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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ver Ending Story of Hong Kong

  • Editor. 이우석
  • 입력 2021.10.01 08:1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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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워하면 언젠가 만나게 되는
어느 영화와 같았던 홍콩 회상기. 

습하고, 진한 홍콩의 분위기. 이 맛에 한 번 빠지면 헤어 나오질 못한다
습하고, 진한 홍콩의 분위기. 이 맛에 한 번 빠지면 헤어 나오질 못한다

공중전화처럼


붉은 네온으로 휘갈겨 쓴 커다란 한자 간판이 건물 사이 공중을 점령하고 있는 곳. 그 아래 골목 사이에는 윗도리를 깐 누군가가 커다란 기름 솥에 무엇인가를 튀기고 있고, 미지근한 연경(燕京) 맥주병이 오간다. 골목 안에서 땀을 뻘뻘 흘리던 주방장이 미필적 고의로 육수의 짠맛을 더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800원짜리 완탕면은 꽤 맛이 좋았다. 노래를 부르는 듯한 말씨가 흐르는 식당 진열장에는 가금류(혹은 야생조류)가 모가지를 붙인 채 걸려 있고 앞에는 전 세계 유수 금융기관의 낯익은 간판이 걸려 있는 곳, 홍콩이다. 


홍콩에 대한 로망을 갖게 된 것은 순전히 영화 덕분이다(추억을 위해 본문에 등장하는 홍콩 배우들의 이름은 구(舊) 한자 독음 표기법을 사용했다). 1980년대 중후반, 내게 가장 익숙한 외국은 홍콩이었다. 당시 최고의 미디어였던 ‘외화’를 통해 가장 많이 들어 본 외국어는 당연히 중국어, 아니 광둥어였다(물론 타이완 수출용 만다린 더빙도 종종 있었던 것 같다). 한류가 아닌 향류(香流), 홍콩 누아르 영화 열풍이 불어닥치던 시기였던 까닭이다. 걸핏하면, 특히 명절 특선으로 홍콩 영화가 극장가 스크린을 장악했다. 성룡, 원표, 홍금보야 원래 유명했고 이후엔 장국영, 주윤발, 적룡이 신촌 로터리를 점령했다.

홍콩에 대해 로망을 가지게 된 이유. 그 시절 홍콩 누아르 영화의 인기는 신촌 로터리를 점령할 정도였다
홍콩에 대해 로망을 가지게 된 이유. 그 시절 홍콩 누아르 영화의 인기는 신촌 로터리를 점령할 정도였다

<영웅본색>. 선글라스를 끼고 버버리 코트(홍콩의 날씨를 생각하면 홍콩 배우들은 극한 직업이었다)를 입은 주인공과 그 친구들. 가 보진 않았어도 스크린을 통해 아호(적룡)가 택시 운전을 하던 완차이(灣仔)의 존재를 깨닫고, 소마(주윤발)가 아성(이자웅)에게 두들겨 맞던 센트럴 일본항공 빌딩 옥상도 머릿속에 단단히 새겨 놓았다. 특히나 영화 첫 장면에서 소마가 먹던 홍콩 종심법원 앞 노점의 장펀(쌀로 만든 피에 고기와 새우 등 소를 넣고 돌돌 말아 간장 소스를 뿌려 먹는 딤섬) 맛이 궁금했는데, 20년 뒤에나 그 맛을 볼 수 있었다.


주윤발이 연기한 ‘소마’라는 극중 인물은 센트럴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홍콩 폭력조직의 2인자였다. 꽤 서민적 입맛에 털털하고 서글서글한 이미지로 등장한다. 실제로도 주윤발은 차찬탱(茶餐廳)이나 얌차집을 자주 찾는다고 한다. 주윤발의 단골집은 센트럴의 ‘란퐁유엔(蘭芳園)’인데 그곳에서 밀크티와 토스트를 맛보고 있다 보면 실제 소마를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아, 총은 쏘지 않을 것이다.


완차이에는 ‘아화’도 살았다. 아화는 1990년 개봉한 영화 <천장지구(天若有情, A Moment of Romance)>에서 유덕화가 연기한 폭주족 청년이다. 낮엔 오토바이를 타고 밤엔 완차이 허름한 빌딩 옥상에 걸터앉아 6개짜리 캔맥주를 마신다(그런데 4캔에 만원 아닌가?). 하여튼 그는 죽은 아버지를 위해 지폐를 태우고 난 후 네온으로 붉게 물든 도시의 야경을 내려다보며 칼스버그를 딴다. 죽음을 예감한 아화는 자신의 인질이었다가 연인이 된 조조(오천련)와 마지막 결혼식을 위해 웨딩숍의 유리를 깨고 드레스와 턱시도를 훔쳐 입는다. 그 웨딩숍은 침사추이에 있다. 홍콩 해피밸리에 위치한 성 마가렛 성당에서 조조와 하객 하나 없는 결혼(사회적 거리 두기 탓이 아니다)을 한 후 아화는 완차이로 돌아가 의형의 복수를 하고 끝내 죽는다. 성 마가렛 성당 앞 공중전화 부스(아화가 전화로 복수를 다짐했던)는 사라지고 없다. 공중전화란 세계적으로 이런 대우를 받는다. 지금 완차이에는 전 세계 어디에나 있는 통유리의 으리으리한 건물 홍콩컨벤션센터가 들어서서 과거 낡았지만 푸근했던 이미지는 사라져 가고 있었다. 공중전화처럼.

미드레벨 에스컬레이터, 영화 '중경삼림'에서 이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 여자친구를 기다리던 금성무가 떠오른다
미드레벨 에스컬레이터, 영화 '중경삼림'에서 이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 여자친구를 기다리던 금성무가 떠오른다

 

1만 년의 유통기한 


올드타운 센트럴은 홍콩 구도심을 지탱해온 곳이다. 언덕과 계단에 층층 근사한 식당과 카페가 많다. ‘언덕과 계단’에 미리 겁을 집어먹었지만 괜찮았다. 홍콩 센트럴과 미드레벨을 잇는 ‘미드레벨 에스컬레이터’가 있어서다. 기네스북 인정 세계 최장 옥외 에스컬레이터라는데 이게 요모조모 편리하다. 기억이 났다. 영화 <중경삼림>에서 이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 승무원 여자친구를 기다리며 ‘유통기한 1만 년짜리 사랑’을 하던 ‘경찰223(금성무)’이 떠오른다.


비가 오거나 덥지만 않다면 올드타운 센트럴에서 소호거리와 할리우드 로드까지 보통 걸어서 이동할 수 있다. 택시비보다 커피값이 더 들지만, 택시는 잘 잡히지도 않거니와 중간에 놓치는 볼거리가 많은 까닭에 걷는 편이 낫다. 홍콩 경찰 영화에서 자주 등장해 낯익은 곳이 있다. 란콰이펑 인근 애버딘 거리 PMQ는 경찰 기숙사였던 옛 건물을 문화예술상업 공간으로 탈바꿈시킨 곳이다. 건물과 마당에 작은 아뜰리에, 공예숍, 패션숍, 베이커리, 티하우스 등 젊은 층이 좋아할 만한 것으로 빼곡히 채웠다. 특히 달달한 케이크, 쿠키와 차를 파는 이름난 카페가 있어 20대 여성 여행객이 많은데 내가 앉아 있으니 강남 한복판에 논이 있는 것처럼 이상하게 쳐다봤던 기억이 난다.


타이쿤(大館)도 행정청사로 쓰던 곳이다. 옛날 감옥과 법정, 경찰청 등으로 쓰던 근대 유적을 옆에 두고, 세계적 건축가의 설계로 건축물 2동을 지어 올렸다. 주윤발의 영화 <감옥풍운>에서는 내부만 주로 나와 이곳이 그곳이었는지 헷갈리지만, 괜히 친근하게 여겨진다. 

홍콩을 여행하며 항상 영화 같은 일들이 내게 벌어지길 바랐다
홍콩을 여행하며 항상 영화 같은 일들이 내게 벌어지길 바랐다

 

언젠간 만나게 되겠지


언덕을 따라 카페, 바, 술집, 클럽들이 늘어선 곳. ‘란콰이펑’은 밤에 가야 한다. 술을 펑펑 마시고 흐릿한 눈으로 이 멋진 간판들을 쳐다봐야 한다. 영화를 한 편 더 봤다. 1996년 개봉한 영화 <첨밀밀>은 1986년의 홍콩 침사추이를 배경으로 한 영화인데 누아르는 아니고 이름처럼 달달한 장르다. 


이교(장만옥)가 광저우에서부터 타고 온 열차는 구룡(九龍)역에 도착했다. 20년 후 나도 거기에서 내렸다. 공항 철도는 구룡역까지 바로 간다. 홍콩 시민들이 상실의 시대를 시작할 즘, 대륙에서 꿈을 찾아 몰려온 이들의 이야기가 시작되는 곳이다. 상하이에서 온 소군(여명)과 이교의 운명도 여기서 시작한다. 본토와는 많이 다른 생활을 각자 이어나간다. 소군이 자전거 배달을 하던 곳은 침사추이 인근 모디로드, 광저우 출신이라 당연히 광둥어를 할 줄 알았던 이교는 구룡역 앞 맥도날드에서 일을 한다. 언제나 ‘등려군(鄧麗君, 타이완 가수)’의 노래가 함께한다. 순박하고 우직한 소군, 억센 척을 하지만 마음만큼은 가녀린 이교. 둘의 사랑은 이어지는 듯 헤어지길 반복한다. 마지막쯤 영화의 장소는 미국 뉴욕으로 옮겨 가지만, 영화의 스토리는 끝이 난다. 가장 마지막 장면, 다시 맨 처음 장면인 구룡역이 등장하고 둘이 앞뒤 좌석에 앉아 한 열차를 타고 왔음을 알려 준다.

축축하게 젖어 드는 홍콩의 밤, 그 위로 반사된 네온사인
축축하게 젖어 드는 홍콩의 밤, 그 위로 반사된 네온사인

다시 홍콩을 가게 된다면 영화 <무간도>에서 진영인(양조위)의 오디오 가게가 있는 삼수이포나, ‘유건명’과 ‘황국장’이 만나던 옥상(리펄스베이가 보이던)을 찾아가고 싶다. 홍콩 누아르 영화가 전성기를 시작하던 1980년대 당시의 홍콩 사회는 그야말로 암울(Noir)했고 허무했다. 1984년 중국과 영국 정부가 공동선언을 통해 1997년에 홍콩 반환을 합의했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 사회 역시 암울하다. 단지 여행을 못 가고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감염병 탓에 많이들 지쳐 있다. 더욱이 골든하베스트(홍콩 유명 영화사)도 망해 없어졌다. 일단 홍콩 영화나 몇 편 보면서 완탕면 대신 짜파게티나 끓여 먹어야겠다. 그리워하면 언젠가 만나게 되겠지. 어느 영화와 같은 일들이 이루어지겠지. 

 

*이우석의 놀고먹기 
‘저세상’ 유머 코드와 황당한 상황극에 있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이우석 소장은 오랜 신문사 기자 생활을 마치고 ‘이우석놀고먹기연구소’를 열었다. 신나게 연구 중이다.
인스타그램 playeatlab

 

글·사진 이우석  에디터 강화송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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