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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고수의 ‘여스플레인’을 거부하다

  • Editor. 이우석
  • 입력 2021.08.01 11:45
  • 댓글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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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에 박힌 패키지 여행 따윈 얘기하지 말라고?. 너도 결국 멋진 풍경 찾아 더 근사한 사진 스킬로 판에 박힌 포스트 만들고 그럴 거잖아?
판에 박힌 패키지 여행 따윈 얘기하지 말라고?. 너도 결국 멋진 풍경 찾아 더 근사한 사진 스킬로 판에 박힌 포스트 만들고 그럴 거잖아?

‘여행이란 반드시 이래야 한다’고 
모세의 십계에 필적하는 율법처럼 강요하는 너.  
너의 차디찬 웃음을 또 보고 싶진 않아. 

 

●여행을 모독하지 말라고?


오, 그는 과연 우월했다. 낡은 여권에 아로새긴 수많은 낯선 비자 도장과 무수한 각국의 출입국 기록, 국내 방방곡곡에 대한 글과 사진 포스팅 그리고 인터넷과 모바일 어디서나 발견할 수 있는 그의 흔적들. 특히 SNS(사회관계망)에서 여행업계와 세상을 호령하는 그의 어록들을 발견할 수 있어, 마치 랜선을 끌어당기자면 그 끄트머리에는 배낭을 멘 그가 딸려 올 듯하다. 다만 그의 ‘대단한 여행’에 대한 내 개인적 소견은 박제가 된 트리케라톱스의 위용처럼 경이로울 뿐이지, 우리 집 말티즈처럼 뭔가 살아 있다고는 느껴지진 않는다. 일을 삼아 여행을 하다 보니 주변에 여행 전문가를 종종 만나게 되는데 그중 쉰을 갓 넘긴 중늙은이 여행가(이런 직업이 있긴 한가?)의 이야기다. 


그는 ‘프로여행러’다. 자칭이 아니라 실제로도 그는 (평판은 모르겠으나) 경력과 지명도에서 우등했다. 꽤 오랜 시간 언론사에 근무한 저널리스트 출신에다 마치 윤회로 삼계육도를 오가며 줄곧 여행만을 위해 살아온 이처럼 말과 행동을 하니 아무도 감히 그에게 반문하려 들지 않는다. 우암 선생 이상의 원론주의적 다그침과 디디에 드로그바의 자유자재 드리블 같은 그의 수려한 말솜씨. 그리고 그가 스스로 켜켜이 쌓아 올린 난지도 하늘공원 속 같은 업적을 바탕으로 사람들을 꾸짖는데 스스럼이 없다. 


“그딴 건 여행이 아니야! 그냥 놀이라고, 여행을 모독하지 마라!” 

 

낮지만 꽤 큰 목소리였다. 그는 누군가를 힐난하는 말을 뱉은 후 금세 메기처럼 단호한 입 모양새를 지켰다. 언제였나. 몇 명이든 몇 시까지든 모일 수 있어 호사스럽던 시절, 한 술자리에서의 일이었다. 다행히 나를 지목한 말은 아니었지만, 그 일갈이 터진 상황과 내용이 너무도 실망스러웠던 나머지 난 앞에 놓인 술을 잔뜩 마셨다(여기에 토를 달지 말기). 


본의 아니게 그를 ‘모독’하게 된 그 여성은 난처한 상황에 어찌할 바를 모르는 듯했다. “부다페스트요? 나도 갔다왔는데”라며 자신이 떠났던 헝가리 패키지여행을 즐겁게 얘기했을 뿐인데, 갑자기 싸늘히 바뀐 분위기가 시련처럼 다가왔을 게다. 세뱃돈을 잃어버린 초등학생처럼 가엾게도 안색이 ‘카르보나라 화이트’에 가깝다가 순식간에 ‘개불 핑크’로 변해 버렸다. 그녀는 이내 브뤼셀의 오줌싸개 소년상(Manneken Pis)처럼 시선을 아래로 떨구고 말았다. 

일출, 일몰 보기만 있는 줄 알았지? 핀란드 ‘해가 지지 않는 것 보기’ 체험. 전문가들이 만든 패키지여행을 따라다니면 별 신경 쓰지 않고도 꽤 쏠쏠한 체험을 할 수 있다
일출, 일몰 보기만 있는 줄 알았지? 핀란드 ‘해가 지지 않는 것 보기’ 체험. 전문가들이 만든 패키지여행을 따라다니면 별 신경 쓰지 않고도 꽤 쏠쏠한 체험을 할 수 있다

들어 보니 ‘프로여행러’가 화가 난 이유는 이러하다. 그는 왜 여행을 그냥 레저로만 생각하냐고 운을 뗀 후 진정성 있게 자유로이 여행지를 탐구하고 그 안에 녹아들지 않았다면 차라리 가지 않는 게 낫다고 말했다(흠…). 그리고 미리 고민하고 출발하고 도착해서는 여행지와 교감하며 많은 것을 기록하지 않는다면 그건 여행이 아니고 그냥 놀이라고 했다(여행작가나 기자 빼곤 다 그렇게 해, 이 사람아). 또한 짧은 일정 속 여러 나라를 다니는 패키지 상품을 구입해 스쳐 지나듯 다닌 게 자랑이냐는 등 패키지여행에 대한 업신여김도 분명히 드러냈다. 뭐 ‘동유럽 완전파괴 8개국 10박 11일 상품’, ‘중남미 정복 8개국 15박 16일’ 같은 패키지 여행상품을 구입한 것이 ‘프로’의 눈에는 그토록 거슬리는 대목이었을까. 물론 그 여행은 파죽지세로 스케줄이 진행되겠지만 히틀러나 스페인 정복군처럼 정말 파괴나 정복을 한 것은 아니었을 테니 화를 낼 일은 아니었다.


뭔가 말을 하려다 ‘혹시나’ 싶어서 잠깐 멈췄다. 패키지 비용의 일부를 그가 보태 준 것은 아닐까? 그게 아니라면 저렇게 뭐라 할 계제가 아니잖아. 하지만 내가 알고 있던 프로여행러의 최근 자산 사정과 저 둘의 관계를 생각해 보니 그건 분명히 아니었다고 판단했다. 나는 당장 끼어들어 그에게 반문했다. 


“모든 사람이 네 말처럼(여행작가처럼) 여행하면 넌 이제 뭐 먹고 살 작정이냐?”

체코엔 ‘프라하의 연인’뿐 아니라 프라하의 관광객도 많다
체코엔 ‘프라하의 연인’뿐 아니라 프라하의 관광객도 많다

 

●오지랖 펄럭이는 ‘여스플레인’ 


사람들과 난 술을 더 마셨고 그는 집에 가 버렸다. 평소 그가 좋아하던 계란말이도 나왔는데. 지난 여행지에서 교감한 내용으로 마감하러 갔겠지 뭐. 냉면을 먹으며 반드시 이렇게 먹어야 한다는 구질구질하면서도 단호한 규범을 타인에게 강요하는 것을 ‘면스플레인(麵+explain)’이라고 한다며? 


‘여스플레이너(旅+explainer)’도 존재하고 있다. 뚜렷한 주관을 지닌 여스플레이너들이 왕성히 활동하고 있다. 여행이란 반드시 이래야 한다고 규화보전 같은 비급으로 설명하는 것도 모자라, 모세의 십계에 필적하는 율법처럼 지켜야 한다고 강요한다. 누가 그들에게 율령 반포의 선지자적 권한을 줬을까. 여스플레이너의 공통된 조언(혹은 설법) 중 하나는 “여행의 즐거움은 미리 계획되지 않았을 때 있다”라는 것이다. 그래서 일정이 정확히 짜인 여행을 폄하한다. 첫날 몇 시부터 어딜 가서 무엇을 보고 어떤 것을 먹고 어디로 이동하는 여행사 패키지 상품에 대해 강한 거부감을 표한다. 특히 단기 일정에 여러 곳을 다니는 것에 대해 거품을 문다. 스쳐 지나듯 훑어보려고 거기까지 왜 갔냐, 입국 도장 찍으러 갔냐는 둥, “당신의 여행은 틀렸다”라고 말한다. 사실 따지고 보면 그들만 모르고 있을 뿐, ‘무계획의 즐거움’, ‘자유로운 여행의 행복’이란 그 이론조차 이미 그렇게 짜인 틀이다. 스스로 그렇게 정해 놓고 자신도 교조적으로 따르고, 남들에게 이를 지키라는 것이다.


여행은 누구에게나 공평한 권리이지만 사실 현실과 조건은 불평등하다. 학생이든 회사원이든 언제든 자유롭게 떠나고 일정을 조율할 수 있는 사람은 드물다. 어린 자녀를 대동해야 하거나 부모님 등 어르신과 함께 여행해야 하는 경우도 많다. 일정과 비용상 매년 여행을 떠날 수 없는 때도 있고, 벼르고 별러서 특별한 기회에 여러 곳을 다니고 싶은 욕구도 있다. 가까운 친구 중에도 그런 경우가 많다. 그는 단 며칠이라도 여행을 떠나려면 미리 많은 일을 해 놓아야 한다(그래서 그는 여행 기간 중 밤낮없이 내게 많은 것을 물어본다. 이게 다 빌어먹을 IT 기술 탓이다). 

크로아티아 두브로브니크 구도심 포탑을 오르는 여행객들. 패키지를 이용하면 버스 타고 올라간다. 메롱
크로아티아 두브로브니크 구도심 포탑을 오르는 여행객들. 패키지를 이용하면 버스 타고 올라간다. 메롱

여행 일정에 대해 고민할 여유가 없는데 진정성 따위의 설교라니 당치도 않다. 이럴 땐 전문 여행에이전시의 여행상품이 더없이 편리하고 저렴하다. 해외든 국내든 잘 차려진 식탁에 수저만 들면 되니까. 여행상품을 주로 구입해서 다닌 이에게 당신은 가짜 여행을 다닌 것이며 이제부터 진짜 여행을 알려 주겠다는 등 오지랖 펄럭이는 여스플레인은 쓸모없기 짝이 없다. “너는 왜 매년 메주를 담지 않니? 간장을 직접 담으면 좋잖아?”와도 꽤 비슷한 말이다.


어쨌든 빼곡하게 차 있지만 그나마 정확한 여행 스케줄보다, 아무 대책 없이 ‘일해라 절해라’가 더 듣기 싫은 법이다. 차라리 그토록 화려한 경험이라면 여행의 동기를 부여하고 감성에 어필하는 것이 좀 더 유익해 보인다. 아직 여행업계에 소믈리에 자격은 없지만.


나는 여행자의 카스트 화(化)를 경계한다. 여행에서의 모든 차별에 대해 거부한다. 브라만(婆羅門)이라 자칭하는 그 어떤 이의 ‘여행업적’이 찬란할지라도, 다른 크샤트리아나 바이샤의 여행에 견줘 감히 ‘우위’라 주장할 순 없다. 언제까지 자랑질하러 여행 다닐 거냐, 이 사람들아. “직립인간은 누구나 마음대로 여행할 수 있다고!” 

 

*이우석의 놀고먹기
‘저세상’ 유머 코드와 황당한 상황극에 있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이우석 소장은 오랜 신문사 기자 생활을 마치고 ‘이우석놀고먹기연구소’를 열었다. 신나게 연구 중이다. 인스타그램: playeatlab


글·사진 이우석  에디터 천소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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