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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북동, 문턱을 넘는 시간

  • Editor. 곽서희 기자
  • 입력 2021.10.18 11:13
  • 수정 2021.10.25 11:04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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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집마다 문장이 피고 예술이 익는다.
예술가들의 대문을 넘나들 때,
성북동은 비로소 가까워진다.

▶서울시·서울관광재단 마을관광 우수상품
올해 7월에 서울시와 서울관광재단은 공모를 받아 마을관광 우수상품을 선정했다. 자치구에서 2013년부터 2019년까지 개발한 마을관광 상품 중 3개의 상품이 최종 우수상품으로 선정됐다. 종로구 창신동 봉제거리, 성북구 성북동 문화예술길, 강북구 너랑나랑우리랑 스탬프 힐링투어가 그 주인공들이다.
 
▶성북동 문화예술길
코스 : 방우산장→최순우옛집→선잠단지→간송미술관→이종석 별장→심우장, 만해 공원→상허 이태준 가옥→길상사
소요시간 : 3시간
※ 간송미술관은 현재 휴관중


●첫사랑의 흔적


원래도 버리고 비우는 데엔 소질이 없지만, 숱한 세월에도 유독 놓지 못한 책 한 권이 있다. 이제는 옅은 곰팡내가 나는 고등학교 문학 교과서. 페이지를 가득 메운 빼곡한 필기는 학구열이라기보단 열렬한 사랑의 흔적에 가까웠다. 시를 사랑했고, 소설을 경애했던 시간들. 눈물 묻은 단어와 희망을 껴안은 문장 한 줄에 내내 앓았던 날들도 있었다. 그 시절엔 마음이 늘 더웠다.

한낮의 해가 성북동 골목을 덮는다
한낮의 해가 성북동 골목을 덮는다

지금도 한국 문학은 여전히 첫사랑 같은 존재다. 내가 딛고 있는 땅과 그곳에 사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라 그렇고, 우리의 언어로 쓰여졌기에 더 그렇다.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아련하고 찌릿한 마음은 성북동을 걷는 동안 서서히 부피를 늘려 갔다. 성북동이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문화예술인들의 집성촌이었다는 사실을 복기해 보면 이상할 일도 아니다.

성북동엔 유독 오랜 세월을 견뎌 낸 집이 많다
성북동엔 유독 오랜 세월을 견뎌 낸 집이 많다

성북동은 그 자체로 한 권의 교과서다. 지도를 펼쳐 놓고 작고한 시인, 문학가, 화가, 작곡가 등 예술가들의 집터와 구옥을 표시하면 금세 한 페이지가 빽빽해진다. 유독 성북동에 옛 한옥이 많은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한용운과 염상섭, 이태준과 조지훈. 이름만 들어도 대표작이 떠오르는 문인들의 흔적이 골목마다 한 채씩이다. 그러니 볼 것 많은 성북동에선 부지런히 대문을 열어 봐야 한다. 제 집 드나들듯, 문을 열고 담장을 엿봐야 성북동의 진짜 모습을 알 수 있다. 유난히 해가 쨍했던 어느 오후. 성북동의 문을 두드렸다.

작은 골목도 무심코 지나치기 어려웠던 하루
작은 골목도 무심코 지나치기 어려웠던 하루

●열린 문과 닫힌 문


예쁜 것과 편한 것. 둘 중 고민하다 결국 편한 쪽을 택했다. 오늘만큼은 성북동 골목골목을 바지런히 누빌 계획이었다. 그러니 운동화는 밑창이 푹신한 것이어야 했다. 홍익대사범대학부속중고등학교 앞. 여정을 시작하기 전, 문화관광해설사님이 첫 마디를 건넸다.  “여기, 참 조용하죠?” 그러고 보니 정말 그랬다. 유난히 고요하고 한적한 거리, 나지막한 건물들, 덩달아 느릿해지는 발걸음. 공기마저 이곳에선 천천히 흐르는 듯했다. 서울에 이만큼 걷기 좋은 동네가 또 있었나.


성북동의 고즈넉한 분위기는 그 역사가 꽤 오래됐다. 비단 오늘내일만 그랬던 게 아니라는 얘기다. 조선시대에 성북동(城北洞)은 이름대로 한양도성의 북쪽에 있었다. 산과 계곡, 바위가 마을을 호위병처럼 감쌌고, 봄에는 복숭아밭에서 도화가 만발했다. 한마디로 무릉도원이었던 것. 산 좋고 물 좋고, 풍광마저 좋으니 시인과 상춘객의 발걸음이 끊이질 않았고, 한양의 돈 좀 있다 하는 양반들도 성대한 별장을 지으러 성북동으로 모여들었다.

근현대에 와서 성북동은 본격적으로 예술가 마을의 면모를 갖추기 시작했다. 1931년, 작곡가 채동선이 가장 먼저 성북동에 자리를 잡았고, 이후 만해 한용운, 상허 이태준, 문인화가 김용준 등 당대의 문화예술인들이 차례로 입주했다. 한 집 건너 한 집이 예술가들의 자택이었던 셈.

문인들의 사랑방 역할을 했던 상허 이태준 가옥
문인들의 사랑방 역할을 했던 상허 이태준 가옥

촘촘했던 집들 중 유독 문인들의 발길이 잦았던 곳이 있었으니, 바로 상허 이태준 가옥이다. 일제강점기에 이태준 가옥은 순수문학을 표방했던 구인회 멤버들의 사랑방 역할을 했다. 당호는 수연산방(壽硯山房, 문인이 모이는 산속의 작은 집). 김기림, 정지용, 이상, 김유정 등 문인들은 이곳에서 시와 문학과 삶을 논하며 밤을 지새웠다.

대추차가 맛있기로 소문난 수연산방
대추차가 맛있기로 소문난 수연산방

오랜 세월이 지났지만, 사랑방 역할은 여전했다. 어엿한 한옥찻집으로 변모한 수연산방엔 평일 오후에도 대추차를 즐기러 오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누구나 문지방만 넘으면 따뜻한 차 한 잔의 여유를 누릴 수 있는 곳. 바람에 뒤뜰의 대나무 잎이 사각거리고, 가지런히 벗어놓은 신발엔 상쾌한 공기가 채워지는 곳. 갈 길 바쁜 여행자는 마구 게을러지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느라 애를 많이 써야 했다.

문인들에게 활짝 오픈했던 문 하나가 또 있다. 이태준 가옥에서 길 하나만 건너면 아늑한 별장 한 채가 나타난다. 조선 말, 마포에서 젓갈 장사로 부자가 된 이종석이 1900년경에 성북동에 지은 별장 고택이다. 당시 별장의 문은 문인들에게 활짝 열려있었다. 다락처럼 높게 지어진 누마루에서 문인들은 밤새 진득한 대화를 이어갔다고. 영롱담 사이로 비치는 달빛을 보며 인생을 노래했을 이들의 모습이 별장의 뜰을 걷는 동안 점차 선명해졌다.
 

오후 3시, 길상사를 산책하기 좋은 시간
오후 3시, 길상사를 산책하기 좋은 시간

이종석 별장이 문인들의 아지트였다면, 길상사는 시민들의 쉼터다. 코로나로 성북동의 많은 관광지들이 문을 닫은 상황에서도 길상사만큼은 반갑게 열려 있다. 워낙 고즈넉한 절인데다 철마다 꽃무릇과 단풍이 피고 지니, 언제 가도 늘 누군가가 산책 중이다. 종교를 초월해 누구나 편히 드나들며 마음의 평안을 얻는 공간이 되길 바랐다는 법정스님의 바람이 바람으로만 남진 않은 모양이다. 잘 다듬어진 산책길을 걷는 동안 발걸음에 쉼표를 찍었다. 더 깊은 가을이 되면 단풍으로 사찰 전체가 붉어진단다. 상상만으로도 설레는 걸 보니, 조만간 일상에 쉼표를 더하러 길상사를 다시 찾을 것만 같다.

그런가 하면 성북동엔 굳게 잠긴 문도 있다. 1930년대 중반 일본 제국주의와 타협한 최남선, 최린 등 많은 이들은 만해 한용운을 회유하기 위해 그의 거처 심우장(尋牛莊)의 문을 두드렸다. 그러나 한 번 닫힌 문은 결코 열리지 않았다. 조선총독부가 있는 곳으로는 머리도 둘 수 없다며 북향으로 집을 지었다는 이야기엔 제국주의와 침략주의에 타협하지 않겠다는 그의 의지가 닫힌 문보다 더 단단히 스며 있다.


●마음속 소를 키우는 일


성북동을 걸으면서 알게 된 사실 하나. 성북동의 모든 구옥이 온전한 형태로 남아 있는 건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김광섭, 염상섭, 박태원의 거처 모두 허물어졌고, 빈 자리엔 기념비가 세워졌다. 조선시대에 누에 농사의 풍년을 기원하며 제사를 지냈던 제단인 선잠단지(先蠶壇址)도 지금은 터전만 남아있다.

커다란 향나무가 최순우옛집 마당의 중심을 잡아 준다
커다란 향나무가 최순우옛집 마당의 중심을 잡아 준다
아기자기하게 꾸며진 최순우옛집의 뒤뜰
아기자기하게 꾸며진 최순우옛집의 뒤뜰

보존의 의미를 다시 한 번 새기게 된 건 터만 남은 집터들을 거쳐 최순우옛집의 문 앞에 다다랐을 즈음이었다. 미술사학자로 제4대 국립박물관장을 역임한 최순우가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를 집필했던 이곳 역시 아슬아슬한 과거가 있다.

2002년, 최순우옛집은 성북동 일대 재개발 구역에 포함되어 철거될 위기에 처했다. 다행히 보존가치가 있는 문화유산을 살리자는 내셔널트러스트 운동이 일어났고, 서울시민들의 기금을 통해 복원작업이 시작됐다. 보수(保守)를 위한 보수(補修)가 이뤄진 것. 최순우옛집에 붙은 ‘시민문화유산 1호’의 타이틀은 온전히 시민들의 힘으로 지켜 낸 명패다.

조지훈 시인을 기념해 세워진 건축조형물
조지훈 시인을 기념해 세워진 건축조형물

이미 사라진 집들에 대한 아쉬운 마음은 방우산장에 도착해서야 조금 누그러졌다. 청록파 시인 조지훈은 자신이 기거했던 모든 집을 방우산장(放牛山莊)이라 불렀다. 경북 영양에 있다는 그의 생가도, 성북동의 집도 모두 방우산장이다. 마음속에 소 한 마리 키우면 직접 키우지 않아도 소를 키우는 것과 다름없다는 뜻. 그러니까, 물리적 공간에 국한되지 않고 영혼이 깃든 곳은 모두 자신의 거처란 얘기다.

그의 집터엔 현재 다세대 주택이 들어섰지만, 멀지 않은 곳에 그를 기념한 건축조형물이 세워졌다. 잔디가 깔리고 의자가 놓였다. 지나가던 한 시민이 의자 하나에 엉덩이를 붙였다. 오늘 하루, 참 촘촘히도 걸었지. 덩달아 한 자리를 자치하고 앉자, 무거웠던 발이 가벼워졌다. 누구나 마음속 소를 키울 수 있는 공간. 이제 조지훈의 방우산장은 시민들의 방우산장이기도 했다.

 

코스의 끝자락. 한성대입구역에 가까워지자 내내 품고 있던 질문을 꺼냈다. 가장 마지막까지 지키고 싶은 성북동의 무언가가 있다면 무엇이냐는 물음에 문화관광해설사님이 답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역시 ‘집’이죠.” 이보다 더한 대답은 없겠단 생각이 드는 걸 보니, 어느새 성북동의 문턱을 성큼 넘는 듯하다.


글‧사진 곽서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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