서 있으면 ㄷ자 모양의 아파트가 나를 둘러쌌다. 냄새는 좀 구려도, 포근했다. 그 안으로 부드럽게 흘러드는 오후의 햇빛은 내 안의 무언가를 가만히 녹여 주는 것 같았다. 또 어느 날은 보통의 여행자답게 SNS용 명소를 일부러 멀리까지 찾아갔다. 그리고 보통의 여행자답게 사진과 다른 현실의 모습에 실망했다. 그래도 좋았다. 여행이란 그런 거니까. 크고 작은 실망마저도 낭만이란 껍데기에 쌓여 너그럽게 덮어지는 것. 분명한 건 홍콩에서 걸었던 모든 산책길에 후회는 없었단 사실이다. 

그리고 지금 서울, 지하철 3호선 신사역 출근길. 대화행 열차를 기다리는데 어느 한갓진 홍콩의 아침이 팝업창처럼 툭 튀어나온다. 나는 또 침사추이의 한 완탕면 가게에서 에그 누들을 씹고 있다. 맛이 있는 것도 같고 없는 것도 같고. 사실 잘 모르겠다. 누들을 씹고 있지만 마음은 온통 홍콩의 습기 찬 공기에, 노포의 레몬색 대리석 바닥에, 햇볕에 꾸덕꾸덕 말라 가던 생선에, 웃통을 훌렁 깐 아저씨의 뱃살에 둥둥 떠다니고 있다. 돌아보면 내가 씹었던 건 공기와, 바닥과, 생선과, 뱃살뿐인 셈이다. 씹고 또 씹어 물러지고 부스러져 소화가 다 됐는데도 자꾸만 되새김질에 곱씹기를 반복한다. 그 겹겹의 여름들을. 


너무 씹어 단물이 다 빠진 낮들을 위해, 나는 뱉어 버리면 더 애틋해질까 봐 아껴 둔 그 말을 오늘 꺼내야겠다. 아, 그립다. 홍콩의 낮.

●Midnight in Hong Kong
게 튀김과 맥주, 택시 드라이버  


홍콩의 밤을 표현할 땐 이 세 단어로 충분하다. 

"밤이라고 열기가 식을 거라 기대한 건, 
홍콩에 대한 예의가 아니었다.”

 

붉고 진한 밤


무더운 여름, 홍콩의 밤은 대체로 이렇게 흘러갔다. 택시를 탄다→쇼핑을 한다→골목을 걷는다→술을 마신다→늘어지게 잔다. 이런 패턴을 반복하느라 도무지 뉴스며 SNS 따위가 파고들 여지가 없었다. 홍콩은 정말 굉장한 도시다. 나는 그 굉장한 도시에서, 매일 밤 터무니없이 많은 돈을 썼다. 

밤은 낮만큼 바빴다. 낮엔 정신없이 걸었다면, 밤엔 먹느라 정신이 없었다. 제일 자주 들락거렸던 곳은 삼수이포의 한 야외 포장마차. 어찌된 일인지 홍콩에선 파리가 많은 곳일수록 음식이 맛있다. 골목의 식당들 중 사람도, 파리도 제일 많은 곳을 골라 앉았다. 배를 긁다 웍을 돌리고, 웍을 돌리다 땀을 닦는 아저씨들의 불 쇼가 한창이다. 기름 묻은 메뉴판이 올라온다. 테이블보는 얇은 비닐 한 장이 끝. 모든 동작에 겉멋이 없다. 무심한데 정겹고, 정겨운데 무심하다. 나는 노포의 그런 존재 방식을 사랑한다.

주문을 넣으니 불이 켜진다. 센 화력에 웍이 춤춘다. 혀가 얼얼할 정도로 짠 게 튀김과 청경채 볶음 그리고 맛조개 볶음이 차례로 나왔다. 모든 요리는 조리 과정에서 홍고추와 마늘을 실수로 왕창 쏟아 버린 게 분명했다. 그런데 좋다. 짜고 맵고 신 홍콩의 맛. 하여튼 기름에 볶으면 다 맛있다. 에어컨 하나 없는 끈적한 야외 테이블에서 맥주는 먹었고 안주는 마셨다. 홍콩의 여름밤은 먹고 마시는 데 구분이 없다. 먹을 건 마시게 되고, 마실 건 와구와구 먹게 된다. 맥주가 이렇게 맛있을 수 있다는 걸, 나는 그날 태어나서 처음으로 깨달았다. 

노포는 너무 시끄러워서 말소리가 밖으로 멀리멀리 밀려나가는 듯했다. 그 속에 나는 부드럽게 섞여 들어가 먹고 웃고 마셨다. 여행자는 더 이상 이 더운 도시의 돌출적인 존재가 아니었다. 맥주로 목을 축일 때마다 천천히 밤에 젖어들었다. 그러다 잊을 만할 때쯤 사방에서 풍겨 오는 향신료 향이 말해 주었다. 넌 지금 홍콩에 와 있는 거라고, 알아?

안 그래도 후끈한 밤은 맥주가 들어가면 더 뜨거워진다. 이럴 땐 걷기보다 달리고 싶다. 빨간 택시를 부른다. 빠르고 시원하게 달리는 덴 택시만 한 게 없으니까. 이런 이유도 있다. 게 튀김을 먹으면 맥주가 따라오고, 한창 취하면 지하철 따위를 타고 싶은 마음일랑 싹 사라지니 택시를 타야 한다. 그러니까 결국 택시 드라이버, 맥주, 게 튀김 순서가 아니라 게 튀김, 맥주, 택시 드라이버 순이어야 맞다. 

그해 여름밤은 대체로 붉고 진한 기억뿐이다. 빨간 택시의 창문엔 빨간 2층 트램과 빨간 네온사인 간판이 담겼다 사라졌다. 빨간 양념이 묻은 입을 닦고 옷소매에 배인 홍고추의 향을 맡았다. 택시는 더 빠르게 달렸다. 그럴수록 나는 웍의 밑바닥에 아주 눌어붙은 감자볶음들처럼, 영영 이 도시의 밤에 눌러앉고 싶단 생각을 했다. 짭짤하고 눅눅하고, 무엇보다 이렇게 뜨끈한 날들이 계속되길 바라면서. 


글·사진 곽서희 기자  

저작권자 © 트래비 매거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최신기사
트래비 레터 요즘 여행을 알아서 쏙쏙
구독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