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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성, 공룡과 ‘발’ 맞춰 걸은 날

  • Editor. 곽서희 기자
  • 입력 2021.08.30 09:55
  • 수정 2022.05.24 09:3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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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이 겹겹이 쌓인 상족암
세월이 겹겹이 쌓인 상족암

그들은 있지만 없고, 없지만 늘 있다. 
흔적으로 존재하는 공룡들과 발맞춰 걷는 여행법,  
고성 해양치유길 산책하기. 

 

●앞발이 생겼다 


아침 9시, 상족암 유람선 선착장. 걷기여행을 앞둔 몸이 물 먹은 듯 무겁다. 매일 밤 야식을 꼬박꼬박 챙겨 먹은 탓인가. 두 다리가 견뎌야 할 하중도 그새 는 모양이다. 아무리 고성 해양치유길의 자연인 로드가 아이들에게조차 난이도 ‘하’의 코스라지만, 프로야식러에겐 동네 뒷산도 한라산 급이다. 의지할 곳이 필요했던 차, 참가자들에게 등산 배낭과 함께 인당 두 개의 스틱(워킹폴)이 주어졌다. 자연인 로드의 핵심, 노르딕 워킹을 위해서다. 

남파랑길 33코스는 바다를 곁에 두고 걷는 길이다
남파랑길 33코스는 바다를 곁에 두고 걷는 길이다

자연인 로드에서 노르딕 워킹은 ‘석기인 걷기’, ‘4족보행’과 동의어다. 양손에 스틱을 쥐고 땅을 밀어 내듯 걷는 방식인데, 이 스틱이 보기보다 앞발 역할을 톡톡히 한다. 스틱으로 지면을 압박해 걸으면 마치 네 발로 걷는 것처럼 몸무게가 고루 분산된다. 허리와 무릎에 가해지는 충격이 덜하니 허리디스크 재활 치료에도 효과적이다. 직립보행이 버거운 저질체력인들은 물론 실버층들도 스틱의 도움을 약간만 받으면 가파른 언덕길도 가뿐하다. 그렇다고 운동이 안 될 거라 생각하면 오산이다. 상체 근육을 발달시켜 일반 걷기에 비해 에너지 소비를 30%나 높인다. 안전하되 건강하게 걷기. 그건 해양치유길 걷기여행의 궁극적인 목표이기도 했다. 

허리와 무릎이 편하다, 노르딕 워킹
허리와 무릎이 편하다, 노르딕 워킹

정확한 자세를 위해 스틱의 길이를 키에 맞게 조절했다. 손잡이의 위치는 배꼽 높이에 맞췄다. 간식이 든 배낭과 든든한 앞발, 참가자들의 건강 상태를 수시로 확인하는 주 강사, 보조강사, 안전강사들까지 동행하니 등에 어벤져스라도 업은 기분이다. 그래도 체력은 역시 히어로가 아니니, 홍삼 한 포 털어 넣고 준비운동을 마쳤다.

생긴 게 꼭 시루떡 같은 상족암의 지층
생긴 게 꼭 시루떡 같은 상족암의 지층

●유레카, 1억 년의 세월


물 젖은 솜 같던 몸은 앞발이 생기니 솜털 같아졌다. 네 발로 성큼성큼 딛는 걸음에 부침이 없다. 선착장에서 출발한 지 20분째. 숲길 몇 번 오르락내리락하니 금세 상족암(床足巖)이다. 밥상다리 모양의 수성암 덩어리엔 중생대부터 무려 1억 년간 쌓인 100m 높이의 퇴적암이 겹겹이 지층을 이루고 있다. 이른 아침인데도 여기저기서 셔터음이 터지는 건 최근 상족암 동굴이 SNS 인생숏 성지로 빵 뜬 것도 한몫 하지만, 무엇보다 ‘유레카’의 장소여서다. 

스틱을 활용해 상족암으로 내려가는 자연인 로드 참가자들
스틱을 활용해 상족암으로 내려가는 자연인 로드 참가자들

1982년, 경북대학교 양승영 교수팀은 남해안 지질조사를 하던 중 이곳 상족암 부근에서 너비 24cm, 길이 32cm의 물웅덩이 250여 개를 발견했다. 움푹 파인 구덩이에 물이 고여 있는 게 영락없는 물웅덩이의 모습이었건만, 정체는 다름 아닌 공룡 발자국이었다. 고인 건 물이 아닌, 1억2,000만 년의 세월이었던 것. 70cm 내외 간격으로 일정하게 찍힌 발자국을 통해 상족암 일대가 중생대 백악기 공룡들의 집단 서식지였다는 사실도 1억 년 만에 수면 위로 떠올랐다.

밀물과 썰물의 타이밍, 상족암 동굴
밀물과 썰물의 타이밍, 상족암 동굴

그렇게 우리나라 최초로 공룡 발자국이 발견된 이후 본격적인 조사가 시작됐고, 제전마을에서 실바위까지 해안선을 따라 약 6km에 걸쳐 공룡 발자국이 추가로 발견됐다. 그것도 목 긴 초식공룡 용각류의 것부터 두 발 또는 네 발로 걷는 조각류, 육식공룡 수각류의 것까지 무려 약 2,000여 개가, 무더기로. 1970년대부터 국내에서 공룡 화석이 발견되기 시작했다고는 하지만, 땅의 규모가 작으니 다른 나라에 비해 화석 발굴량도 적을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발자국이나 배설물 등이 남아 있는 생흔(生痕) 화석에는 생물의 몸 자체가 남아 있는 실체(實體) 화석 못지 않게 공룡의 생태와 당대의 지질환경 등에 대한 중요한 단서가 담겨 있다. 그러니 고성에서 발자국 화석이 대거 발견된 건, 정말이지 유레카 중의 유레카였다. 1억 년간 깊이 묻혀 있던 보물 상자를 한순간에 열어 버린 셈. 고성군이 미국의 콜로라도, 아르헨티나의 파타고니아와 함께 ‘세계 3대 공룡 발자국 화석지’의 타이틀을 달게 된 것도 그 즈음의 일이다.

공룡들이 한꺼번에 퇴적층을 마구 뛰어다녀 생긴 공란구조
공룡들이 한꺼번에 퇴적층을 마구 뛰어다녀 생긴 공란구조
며칠 전 찍힌 듯한 1억 년 전 공룡 발자국
며칠 전 찍힌 듯한 1억 년 전 공룡 발자국

●타이밍의 문제 


이제부턴 타이밍의 문제였다. 타이밍은 때론 너무 무자비하다. 살짝만 어긋나도 여행이 바뀌고 추억이 변한다. 거창하게 얘기했지만, 상족암 동굴에 들어설 때는 물때를 잘 맞춰야 한다는 얘기다. 상족암의 크고 작은 동굴들은 지층이 파도에 의해 침식되어 생긴 해식동굴로, 밀물 때가 되면 여지없이 바닷물에 퐁당 잠기고 만다. 썰물 때여도 물이 완전히 빠지지 않으면 파도와 몇 번의 밀당을 거듭해야 겨우 들어갈 수 있다. 까다롭지만, 대가가 달콤하다. 하늘과 바다와 동굴과 나. 일단 입성만 하면 어떻게 찍어도 인생숏이다. 


상족암은 시작일 뿐, 갈 길이 멀다. 다시 스틱을 잡고 출발. 상족암에서 바다 쪽으로 내려오자 해안가를 따라 나무 데크길이 딱 바다만큼 널리 뻗어 있다. 일명 ‘공룡둘레길’로 불리는 남파랑길 33코스다. 하이면사무소에서부터 고성공룡박물관, 상족암, 맥전포항을 지나 임포항까지 곡선으로 잇는다. 바다와 숲, 해변은 빈번히, 가끔 항구. 갖가지 풍경을 고루 즐길 수 있어 곡선을 타는 일이 울렁울렁 즐겁다. 


해안가 곳곳엔 다양한 형태의 공룡 발자국들이 야금야금 숨어 있다. 퇴적층에 찍힌 발자국을 보려면 역시 타이밍의 도움이 필요하다. 바닷물이 쭉 빠지면 서서히 크고 작은 발자국들의 모습이 드러난다. 걷지도 뛰지도 않은 트롯팅(속보)의 형태를 띤 발자국부터 골반까지의 높이가 60cm도 안 될 것으로 추정되는 새끼 공룡의 것까지. 마치 그저께 시멘트가 다 마르기도 전에 누군가 공사 바닥 표면을 짓궂게 밟고 지나간 것처럼 생생하다. 모두 자연의 시간이 허락하는 한에서만 볼 수 있는 소중한 흔적들이다. 

고요함이 사방으로 흐르는 비움명상 ©고성군
고요함이 사방으로 흐르는 비움명상 ©고성군

파도가 더 잔잔해지자 ‘비움명상’이 시작됐다. 자연인 로드의 일정엔 고요한 바다와 숲에서 강사의 지도에 따라 마음을 다스리는 2번의 명상 체험이 포함돼 있다. 발자국 옆, 돗자리를 폈다. 자연의 소리가 흐른다. 반가부좌로 앉아 안대를 쓴다. 눈은 닫고 귀는 열고, 모두들 내면 깊숙한 곳으로 침잠하는 중이다. 얼른 집중해야 할 텐데, 생각이 자꾸만 다른 곳으로 향한다. 머릿속에선 구부러진 발톱을 가진 공룡 떼가 쿵쿵 하며 몽돌해변을 지나 저 멀리 어딘가로 향하고 있다. 마음이 그들을 따라간다. 비워야 할 마음이 그들로 가득 찬다.

자박자박, 맨발 해변 걷기 체험 ©고성군
자박자박, 맨발 해변 걷기 체험 ©고성군

이왕 비우지 못한 거, 마음과 함께 배도 채웠다. 고구마, 오이, 당근, 두부, 해초. 온갖 신선하고 건강한 것들이 담긴 ‘자연인 생식 도시락’은 의외로(?) 맛이 좋다. 오랜 야식으로 단련된 몸이 단번에 건강해지기란 멸종된 공룡이 부활할 확률과 맞먹겠지만, 배가 가벼워지는 느낌은 단순히 기분 탓만은 아닐 테다. 아무렴 좋다. 간식, 점심식사 그리고 이 모든 체험을 커피 한 잔의 가격에 누릴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만족도는 최고치다. 양껏 먹고 나니, 또 발자국이다. 이젠 내가 남길 차례다. 너도나도 훌렁 양말을 벗어던지고 파도에게 맨발을 내어 준다. 모래 위를 걸으면 발이 받는 저항이 높아져 에너지 소비량이 많아지고, 미네랄이 풍부한 해수는 독소 제거에도 도움이 된다고. 걷고, 명상하고, 맨발로 산책하고. 자연인 로드의 키워드는 시작부터 끝까지 ‘건강’이다.

크고 작은 몽돌로 소원을 쌓은 사람들
크고 작은 몽돌로 소원을 쌓은 사람들

모래 위 발자국을 찍는다. 다만 내 것은 금세 파도가 핥고 간다. 살아 있는 것들이 흔적을 남기려면 기막힌 타이밍과 약간의 기적이 필요하다. 공룡 발자국만 해도 그렇다. 현재를 사는 우리에게까지 닿기 위해서는 수많은 조건이 갖춰져야 한다. 발자국이 찐득하게 잘 찍힐 수 있도록 표면은 약간의 수분을 머금은 퇴적지여야 하고(상족암 일대는 백악기에 호숫가 늪지대였다), 발자국 위로 각종 퇴적물이 쌓여야 하고, 퇴적물이 쌓인 지층이 풍화나 침식 작용으로 인해 깨끗하게 침식되어야 한다.* 그런데 모양을 유지할 수 있는 완벽한 주변환경이 조성됐다 하더라도, 갑자기 비가 내리거나 수위가 상승해 요동치는 물속에 잠기게 되면 발자국은 지워지고 만다. 그러니까, 그 어떠한 갑작스런 환경의 변화도 없어야만 흔적은 흔적으로 남아 있을 수 있는 것이다. 흔적은 결국, 완벽한 타이밍의 결과다. 

자연인 로드는 배낭 속마저 알차다
자연인 로드는 배낭 속마저 알차다

어느덧 마지막 일정. 병풍바위 전망대엔 소원을 적은 종이를 걸 수 있는 행복나무가 서 있다. 남아 있는 것들이 남아 있을 수 있기를. 나무에 매단 소원에 대한 약간의 스포다. 고성읍으로 돌아가는 버스에 발을 싣는 순간, 조금씩 흐려지던 하늘이 이내 후두둑 빗방울을 떨군다. 간발의 차로 우중산책을 면했다. 타이밍은 때론 자비롭다. 살짝만 맞아 떨어져도 여행이 바뀌고 추억이 변한다. 역시, 모든 건 타이밍의 문제다.  

*고성군 온라인 사이트 ‘공룡나라고성 사이버 공룡 테마파크’ 내용 참고.

●5년 만에 돌아온 공룡엑스포
당항포관광지


올 가을, 고성의 공룡들이 부활한다. 당항포관광지에 공룡 울음소리가 울려퍼진다.

©고성군

2016년 이후 5년 만이다. 드디어, 경남고성공룡세계엑스포가 돌아온다. 코로나로 두 차례 연기한 끝에 열리는 엑스포라 더욱 반갑다. 9월17일부터 11월7일까지 주행사장인 당항포관광지와 특별행사장 상족암군립공원에서 개최되는데, 특히 당항포관광지에 생긴 변화가 크다. 공룡엑스포 메인 전시관인 당항포 주제관은 대대적인 리모델링을 마쳤다. AR·VR 등 최신 디스플레이 기술을 활용해 과거의 공룡을 현실 세계에서 생생히 볼 수 있는 체험공간을 마련했다.

‘한반도공룡발자국화석관’의 콘텐츠도 한층 업그레이드됐다. 공룡 연구가가 되어 직접 공룡 화석을 발굴하고, 발굴한 공룡을 최신 기술로 복원하는 체험을 해볼 수 있게 됐다. 그늘 쉼터, 피크닉 쉼터, 업 사이클 쉼터 등 새로 조성된 쉼터는 아이도 어른도 널리 품어 줄 예정. 공룡엑스포의 대표 간식 공룡 빵이 반죽 재료를 바꿔 더 쫀득해져서 돌아온다는 소식엔 꼬르륵, 배가 먼저 반응한다. 아, 이번 엑스포의 주제는 ‘사라진 공룡, 그들의 귀환’이다. 고성의 공룡은 멸종되지 않는다. 공룡엑스포가 열리는 한! 

주소: 경남 고성군 회화면 당항만로 1116
기간: 9월17일~11월7일 
운영시간: 공룡테마관광지 월~목·일요일 9:00~18:00, 금~토요일 9:00~22:00
요금: 성인 1만8,000원, 어린이 1만2,000원

▶고성 해양치유길

경상남도 고성군의 해안길을 따라 걸으면서 건강한 생활 습관을 실천할 수 있는 걷기여행 프로그램. 올해 1월에 문화체육관광부 지역특화 관광콘텐츠 공모사업에 선정됐다. 에너지 로드와 자연인 로드 총 2가지 코스로 나뉜다.


코스│①에너지 로드| 해지개다리 입구→해지개다리→남산공원→백세공원→대독누리길
②자연인 로드| 상족암 유람선 선착장→상족암 군립공원→공룡둘레길→맥전포항 공원
주행거리│5km 이내  
금액│1인 6,000원  
접수기간│8월16일부터 가을 시즌(9~11월) 접수 시작. 총 20회 진행 예정
예약방법│‘관광고성’ 홈페이지 내 걷기여행길 홍보 배너 창 클릭 후 웹 신청서 작성


글·사진 곽서희 기자 취재협조 고성군

*이 기사는 고성군의 지원을 받아 제작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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