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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여, 아무 걱정 말아요

  • Editor. 이우석
  • 입력 2021.09.01 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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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만, 여권을 가지고 나왔던가?
카메라는 챙겼던가? 
여행 중 지울 수 없는 걱정들. 

 

●노파심의 시작


할머니는 아니지만 노파심(老婆心)이라고 해야 할까, 여행 중엔 괜한 걱정이 많이 생긴다. 공항을 가기 위해 집 현관을 여는 순간부터 걱정은 시작된다. ‘컬링 스톤’이라도 든 게 분명한 캐리어를 질질 끌며 걸어가다 보면 별의별 생각이 들기 시작한다. ‘7400번 공항버스가 떠나 버린 것은 아닐까? 분명히 승리교회 앞에서 15분에 출발이라 그랬는데, 혹시 예전 시간표가 아니었을까?’ 네이버로 확인은 했지만, 걱정은 가시지 않는다.


기어코 버스 안에서 다시 가방을 열어 본다. 이 두껍고 번거로운 잠금장치는 대체 왜 한 것일까? 짐을 싸기 전 연신 확인했겠지만. ‘여권은 제대로 가져왔나? 구멍을 송송 뚫어버린 예전 여권을 가져오진 않았겠지? 충전기에 꽂아 놨던 배터리는 카메라에 다시 끼워왔겠지? 왠지 백팩이 가볍잖아, 이상한데?’ 오만 가지 생각이 든다. ‘그럼 그렇지. 모두 들었군!’ 지퍼를 다시 닫고 잠금장치를 채우고 나면 별안간 궁금증이 인다. ‘그런데 SD카드는 꽂혀 있었던가?’


공항에 도착하고 나서도 끊이지를 않는 걱정이 걱정이다. 계속 플라이트 현황 전광판을 바라본다. ‘오늘 아침 바람이 꽤 불던데 설마 비행기가 결항하지 않을까? 저번에도 솔릭(2018년 19호 태풍) 때문에 꼬박 하루를 날려 버렸는데, 오늘은 정시에 출발할 수 있겠지?’ 체크인 카운터 앞에서 줄을 서서도 한숨이 난다. ‘블레이저를 입고 올 것을 그랬나? 그럼 혹시라도 좌석을 업그레이드해 주지 않았을까? 아냐 매번 그런 일이 생기겠어? 지난번 체코 프라하에서 돌아올 때 체코항공이 업그레이드를 시켜 줬던걸. 그래 뭐 상위 클래스가 늘 좋은 것도 아니야. 밥도 너무 오래 먹고 귀찮기만 하지!’


●2만원, 하루견과


걱정과는 별개로, 아주 ‘잘’ 보딩을 끝냈고, 이제 계획은 2만원 정도를 내면 2시간을 앉을 수 있는 유료 라운지에 앉아 마감을 하는 것이었다. 사실 마감은 좀 남았지만, 오늘 쓰지 못하면 난 시애틀에서 정말 ‘잠 못 이루는 밤’을 보내야 한다. ‘손님이 편히 일할 자리는 아마 없을 것 같아요!’라고 말하고 싶은 표정을 한 프론트 직원의 안내를 받고 라운지 내부로 접어들었다.

늘 그렇듯 라운지는 꽉 차 있다
늘 그렇듯 라운지는 꽉 차 있다

난 콘센트가 있는 자리가 이미 채워지고 없을 것이라고 걱정했다. 예상은 틀렸다. 콘센트 자리는 고사하고 혼자 앉을 자리도 없었다. 전 국민이 당장 해외로 떠나라는 국가의 긴급 명령을 받았는지 라운지는 가득 차 있었다. 작은 랩톱을 놓고 글을 쓸 만한 빈자리 따위는 그곳에 없었다. 2인 테이블에서 1명이 산더미처럼 음식을 쌓아 두고 밥을 먹고 있거나, 역시 1명이 4인 테이블에서 수다를 떨고 있었다(전화로). 왜 혼자 온 사람들은 편안한 리클라이너를 그냥 비워 두는지, 이유를 알고 싶었다.

 

이미 바닥난 샐러드 볼을 박박 긁어 접시에 담고 커피를 한잔 마시며 주위를 살폈다. 분명 보딩 시간에 맞춰 일어서는 사람이 있으리라. 특히 전화로 자신이 강아지를 맡긴 애견호텔에 관한 불평 수다를 떨고 있던 4인석의 원피스 차림 아가씨에 집중했다. 얼핏 보니 그는 오전 11시50분에 출발하는 도쿄 나리타행 항공권을 가지고 있었다. 지금은 오전 11시에 가까워졌으니 조금만 있으면 분명 게이트로 걸어가야 한다. ‘곧 게이트로 걸어가며 단골 애견호텔의 낮은 할인율에 대한 이야기를 하겠지?’ 하는 막연한 기대를 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전화기를 뺨에 붙인 채 출발 타임 테이블을 흘긋 보더니, “뭐야! 지연출발이래!” 하고 수화기 너머 누군가에게 짜증을 냈다. 별수 없이 호주머니에 ‘하루견과’ 한 봉지를 챙겨 넣고 라운지를 나섰다. 2만원을 냈는데 아무것도 하지 못했던 것에 대한 보상심리였다.


다행히 난 흡연실에서 마감을 하면 되겠다는 멋진 생각을 해냈다. 들어가자마자 3줄 정도의 문장을 썼는데 마치 포연(砲煙) 자욱한 전장의 종군기자가 된 기분이 들어 잠시 우쭐해졌다. 하지만 그 자부심은 오래가지 않았다. 인도인 두 사람이 내 곁에 앉아 담배를 피우며 랩톱에 대해 자꾸 물어보는 바람에 글이 써지지 않았다. 힌디어 자판이라도 있었으면 좀 낫지 않았을까 했지만 별수 없이 랩톱을 접었다. 그리고 걱정을 시작했다. ‘비행기 옆자리엔 누가 앉을까? 덩치가 작았으면 좋겠어. 손톱이 자랄 정도로 오래 걸리는 여정인 데다가 창 쪽 자리니까!’ 

가장 걱정이 많았던 순간
가장 걱정이 많았던 순간

 

●걱정 그리고 걱정, 그리고 걱정


걱정과 함께 비행기에 올랐다. ‘어이쿠, 당신은 한국인이 맞나요? 여권은 녹색인데 체구는 왜 통가(Tonga) 사람을 닮나요? 크게 신경 쓰실 것 없어요. 그 거대한 팔뚝 뼈는 저의 팔걸이에 올리셔도 됩니다. 전 어깨를 최대한 접어서 유선형으로 만들면 되거든요!’ 푸념했다. 앞쪽 열에서, 아니 이 항공기 안에서 가장 튼튼한 사람과 나는 시애틀까지 비행해야 한다. 단전호흡을 통해 방광 용적을 늘리는 수가 최선이다. 
‘아, 왜 안 나오지?’ “저기요, 제 모니터가 작동되지 않는걸요. 터치스크린이 먹지 않아요!” “네 손님, 아직 보딩 중이라 그렇습니다. 잠자코 기내지나 읽든지 A350-900 기종에 대한 안내서를 외우고 계세요!” 이가 몹시도 하얀 승무원이 친절히 설명했다. 적어도 A350-900 기종에 대해선 항공대 교수만큼 알아 갈 때쯤 잠이 든 것 같다. ‘항공연결편’ 관계로 제시간에 비행기가 뜨지 않고, 출국장 밖으로 되돌아 나가는 꿈을 꾸었다. 하지만 다행히 꿈은 꿈이었다. 기장의 환영방송이 나올 무렵, 무사히 비행기가 떠오른 것을 확인하고 다시 잠을 청할 수 있었다. 물론 나의 팔걸이에는 내 옆에서 곤히 잠든 소의 다리가 놓여 있었다. 

더빙 영화가 6편이 전부라니
더빙 영화가 6편이 전부라니

‘만약 기내식에 닭고기만 있으면 어쩌지? 조린 닭고기는 싫은데. 왜 뒤에서부터 식사를 서브하는 거지? 이런, 더빙 영화가 몇 개 없잖아. 할리우드 영화에 일본어 자막이라니?’ 불평과 적절히 조화를 이룬 걱정은 다행스럽게도 무사 착륙으로 끝났다. 기압 차이로 태평양 상공에서 죽은 줄만 알았던 통가 사람(한국인)이 좀비처럼 벌떡 일어나 가방을 멘다. 웃음이 터졌다. 그의 백팩은 거대한 암석에 붙은 작디작은 따개비 같았다. ‘뭐가 들었을까? 여권과 필기용 벼루 한 개를 집어넣으면 딱 맞을 것 같은데?’

 

여권 체크 카운터 쪽으로 걸어갔다. 중간에 눈을 부릅뜬 경찰관이 나를 유심히 보고 있다. 뾰족뾰족 모서리가 솟은 경찰모. ‘아! 과연 미국이로군. 그런데 왜 나만 쳐다봐?’ 그의 오른쪽 손이 보이지 않는다. ‘권총을 만지는 걸까? 만약 내게 총구를 겨눈다면 어쩌지? 순간적으로 가방을 그에게 밀어 던지고 몸을 굴려 화분 뒤에 숨어 상황을 지켜봐야겠지? 어떻게 맞대응해야 할까? 이 상황에서 가장 위협적인 게 뭘까? 면세점에서 사 온 위스키? 아니면 담배? 어떤 게 몸에 더 치명적일까?’ 


가장 긴장되는 순간이 다가왔다. 출입국 카운터 앞. ‘여권 앞쪽에 이란 비자가 있는데 괜찮을까? 왜 그렇게 크게 붙여 놓았지? 역시 페르시아 제국은 거창하고도 화려하군. 그런데 왜 21세기 최대 제국 미국은 과거의 제국을 인정하지 않는 걸까?’ 입국심사관이 내게 시비를 걸게 분명했다. “미국에 왜 왔지?” 메간 폭스의 시아버지처럼 생긴 노인이 성의 없이 여권을 넘기며 내게 물었다. ‘흠, 우리 집에 왜 왔니? 놀이라도 하자는 건가?’ “밥 먹으러 왔단다 왔단다 왔단다!”라고 대답하고 싶었으나 꾹 참았다. 참길 잘했다. 옆 카운터에서는 이미 작은 실랑이가 벌어지고 있었다. “관광하러 왔지요, 곧장 샌프란시스코로 가야 해요. 이것 봐요! 표가 하나 더 있잖아요!” 입국심사관이 시애틀 사람이었는지, 내 일정엔 관심이 없어 보였다. “아! 물론 스타벅스는 가 볼 예정입니다!” 입국심사관의 표정이 밝아진 듯했다. 그때 갑자기 그의 동공이 커졌다. 자녀가 이번 추석부터 돈을 부치지 않겠다는 통보라도 선언한 것일까? 


“너, 이란은 왜 갔어?” 등에 땀이 흘렀다. “아, 관광하러 갔지요, 스타벅스는 없었지만!” 그가 다시 물었다. “거기 좋아?” 뭔가 나쁘다고 해야 할 것 같았지만 거짓말을 할 순 없었다. “네. 뭐 그저 그랬어요. 커피는 최악이었어요. 아이스 아메리카노도 없다니까요?” “나도 거기 가고 싶어!” 입국심사관은 중얼거리며 내 여권을 돌려줬다. 

밤이지만, 제대로 착륙할 수 있겠지
밤이지만, 제대로 착륙할 수 있겠지

생각보다 순순히 보내 주는군. 하지만 마지막까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백 투 더 퓨처>에 나올 법한 긴 튜브에 들어가야 했다. ‘만약 라이터를 시비 걸면 어쩌지?’ 스캐너가 빙글 회전하는 동안 나는 주류 판매점을 털었다 체포되는 용의자처럼 양팔과 다리를 벌리고 있었다. 진땀이 났다. ‘소지품 중에 뭔가 문제 될 건 없을까? 호주머니에 간이 세금계산서가 있는데 괜찮을까? 몇 년 전 중국에서 산 짝퉁 롤렉스 시계(자세히 보면 rolecs)도 마음에 걸렸다. 진짜라고 할까? 진품 가격은 얼마지? 200위안보단 비싸겠지?’ 끊임없이 걱정이 샘솟는다.


원래 사람이란 간사하다. 막상 튜브에서 아무 일 없이 풀려나오고 나니 안도의 즐거움보단 짜증이 치밀었다. ‘난 돈을 쓰러 온 관광객인데 왜 기소중지자 취급을 하는 거지?’ 샌프란시스코 공항에서 가방을 열어 보라는 검사관에게 물었다. “그래서 다음 체크는 뭐죠? 대장 내시경? 용종이라도 발견되면 입국할 수 없나요?”


공항 밖으로 나와 비로소 미 서부의 따가운 태양과 상쾌한 바닷바람을 만났다. 골이 띵하도록 ‘세금을 내지 않은 담배’를 거푸 피우며 대기오염을 통해 복잡한 입국 과정에 대한 작은 복수를 감행했다. 이젠 여행의 걱정이 사라진 듯했다. 호텔 로비에서 발악하기 전까진.


‘왜 와이파이가 느려터진 거지? 와이파이를 처음 발명한 나라 아닌가? 인심이 왜 이리도 짠가. 역시 버라이즌 와이파이 쿠폰을 사 왔어야 하는 걸까? 난 마감을 해야 한다고! 월말의 <트래비>처럼!’ 

 

*이우석의 놀고먹기
‘저세상’ 유머 코드와 황당한 상황극에 있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이우석 소장은 오랜 신문사 기자 생활을 마치고 ‘이우석놀고먹기연구소’를 열었다. 신나게 연구 중이다. 인스타그램 playeatlab


글·사진 이우석  에디터 강화송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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